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05화 (305/365)

305화. 두 개의 진취

티히트라의 새로 단장된 회의실.

그 안으로 검은 양복을 입은 자들이 속속 입장한다.

그들은 베나즈의 깃발 아래 모인 쟁쟁한 기업과 조합의 대표들이었다.

베나즈의 뜻에 동참한 기업과 조합의 수는 지금에 이르러선 두 배에 가깝게 늘어난 실정이다.

여러 부작용이 나타날지도 모를 그런 폭발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회의실에 모인 자들의 턱은 하나같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는 공표와 동시에 편입된 기업과 조합 대표들의 텃세가 적잖이 작용한 덕분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선발대 기업과 조합 대표들의 턱은 후발대인 그들에 비해 가볍게 들 떠 있었다.

이윽고 북적북적한 회의실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이미 선발대 기업과 조합들의 우두머리와 같은 존재였기에,

회의실 안에 있던 대부분이 그에게 예를 표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제리워드 은행의 수장,

깁슨 제리드.

그의 등장만으로 회의실의 공기는 벌써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화재의 중심에 서 있음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는 깁슨은 애써 여유로움을 내비치며 자신에게 몰려 있는 시선들을 유한 말투로 헤쳤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면면을 나눌 수 있어 좋군요.”

텃세 대신 친근함을 내비친 덕에,

직전까지 눈치만 보고 있던 턱 무거운 자들이 하나둘 깁슨에게 다가와 어색한 악수를 청했다.

“제리드 가문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기업 포브코의 회장 마세라한이라고 합니다.”

백발노인의 정중한 악수 요청에 깁슨은 특유의 정력적인 눈빛과 몸짓을 동원해 흔쾌히 받아들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인 이상 계속 마주치게 될 테니까요.”

깁슨의 그 말은 마세라한에겐 황홀한 것이었다.

무려 제리워드 은행이다.

조금 과장하면 기업 포브코의 한 해 사업 추진에 필요한 자금 따위는 깁슨의 재채기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자금적 덩치로는 현시대 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의 수장이 지금 앞으로의 인연을 운운하고 있다.

이를 누가 황홀하게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깁슨이란 존재는 여기 모인 기업과 조합에겐 하나의 보증 수표와 같은 것이었다.

이곳에 모인 자들 가운데 제리워드 은행만을 보고 달려든 이도 있을 정도로 말이다.

“뒤늦게 몸담기를 결심했다 해서 저를 비롯한 선발주자와 어떤 차별점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하기로 한 이상 우린 그저 한 몸, 한 점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악수를 마친 깁슨은 뒤따라 악수를 청하려는 자들을 비롯해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점잖고, 겸손하며, 인간적인 매력까지.

깁슨은 한 번의 언행만으로 주위의 인물들로부터 귀감을 강매해버렸다.

그렇게 깁슨의 등장으로 한참 어수선했던 회의장에,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재상께서 오십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시종의 외침에 회의실 안에 모여 있던 기업가들과 조합 대표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의 자리를 향해 일거에 움직였다.

이윽고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한 절름발이가 들어왔다.

절뚝절뚝,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회의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그에게 주위 누구도 가벼운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그렇게 상석으로 향한 그가 자리에 앉자,

그를 뒤따라 모두가 착석했다.

베나즈 가문의 재상,

기지어 도.

그는 어떤 허례허식을 곁든 인사도 없이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2차 원정을 목전에 둔 상황이니 우리 역시 그에 따른 직무적 수행을 위한 재편에 들어가야 할 것이오.”

기지어는 자신의 앞에 놓인 문서를 살피며 담담히 안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원정에 필요한 대략적인 예산은 올해만 금화 1,660만 개, 그 이후로는 6에서 8할 정도가 매해 마다 소모될 것으로 예상 중이오. 해당 예산은 2차 원정의 성질이 정복 전쟁이기에 높게 책정되었으며, 이마저도 인적 자원의 보호를 위해 설계되어 초기 자금이 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여야 하오.”

큼지막한 문단 하나를 읽어내려간 기지어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좌중을 살폈다.

그러자 단안경을 낀 기업가 하나가 작게 손을 들었다.

기지어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채 말했다.

“말씀하시오.”

“2차 원정의 기간은 어떻게 됩니까?”

“이번 2차 원정은 아이베리아의 중앙 패권에 직접적인 도전을 할 수 있는 선까지 진행될 것이기에 그 과정에 따른 변수를 감히 예상할 수 없소, 그러니 정확히 산정된 기간 역시 없소.”

뒤이어 곱슬머리를 한 조합 대표가 손을 들었다.

“말씀하시오.”

“1차 원정처럼 인챈트를 위시한 속전으로 마무리 지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 말에 기지어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앞서 말했듯이 이번 2차 원정은 1차 원정과는 그 성격이 아예 다르오. 1차 원정은 깃발의 공표를 위한 포석을 마련하기 위함이었고 이번 2차는 베나즈 가문의 직접적인 영토 확장이오.”

살짝 톤이 높아진 기지어의 답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곱슬머리 조합 대표는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이에 기지어는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니 더더욱 인챈트를 위시한 속전속결로 영토를 확장한 뒤 내부에 자금을 순환시켜 내부를 튼튼히 하는 게…,”

“마찬가지로 앞서 말했듯, 2차 원정의 대규칙 중 하나가 인적 자원의 보호요.”

“하지만…,”

기지어는 날카로운 눈으로 조합 대표를 째려보았다.

“그 인적 자원이라는 건 여기 모인 그대들보다 한 단계 높은 자리에 있는 ‘기사’들이란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거요. 베나즈 가문 아래 유력한 바람 한 줄기가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 같소?”

그의 말에 조합 대표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대신해,

기지어는 턱을 높이 든 채 덤덤히 말했다.

“일단 ‘자금’이라는 유형적인 개념으로선 그 가치를 매길 수가 없소. 그대들이 말하는 인챈트는 지극히 수단적이지만 이 아이베리아에선 결코 아니오.”

쉼 없이 쏟아내는 기지어의 발언에 조합 대표는 짓눌리듯 연신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아이베리아에서 인챈트란 기사라는 영향력의 증표이고, 곧 그 증표가 여러 힘의 구심점이 되오. 그러한 인챈트가 그저 수단으로서 소모된다면, 이는 이미 설정된 구심점에 대한 설득을 없애는 것과 같소.”

기지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상체를 쏟은 채 말을 이었다.

“내 더 쉽게 얘기하겠소, 기사는 곧 아이베리아에서 가장 확실한 수표요. 그런 기사를 보증하는 것은 인챈트지. 당신은 지금 그 보증 자체에 대고 위험을 무릅쓰잔 소릴 하는 거요.”

직후 기지어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질문이 남은 듯 몇몇 기업가들과 조합 대표들이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러나 그때,

깁슨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기지어는 그런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발언권을 선사했다.

“모두 들으십시오, 2차 원정으로서 베나즈 가문이 도달하려는 목표는 중앙 패권에 대한 도전권입니다. 그 말은 곧 현 중앙 패권에 도전하는 세력권들 사이에 내던져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니까 2차 원정의 마무리는 곧 3차, 4차로 이어질 대국적 충돌로 이어지는 교두보가 될 거란 말입니다.”

한 글자 한 글자,

귀에 또박또박 박혀 들어가는 깁슨의 말은 어느 배우가 읊조리는 가곡처럼 유려했다.

“그러니 이번 2차 원정의 대규칙으로 인적 자원의 보호가 설정된 것입니다. 인챈트를 그저 수단으로서 기용해 속전으로 영토를 확장하다 보면, 그에 따른 수단의 소모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곧 원정 마무리 시점 직후 이어질 상황에 대비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흡수한 깁슨은 곧장 단호한 말투를 섞어가며 일갈했다.

“애초에 해당 원정에 대한 안건은 기사 베르융 경에 의해 작성된 것이오, 여기 있는 그 누가 전투와 그에 따른 상황에 있어 베르융 경보다 나은 제안을 던질 수 있소? 우리는 해당 안건에 대해 어떻게 살을 붙여야 할지 고민하기 위해 모인 것이지, 그 뼈대를 마음대로 꺾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오.”

잠잠해진 회의장.

기지어는 제법 만족한 얼굴로 깁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시점에,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회의장 문이 벌컥 열렸다.

이내 안으로 들어온 이는,

“한마디로 투자는 장기적으로 봐야 한단 말이지요.”

윤기 넘치는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비어 있는 가장 끝자리에 걸터앉았다.

보기만 해도 눈언저리가 떨릴 만큼 냉소적인 분위기를 띤 미인.

포개어진 손 조합의 대표,

스페라.

그녀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도 아랑 곳 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기지어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늦어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합은 ‘가장 먼저 해왔듯’ 베나즈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정말 당당하기 짝이 없는 능청이다.

주위의 기업가들도, 조합 대표들도 그저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 만큼.

이에 기지어는 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자리에 걸맞은 태도로 응수해야만 했다.

“기꺼이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시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오.”

기지어에게 있어서 스페라는 정말 까다로운 상대다.

본인보다 먼저 베나즈와 접점을 만들어낸 사람이며, 동시에 개국 공신이라 불러도 될 만큼의 공격적 투자를 한 사람.

더군다나 같은 선생의 제자인 부분도 상당히 껄끄러운 부분이다.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지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 배움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생각해보라.

처음은 미진했을지 몰라도 지금 시점에서 보면 포개어진 손 조합이 해낸 것들은 하나같이 대단하기 짝이 없는 것들투성이다.

그 척박했던 리케니엔에 망설임 없이 기반을 들여놓아 주었고,

무려 디안 베나즈의 갑옷 역시 그녀의 조합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것이 가지는 상징성만으로도 스페라는 이곳에 모인 자들과는 궤가 다른 존재로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기지어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렇게 한참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있었던 기지어는 다시금 서류에 시선을 옮겼다.

“다음은 이번 원정 자금의 편성이오…,”

* * *

“바돈, 몸은 좀 괜찮습니까?”

“보다시피요.”

내 말에 바돈은 보란 듯 상체를 이리저리 기울였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간의 걱정이 해소되어서, 그 감정을 그대로 담아 바돈에게 말하면.

그는 여과 없이 감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끝까지 도움이 되지 못했을뿐더러, 도중에 방해가 되었으니까요.”

“아쉽기는 하더군요, 기업과 조합 내 차출된 인원들 속에 덩그러니 놓이다 보니 어색했거든요.”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이자 바돈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다.

“바돈, 그뿐입니다. 아쉬움 말이에요.”

“공…,”

“그 아쉬움은 오늘 늦은 저녁이든, 내일이든, 그 모래든. 그저 언제든 마주 앉아 풀 수 있을 만큼 시시한 겁니다.”

그제야 바돈은 고개를 들어 입가에 멋쩍은 미소를 걸쳤다.

“제가 무겁게 만든 고민을 가볍고 시시한 것으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윽고 그는 내가 알던,

내 가족 바돈의 유쾌한 모습으로 돌아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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