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세 개의 변칙 (3)
“조이 경.”
“시종장.”
이른 아침.
베나즈 저택에 조이 크레비디가 찾아왔다.
그는 갑옷을 입은 상태였다.
“공의 부름을 받고 왔네.”
“예, 공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바돈은 몸을 돌려 조이를 직접 수행했다.
그러는 와중에,
“곧 있으면 2차 원정이 시작되겠군요, 정확한 시기는 언제일지…,”
바돈은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따르는 조이에게 물었다.
“시종장, 바깥 일이네. 그것도 아직은 극비로 다뤄야 할 주제이기에 대답해줄 수 없어.”
조이의 단호함을 엿본 바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행에 전념했다.
그런 바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히려 눈치를 보고 있던 조이는,
“아무래도 오늘 가닥이 잡히지 않을까 싶어, 공께서 날 부르신 것을 보면 말이지.”
조금은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시종장, 원정이 시작되면 자네가 바깥의 병사와 기사들보다 더 단단해져야만 하네. 마음을 단단히 먹게.”
“조이 경께서 함께 해주시니 더 자신이 생깁니다, 이젠 경이 아니라 궁병 사령관으로 불러야겠지요?”
바돈의 대답에 조이는 질색을 하며 손사래까지 쳤다.
“아니, 그냥 지금처럼 경으로 불러주게.”
곧 둘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동시에,
막 2층에서 내려오고 있던 가니아와 마주쳤다.
“시종장님.”
가니아는 곧바로 치맛자락을 잡아 바돈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그런 그녀에게 한쪽 팔을 거둔 채 화답한 바돈.
“아가씨.”
이윽고 자연히 자세를 풀려던 가니아는 뒤쪽의 조이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재차 자세를 고쳐 잡았다.
“조이 경.”
“빌로즈 가문은 평안하신지요, 가니아님.”
“모두 베나즈의 깃발 덕분입니다.”
융성한 젊음 속 산뜻한 그녀의 목소리에,
조이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흐뭇함을 걸쳤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그녀를 향한 걱정이 들었는지, 조이는 입가에 걸렸던 흐뭇함을 일찍 털어내야만 했다.
베나즈는 1차 원정에서 엘르길 마스에게 부쩍 많은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게 1차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이 남으로서 엘르길은 베나즈의 깃발 아래 주축으로 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엘르길은 가니아에게 집중했다.
그건,
깃발 아래 주축이 아닌 아예 한 몸이 되고 싶다는 엘르길의 야망.
엘르길은 야망이 큰 사람이다.
그런데 또 넘기지 말아야 할 선은 지독하게 잘 알아채서 결코 그것을 넘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성질을 알고 있었기에,
조이 역시 그를 도와준 것이다.
물론 돕는다는 게 고작 티히트라에서 며칠 쉬는 것뿐이었지만.
이 부분은 결국엔 베나즈의 선택만으로 매듭지어질 수 있는 일이다.
다행인 것은 가니아 빌로즈가 베나즈에 굉장한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 정도.
그러나 단순히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으로,
엘르길의 기대와 티히트라의 부담을 떠안은 꼴이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저 가녀린 여인이 안쓰러울 뿐이다.
짧은 마주침 속에서 만감을 교차시킨 조이는 내려가는 가니아를 미소로 배웅해 주었다.
이어 집무실 앞에 도착한 바돈이 문을 두들기고,
“들어오세요.”
디안의 목소리와 함께 그 문이 열렸다.
* * *
“공.”
갑옷으로 무장한 조이가 내 앞에 고개를 숙였다.
“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앉으세요.”
서둘러 자리를 권하자 그는 육중한 발소리를 내며 조용히 내가 안내한 자리에 걸터앉았다.
“드디어 시기를 정하신 겁니까?”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조이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2차 원정과 관련해 어떤 차질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면 어찌 저를…?”
열 마디 말로 그에게 설명하는 것 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주머니에 넣어놓고 있었던 낡은 팔찌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메트로폴리아에서 얻은 것입니다.”
탁상 위에 올라온 팔찌를 유심히 살피던 조이는 이내 알아차렸다는 듯 굳게 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인챈트가 담긴 물건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표정만 봐도 알겠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날뛰고 있는 것이.
그러나 조이는 순식간에 냉정함을 되찾곤 과정 따위는 모두 날려버린 채 본질적인 질문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인챈트를 몸에 받아들이신 겁니까?”
“네, 맞습니다.”
조이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아는 얘기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거 내가 시몬 바스티유의 일원이었던 때,
처음으로 내게 인챈트를 알려 주었던 맥레인의 설명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것이기도 했다.
“복수의 인챈트를 가진 자가 아예 없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2개 정도가 끝이었지요.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대부분은?”
“2개의 인챈트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재해에 잡아먹히는 최후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간담이 서늘한 얘기다.
하지만 나는 꼬집듯 그에게 되물었다.
“다행히도 앞에 대부분이란 말이 붙어주었군요.”
“그렇지요, 다수의 재해를 몸에 담고서도 그것들을 온전히 부리던 자들은 분명 있었습니다. 받아들인 재해를 철저히 이분시켜 제어한 자들 말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얻게 되는 이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내해봐도 될 사항이 아닙니까?”
내 말에 조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엄밀히 말하면 그렇긴 하지만, 그런 자들 대부분이 맥레인의 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맥레인을 향한 존경을 담은 눈빛으로 담담히 말을 이었다.
“한번은 맥레인 경이 제게 이렇게 말했었지요.”
궁금하다.
오랜 시간 동안 맥레인과 함께 했었던 그의 이야기가.
“인챈트는 거머쥔 그 시점부터 철저히 주인의 존재를 지워가기 시작한다고.”
맥레인은 내게 인챈트는 곧 사용가자 감당해야 할 영역이라고 했었지.
그래서 당시 두 개의 인챈트를 쓸 수 있냐고 물었을 때 맥레인은 그만큼 감당해야 할 영역이 더 넓어질 것이라 했었다.
그 영역이라는 건,
지금 조이가 말한 지워진 존재를 말하는 걸까?
그러니까 인챈트가 지운 사용자의 존재 그 영역 말이야.
“공, 저 인챈트를 품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조이는 팔찌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이에 나는 시인하듯 그에게 대답했다.
“할 수 있을지, 그것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고이 품어왔던 두려움을 감추지 않고 내비쳤다.
이런 내 모습에 조이는 당황보단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언제나 증명해야 하는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날 나로서 증명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요.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나라는 그릇으로서 앞으로의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을지.”
“그래서…,”
“네, 그래서 거머쥐었습니다. 맥레인은 내게 힘의 진리에 대해 알려주었지요. 강한 힘은 강한 힘 아래서 더욱 강해진다고.”
0이라는 재해를 품은 날,
외부의 인챈트가 역설적으로 도와줄 것도 같아서.
내 담담한 고백에 조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니,
기어이 그의 눈에서 큼지막한 눈물이 쏟아졌다.
“조이.”
“고개를 들 면목이 없습니다, 제 불충이 너무 커 감히 공의 눈을 마주치기가 두렵습니다.”
“어찌 그러십니까.”
“나는, 아니 공을 중심으로 모인 우리 모두 그저 베나즈라는 당연한 이름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지.
그의 눈물이 오히려 내겐 위로처럼 느껴진다는 게.
조이는 눈물을 겨우 거둔 채, 그러나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니지요, 아니었습니다. 우릴 모이게 한 것은, 중심에 서기로 한 자는…,”
부끄러운 듯하면서도 힘겹게 내 눈을 마주친 조이가 말한다.
“디안인데.”
순간 속에서 묵직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이 울컥거리며 솟았다.
“소신, 바로 잡겠습니다.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입니다.”
조이는 의자에서 떨어져 나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신께서 지워지길 감내한 그 부담을 마땅히 나눠 받겠습니다. 우린 그러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 한 자리에.”
* * *
조이 경이 들어간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집무실에서 종이 울렸다.
“시종장님, 제가 올라가 보겠습니다.”
집사부 중 하나가 서둘러 달려와 보고를 했으나 나는 단박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 볼일 보게, 내가 직접 올라가겠네.”
내 대답을 들은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직전까지 열중하던 일에 달려들었다.
구석에서 망 안에 말린 찻잎을 넣고 있던 세라와 가니아님은 그런 내 모습을 살피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혹시나 심각한 일인가 싶어서,
그도 그럴 수밖에 없지.
조이 경이 갑옷을 입고 나타났으니까.
비단 세라와 가니아님 뿐만이 아니다.
저택 내에서 열심히 일하던 집사부 모두가 지금 신경이 아주 날카롭게 곤두서 있을 거야.
이런 나도 공의 부름에 갑옷을 차려입고 온 조이 경에게 조바심 부리듯 2차 원정에 대해 캐물었는데 말야!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 위를 오르자,
막 열린 집무실 문 안에서 조이가 튀어나왔다.
“조이 경?”
“시종장, 이만 가보려 하네.”
“대화는 잘 나누셨는지요?”
이상하게도 조이 경은 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시선을 피하지 못함을 알아차렸는지 옆구리에 끼고 있던 투구를 뒤집어 써버렸다.
“그렇네.”
내 불안함을 엿본 것인지 조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급히 덧붙여 말했다.
“공께선 아직 2차 원정에 대한 시기에 대해 고민하고 계시네, 군 역시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기에 전체적인 의견이 맞물리려면 지금으로부터 꽤 시간이 걸릴 거야.”
계단을 올라갔을 적에 보여주었던 냉철함은 어디로 갔는지.
어쨌든 집사부를 안심시킬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윽고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려던 조이 경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경?”
이내 그는 말없이 차갑고 무거운 건틀릿을 내 어깨 위에 얹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뜨거운 것이었다.
“고맙네, 시종…, 아니 바돈. 그대가 베나즈에 남은 건 가문의 신하인 나로선 축복이나 다름없군.”
도대체 무슨 얘기가 오간 거야?
아리송함을 뒤로하고,
살짝 뭉글해진 가슴으로.
나는 떠나는 조이 경을 끝까지 배웅해 주었다.
* * *
조이가 떠나간 뒤에도 한참이나 제자리에 앉아 있었던 나는 탁상 위에 올라온 팔찌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끝내 자리에서 일어서,
한쪽 벽에 기대놓은 새비안을 뽑아 들었다.
나는 나로서 날 지우려는 짓은 이제 하지 않을 것이다.
맥레인,
당신이 당부하셨던 그 말만을 쫓을 겁니다.
시몬 바스티유 내에서 유일하게 내 진정한 가족이 되어주었던 당신 덕분에,
나는 이곳에서 나를 위해 모였다고 말해주는 자들을 내 존재를 더욱 확실하게 그릴 생각입니다.
그대로,
새비안을 역수로 잡은 나는 탁상 위 팔찌를 내리찍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새비안은 탁상을 관통했다.
팔찌는,
말끔히 양단되어 푸르스름한 기운을 연거푸 토해내고 있었다.
동시에 몸 안에 깃들어 있던 긴장감 역시 땀 흘리듯 스멀스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끝날 때쯤.
연달아 뛰던 심장은 부쩍 힘을 잃어 그 박동이 희미해졌다.
* * *
백발의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 위엔 늘 눈 떠 있던 별들이 모두 눈감은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웃는 것일까,
슬퍼하는 것일까.
그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중의적인 표정을 유지한 채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그의 운명은 강하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