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04화 (304/365)

304화. 그리고 사공들

벨리타인은 리케니엔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속한 기업 ‘바슈’로 복귀했다.

기업 바슈의 절대 규칙인 보고를 위해서였다.

리케니엔의 동쪽.

새로 건축된 기업 바슈의 건물은 무던한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굉장한 감각이 부려진 듯 세련되어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선 벨리타인은 곧장 텅 빈 홀을 거쳐 여러 갈래로 쪼개진 복도 가운데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아무리 막 지어진 건물이라곤 하나,

내부는 벨리타인을 제외하곤 텅 비어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그저 덤덤히 복도를 거쳐 어지럽게 꼬여있는 다음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도달한 작은 방.

그 방문 앞에 달린 명패에는,

[의료 부장, 벨리타인]

오롯이 그녀의 공간임을 알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과는 달리 방안은 굉장히 어질러진 상태였다.

고급스러운 유리관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널브러져 있고, 곳곳엔 석고상처럼 멍하니 굳어 있는 도마뱀들이 간간이 눈알만을 부라린다.

쩔그럭, 쩔그럭.

바닥에 널린 자재들을 발로 툭툭 밀어가며 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 벨리타인은 이제 방 안 유일하게 말끔한 간이침대 위에 자신의 몸을 쏟았다.

그렇게 누워있는 상태에서 휘적휘적, 입고 있던 조끼를 벗은 그녀는 조끼로부터 해방되어 육감을 드러낸 자신의 상체를 한껏 기지개 켰다.

이어 벗은 조끼 주머니를 뒤적거려 작은 함에 보관된 검은색 알약을 꺼내 들었다.

“바슈, 리케니엔 지부 의료 부장. 벨리타인의 보고.”

알약을 집어 든 채 덤덤한 말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그대로 알약을 삼켰다.

이내 얼마 안 가,

마치 서서히 잠에 의해 뭉개진 것처럼 그녀의 눈꺼풀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 * *

밝은 섬광이 사방에 깔려있다.

용의 시대 이후인 지금에서도 볼 수 없는 비현실적 그곳에서.

벨리타인은 눈을 떴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태연자약하게 섬광으로 가득한 공간 안을 거닐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무작정 앞을 걸어가던 그녀의 앞에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여러 구조물이 나타났다.

부자연스러움으로 점철된 그 구조물들은 높낮이가 모두 다른 단상이었다.

“벨리타인, 기다리고 있었다.”

벨리타인의 정면,

나타난 단상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남자의 목소리.

눈 주위에 검은 칠을 한,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높은 단상 위에서 벨리타인을 내려다보았다.

이어 그로부터 왼편 단상에 있던 중년 여인이 퍽 가벼운 분위기를 풍기며 말을 이었다.

“팔자에도 없는 파견대 임무를 하느라 수고가 많았어.”

벨리타인은 그 여인의 말에 퍼뜩 반응했다.

“아이베리아 정도면 대륙 가운데서도 유순한 전통에 속하죠. 벨라안 군도에 갔다면 지금쯤 짐승 피 한 바가지를 마셨을 텐데.”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 벨리타인의 농에 여러 단상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가장 높은 단상의 남자가 딱딱한 말투로 벨리타인에게 말했다.

“그럼, 보고하도록 해.”

“그는 ‘태반’이 확실합니다.”

짧고 굵게 즉답한 그녀의 말에,

단상에선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다만.”

이어지는 벨리타인의 말에 단상 위는 금세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정확히 어디로 기울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녀의 보고를 잠자코 듣고 있던 가장 높은 단상의 남자는,

비쩍 마른 양손을 맞잡으며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벨리타인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의심,

그는 지금 의심을 하고 있다.

“벨리타인, 너는 어떤가. 어디로 기울어져 있지?”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벨리타인의 도발적인 대답에 남자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지만,

“저는 기업 바슈의 사람입니다. 당연하게도 바슈에 기울어져 있지요. 그러니 이 ‘꿈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이어지는 벨리타인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남자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거듭하면서도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 살짝 누그러진 지점을,

벨리타인은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틈에 잘 스며들 수 있도록 푸념과 호소를 섞어 내뱉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베나즈’라는 이름은 아이베리아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명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 이름을 가진 자를 어찌 한 번의 마주침만으로 판단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의도대로,

단상 위 사람들은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장 높은 단상 위 남자가 아까보다 더욱 누그러진 모습으로 말했다.

“그가 ‘태반’임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인 건 틀림없다. 수고했네, 벨리타인.”

그의 말에 벨리타인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꿈속에 마련된 자리가 파 해지려 할 때쯤.

“참.”

가장 높은 단상 위의 남자가 날카로운 눈빛을 쏟아내며 벨리타인을 재차 붙잡았다.

그 목소리에 벨리타인의 어깨는 일순간 크게 요동쳤지만,

금세 침착함을 유지하곤 고개를 들어 응답했다.

“무슨 일이시죠?”

단상 위 남자는,

그런 벨리타인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리드 가문을 위하여.”

그럼 벨리타인은 속에서 우러나온 어떤 안도감을 씹어 삼킨 뒤 마치 기계처럼 태연한 모습으로 남자의 말을 따라 했다.

“제리드 가문을 위하여.”

그 말을 끝으로,

단상은 나타난 모습과 같이 쑥 뽑히듯 하늘로 솟구쳐 사라졌다.

사라진 단상과 동시에 주위에 가득했던 백색 섬광 역시 하나둘 암전되었고,

끝내 마지막 섬광이 꺼졌을 때.

…,

벨리타인은 작은 잠, 그 안에 포개어져 있던 꿈에서 깨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 * *

조합 언틸 – 레틴.

쌍둥이인 난쟁이 언틸과 렌틸로 차려진 공업 조합은 그 뿌리가 난쟁이답게,

“시트리에가 왔다!”

“우리 딸!”

“하하 베나즈 강철은 어땠나!”

막 복귀한 시트리에를 발견하기 무섭게 투박과 정감이라는 상반된 것들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인간과 난쟁이의 사이는 폐쇄된 사회를 가진 귀 큰 자에 비하면 단연 좋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한데 어우러진 채 쉬이 사회를 구성하며 지낼 정도는 아니다.

인간과 난쟁이의 사회는 엄연히 다른 규칙이 있었고, 그것은 하나의 선처럼 작용해 두 사회의 융화를 가로막았으니까.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발휘된 이해로 인해 두 사회가 융화되는 순간,

그땐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처럼.

“우리 딸! 어디 다친 데는 없나!”

“딸! 2번 톱니를 쓴 걸 보니 어떤 장치를 우회했구나?”

“어떤 장치를 우회했는데? 말해 줘!”

리케니엔의 남쪽,

들판에 반쯤 드러낸 형태로 막 개시된 공장.

그곳에 시트리에가 들어서기 무섭게 작업하던 난쟁이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춘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간인 시트리에를 자신의 딸처럼 아꼈으며, 그에 대한 자부심까지 서슴없이 드러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트리에는,

직전까지 파견대의 일원으로서 내성적인 모습만을 보여왔던 그녀는 퍽 난쟁이들과 같은 유쾌함을 내비쳤다.

이곳은 자신의 집이란 것이다.

“삼촌! 나 인형을 봤어!”

“이런 쉽헐…! 인형이라고?!”

“말조심해! 딸이 뭘 배우겠어!”

“인형이라잖아! 우리 딸이 고기 경단이 될 뻔했다고!”

“이런, 씹! 재수 없는 소리 그만해!”

가족에게 천진을 발휘하는 딸처럼, 해맑게 대답하는 시트리에의 말에 난쟁이 여럿이 도미노처럼 반응을 쏟는다.

그렇게 여러 말들을 나누며 시트리에를 필두로 난쟁이들이 우르르 뒤따라 공장 안으로 들어섰지만,

막 들어선 공장 내부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트리에의 발걸음이 뚝 그쳤다.

대뜸 멈춘 시트리에의 뒤를 졸졸 따르던 난쟁이들은,

“악!”

“누가 내 발을 밟았어!”

“밀지 마, 임마!”

시트리에의 발치에서 서로 엉켜 부딪치며 부산스러움을 쏟아냈다.

“삼촌들, 저게 뭐야?”

시트리에는 그런 그들에게 공장 내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맞물린 것은,

막 초기 공정을 끝마친 거대한 구조물.

그리고 그런 그녀의 질문에 난쟁이들 가운데 가장 긴 수염을 가진 이가 대답했다.

“저건 ‘메탈펄드’ 아이베리아의 강력한 공성 병기 중 하나지.”

그의 대답을 들은 시트리에는 두 눈을 반짝이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데 왜 저런 공성병기를 갑자기…?”

이에 가장 긴 수염을 가진 난쟁이,

언틸이 비장한 표정으로 즉답했다.

“베나즈의 깃발이 곧 2차 원정을 시작할 거니까, 그리고 그 2차 원정은 이전과는 달리 ‘정복 전쟁’이 될 거다.”

* * *

법제 기업 레프리길.

소속 탐정, 론 에브리타스.

그는 리케니엔으로 돌아오자마자 포개어진 손 조합의 상점으로 들어가 싸구려 10월의 바람과 4월의 햇살을 구매했다.

그리곤 리케니엔의 외곽,

사람 하나 없는 잘 포장된 길 주변에 우뚝 선 채.

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어 10월의 바람을 주위에 흩뿌리고, 4월의 햇살을 머리맡에 흘린 채.

입에 물고 있던 연초를 한 입 흠뻑 빨았다.

가을의 시원하고도 쓸쓸한 기류와 그 위에서 쏟아지는 따스한 봄 햇살의 오묘한 조화.

그 아래서 피는 연초 한 대는,

론이 부릴 수 있는 가장 작은 사치이자.

아주 손쉽게 거머쥘 수 있는 여유로움 한 줌이었으리라.

거기다 직전까지 있었던 메트로폴리아의 일까지 떠올려 보니 바람과 햇살과 연초의 맛이 한층 더 진해져 온다.

정말 대단한 모험이었다.

비록 다른 특출난 자들의 번뜩임 덕에 비교적 자랑할 수 있었던 추리 분야를 내세울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원으로서 일을 마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에겐 의미가 깊은 것이었다.

물론 그래봤자 결론적으론 기업 레프리길에게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메트로폴리아에서 미처 다 발휘하지 못했던,

론의 추리력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솟구쳐 있었다.

그리고 그 추리력이 솟구친 부분은 론이 근원적으로 고심하고 고민하던 문제와 맞닿아 있다.

후우.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인 연기를 내뱉으며,

달칵.

품에서 꺼낸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한 론은.

“파견대 일을 했으니 한 보름 정도는 여유 시간이 있겠지.”

얼추 머릿속에 일정 계산을 때려 넣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거 참, 회사가 주는 휴간데 그 휴가를 이용해 회사를 들쑤실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하군.”

그저 떨어진 나뭇잎이라도 좋았을까.

자신의 불안감을 덜기 위해 혼잣말을 계속하던 론은 곧 다 핀 꽁초를 털어 바지 왼편에 매달린 휴대 재떨이 속에 집어넣었다.

그에 맞춰 사라진 10월의 싸구려 바람, 4월의 싸구려 햇살.

그리고 사라진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만만한 ‘사립 탐정’의 모습으로 돌아온 론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리케니엔으로 향했다.

쫓을 것이다.

기업 모나켈이 일으킨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를.

그리고 그 생존자의 향방에 모호함을 부여한 법제 기업 레프리길을.

이내 너머에 있을 어떤 진실을.

* * *

제이는 리케니엔으로 돌아오자마자 제리드 가문의 별장으로 향했다.

본디 제리드 가문의 수석 경호원으로서 마땅히 티히트라에 나가 있는 깁슨을 수행해야 했지만.

그에겐 지금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는 별장 밖, 작은 의자에 걸터앉은 채.

품 깊숙한 곳에 고이 품고 있던 작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수첩을 열어 무언가를 적고, 또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이어 적기를 반복한다.

아주 유려하고, 군더더기 없이 펜을 놀리는 그의 손은.

분명 메트로폴리아에서 크게 부상을 입었던 곳이었다.

끝내 수첩을 덮은 그는,

마치 파견대 내내 보였던 모습들이 모두 가면인 것인 양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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