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세 개의 변칙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야말로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이다.
덕분에 바돈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인사를 받아야만 했다.
뒤늦게,
“티히트라 내 재상 주제 회의가 있다고 들었는데, 스페라님도 참여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저택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나갔다.
“베나즈 가문의 중대사를 다루는 회의인데 빠질 수 없지요.”
얼음을 조각한 듯,
냉소를 머금은 아름다운 미모의 스페라는 그에 걸맞지 않게 유순한 능청을 쏟았다.
그것은 직전, 티히트라에서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그렇게 바돈의 안내를 받아 베나즈 가문의 저택 안으로 들어선 스페라는,
사교 모임에서나 보일 법한 우아한 인사를 곁들어 바돈에게 예를 갖췄다.
우아한 인사는 지금 그녀의 복장과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달라붙는 승마복을 입고 있었고,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올라오는 군화 같은 가죽 부츠에 옆구리엔 승마 모자를 낀 채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복장에서 나오는 중성적 매력이 또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복장 자체는 투박한 것이었으나, 그 복장으로 인해 나타난 선들은 가을을 유랑하는 풍성한 구름 같았으니 이러한 차이에서 우러나오는 상반되고 모호한 매력을 어떻게 대단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윽고 그녀가 건넨 인사에 어떻게든 화답해야겠단 생각을 한 바돈은 엉거주춤 다리 하나를 뒤로 빼,
그녀와는 비견될 정도로 볼품없는 인사를 했다.
하지만 스페라는 바돈의 인사에 재차 진심 어린 예를 덧붙일 뿐이다.
그녀와의 첫 만남을 상기해낸 바돈은 결국엔 품었던 어색함을 토로하듯 내비쳐야만 했다.
“이거 참…, 어색하군요. 또 면목 없습니다. 마땅히 그에 걸맞은 예를 보여드려야 하는 건데.”
이에 스페라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마땅히 상대로부터 큰 것을 받는 게 당연한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까.”
자신을 살짝 낮춰 베나즈 가문과 그 가문의 시종장이 가지는 위상을 높인다.
그녀의 그 유려한 대답에 바돈은 금세 얼굴을 붉히면서도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바짝 상체에 힘을 준 바돈은 전보다 낮은 목소리로 스페라에게 물었다.
“방문하신 목적은 역시 디안님을 뵙기 위해서겠지요?”
이에 스페라는 수정을 빻아 바른 듯한, 윤기 묻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리케니엔이 얼마나 변했는지 궁금해 잠시 들러본 것뿐입니다.”
* * *
베나즈 저택 외곽,
대기하고 있던 마차 바깥에서 느긋이 서성이고 있던 난쟁이 라자딜르.
그는 곧 저택 밖을 나서는 스페라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 다가가 물었다.
“어? 왜 이렇게 빨리 오셨습니까?”
그 물음에 스페라는 순간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에 경악한 라자딜르가 천진한 모습으로 되묻자,
“설마 디안 공이 만남을 거부하신 겁니까?!”
한결같이 냉소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스페라의 얼굴에서 부쩍 앳된 소녀의 감성이 튀어나왔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거기에 또 딸꾹질하면서까지 놀란 라자딜르가 크게 뜬 눈을 꿈뻑거린다.
“그럼…? 뭔데요? 무슨 일인데요?!”
스페라는 그를 재차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질 못하겠는지 입술을 굳게 닫았다.
지금 난쟁이 라자딜르는 사무적 관계가 아닌 조합의 가족으로서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대고 치사하고 시시한 감정의 분풀이를 할 순 없잖는가.
그렇게 그녀는 라다딜르를 획 지나쳐 마차 위로 펄쩍 뛰어올라 기수 자리에 앉았다.
이에 뒤따라 낑낑거리며 마차 위에 오른 라자딜르가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설마 디안 공을 뵙지 않고 그냥 나오신 거예요? 아니, 초기 투자자면 마땅히 만나셔야…,”
허겁지겁 연발하며 쏟아내는 그의 미워할 수 없는 걱정에 결국 두 손을 들기로 한 것인지.
스페라는 누그러진 표정으로 앞에 걸려 있는 고삐를 손에 뒤며 말했다.
“그러기엔 지금 시기가 마땅치 않아. 불과 반나절 전에 재상의 주제 회의가 있었잖아?”
“확실히…, 재상 측에서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그래, 나는 지금의 위치를 고수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그것이 내겐 가장 유리하니까.”
“과연 냉정해도 너무 냉정하시네요. 그래도 구태여 길을 돌아가면서까지 리케니엔에 들르셨는데…,”
스페라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잡고 있던 고삐를 놀렸다.
덜그럭,
고급스러운 마차 바퀴가 기울어진다.
본디 마차에 타고 있어야 할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직접 훌륭한 솜씨로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래도 라자딜르, 정말 놀랍지 않아? 리케니엔이 이렇게 변하다니. 공표식 때도 이렇진 않았는데 말이야.”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이어진 그녀의 물음에,
라자딜르는 퍽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즉답했다.
“전에 왔을 땐 마차 바퀴로 긁는 것이라곤 흙바닥뿐이었는데, 대표님 말씀대로 지금은 돌바닥뿐이네요.”
“그런 변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거든.”
“뭘요?”
점점 빨라지는 마차,
그리고 이어지는 스페라의 심심한 고백.
“지금 시점에 그를 만났다간 속절없이 그에게 휘둘리겠구나, 하는…,”
하지만 그것을 전혀 다른 말로 받아들인 라자딜르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떠올랐거든.
예전에 디안 베나즈에게 스페라의 과거 이야기를 해주었단 사실이.
그것도 고작 얼음과자 몇 개에.
* * *
“그렇습니까.”
바돈의 보고를 들은 나는 애써 무던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섭섭하지 않으십니까?”
“당일에 재상 회의가 있었으니 그녀의 입장에선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조금은 의외인걸.
스페라라면 상황 따지지 않고 담담히 나와 독대하려 할 줄 알았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는 너무나 어려운 상대다.
수읽기에 있어선 나보다 훨씬 월등한 존재니까.
확실히 선배님은 선배님이란 거겠지.
덕분에 슬슬 이런 예상도 살갗에 와닿을 만큼 생생해졌다.
그러니까,
2차 원정의 과정에선 분명 마주치게 될 것이다.
‘다른 마이스터의 제자들을’
그것도 적으로서 말이야.
나보다 훨씬 월등한 부분을 가진 그런 무시무시한 적들을.
또 지금까진 잊고 있었지만 베나즈 가문의 공표와 동시에 적대적 의사를 표한 자들 가운데엔,
과거 테티르 경과 어깨를 나란히 한 거물도 있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적으로서 존재하는 재해 그 자체일 거야.
…,
지금부터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확실한 해결점이었던 0은 나를 압박하는 족쇄가 될 수도,
내가 가진 검술이 역으로 방심이라는 비수로 되돌아올 수도 있어.
맥레인이 내게 말했지.
아이베리아에 절대는 없다고.
그러니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절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베나즈를 무너트린 그들 역시 절대라고 생각하지 않아.
“공, 차를 한 잔 내올까요?”
생각에 잠겨있는 내게 은근하고 따스한 말투로 묻는 바돈.
아무래도 내 표정을 읽고 자리를 피해주려는 것 같다.
“좋지요, 가능하다면 바돈과 같이 마시고 싶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바돈.
내 말에 바돈은 싱긋 웃으며 흔쾌히 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속히 가져오겠습니다.”
* * *
“공, 외람되지만…,”
차를 한 모금 홀짝인 바돈이 은근슬쩍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물었다.
“배필을 맞이할 생각은 있으십니까? 혹시…, 이미 마음에 담아두신 분이라도?”
그 말에 막 찻잔을 기울이고 있던 나는,
“컥! 헉!”
입안 가득 뜨거운 찻물을 쏟아야 했다.
“공, 괜찮으십니까?!”
찻물에 입이 막혀 대답은 못 하겠고,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 알리고 나서야 바돈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음, 그러니까.
조금은 쑥스러운 이야기다.
그러나 가까운 누군가에게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싶었던 주제이기도 하다.
“바돈.”
“예.”
“이 시간 동안은 경어가 빠진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내 말에 바돈은 두 눈을 반짝이며 반색했다.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내가 한 꺼풀 벗은 모습으로 다가와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는 이제 나를 가족으로서 대해주었다.
“바돈…, 실은 검의 복원을 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어요.”
“정말…?”
흥미진진한 얼굴로 재차 묻는 바돈에게 나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난 솔직히 좀 걱정했어, 그 얼굴을 갖고도 어떤 연인의 관계가 없다는 건 생물적으로도 생리적으로 직무유기니까.”
경어가 빠지니 바돈 특유의 편안한 말투가 억수처럼 쏟아진다.
“다행이다 정말,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은연중에 나는 너를 소중한 조카로 생각하고 있었거든.”
“통했네요, 난 마음속으로 삼촌처럼 대하고 있었거든요.”
“아무튼, 그래서 그 과정에서 만난 여인에게 반하기라도 한 거야?”
“네, 제게는 과분할 정도로 아름답거든요.”
“그 정도야…?!”
“그렇죠,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세상 순박한 사람이에요.”
“원래 속물 온도는 외모에 비례하는 법인데?”
“그게…, 그녀는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숨어 지내고 있었거든요.”
심취해서 얘기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예전의 제 모습과도 닮아서 묘한 동질감까지 느껴졌어요.”
보다 예전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바돈은 거기에 기울이지 않은 채 부드럽게 대화의 다음 이정표를 제시해주었다.
“그래서, 말만 들어보면 그녀는 대장장이 같은데?”
“맞아요, 그것도 엄청난 실력을 자랑하죠.”
들뜬 내 대답에 바돈이 슬슬 웃는다.
“왜 그렇게 웃어요?”
“내내 자랑스러워하는 게 보여서. 너 정말 그녀에게 푹 빠졌구나?”
낯이 뜨거워졌다.
바돈은 다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연무장에 걸려 있는 검, 그것도 그녀가 보낸 거겠군?”
그 이어짐에 뜨거웠던 낯이 팍 식고 퍽 웃음이 지어졌다.
“맞아요.”
검과 함께 보낸 그녀의 솔직하고 야한 밀어가 생각나서 가슴 한쪽이 급히 두근거리기도 했다.
“바돈, 이래도 되는 걸까요?”
“뭐가?”
“나는 베나즈의 이름을 가졌어요, 그래서 마땅히 맥레인을 위해서 살아가고자 맹세했어요.”
“그래서?”
“간혹 그 맹세를…, 어기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거든요.”
모르겠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엉겨진 목구멍 속에서 칭얼거림이 튀어나와 버렸다.
예전에 맥레인에게 했던,
어른이란 걸 인지한 뒤 자연히 쏟아낸 치기 비슷한 그것들이.
“그래서, 그 아리따운 여인과 멀어진 것도 그런 걱정 때문이었어?”
“아뇨,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상황상 떨어져 있는 것이 당연해진 것처럼.”
“그 말은 어느 시점이든 다시 만날 거란 약속을 은연중에 한 거네.”
“그럴까요?”
내 물음에 바돈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반짝이는 눈빛으로 내게 상체를 쏟은 바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디안.”
“네.”
“너의 이름은 절대로 널 떠나지 않아. 그건 네가 맥레인 님을 위해 맹세한 순간부터 기정화된 사실이야.”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지 않을 이름에 떠날지도 모르겠단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어. 무엇을 결심하고 무엇을 하든 너는 그대로 디안 베나즈이기 때문이야.”
그 말을 듣는데,
묘하게.
늘 연달아 치던 심장 박동이 하나의 것으로 줄어들어 잠잠해졌다.
그것은 내게 묘한 편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앞에 사랑이 보인다면 그저 열렬히 사랑하고, 맹세할 때가 보인다면 마땅히 가서 이룩하면 될 뿐이야. 네게 붙여진 이름에 쫓기지 마, 평생을 이름에 쫓겨 살던 맥레인님도 사랑스러운 아들이 자신과 같은 것을 답습하길 원치 않으실 거야.”
“그렇게 하면서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까요?”
“디안 베나즈라면 마땅히.”
웃었다.
근래 들어서 가장 걱정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