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09화 (309/365)

309화. 하나의 정론

뿌연 입김이 나올 만큼 계절이 확 차가워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면을 바꿔 쓰는 어린아이처럼, 변덕스럽게 변한 기온에 숲은 창백히 질려 있다.

그런 숲 가운데로,

작은 마차 하나가 막 나타났다.

덜그럭, 덜그럭.

밑단에 이끼가 짙게 깔려있을 정도로 관리받지 못한 낡은 마차.

그 마차는 이제 숲을 빠져나와 티히트라에 들어섰다.

추위에 질린 숲과는 달리,

티히트라는 바깥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뜨거워 보였다.

높게 세워진 앙상한 골조들이 정글처럼 얽혀 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망치 소리가 불협을 이루며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낡은 마차의 차창 너머로 티히트라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과연 경제특구로 지정된 곳이로구나 싶다가도 아찔한 높이까지 솟구치려는 건물들에 살벌함을 느꼈는지 바짝 마른 입술을 적셔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선 거대한 산업사고가 일어났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솟은 저 골조들은 마치 해당 사고를 비료 삼아 자라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어이, 젊은 양반! 어디에다가 내려줄까?!”

티히트라의 면면들을 살펴보는 데 여념이 없었던 객석의 남자에게 마차 기수가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티히트라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차분히 이어진 승객의 말에 기수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일자리를 알아보러 왔나? 하긴, 요즘 아이베리아 서쪽 부근에서 베나즈의 깃발만큼 살기 편한 곳도 없지.”

“그렇습니까?”

“그래, 다른 깃발님들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베나즈 깃발 덕에 우리 같은 놈들이 먹고살기 편해진 건 사실이거든. 특히 티히트라는 요즘 제리워드 은행 덕에 매일매일 축제라던데?”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승객은 굳은 표정으로 침묵했다.

이에 눈치를 살피게 된 기수가 입과 마차를 동시에 멈추어 물었다.

“내 신나서 혼자 너무 떠들었구먼, 어떤가? 여기에 내려도 괜찮은가?”

기수의 말을 들은 승객은 마차에서 내려 기수에게 은화 열 개를 건네주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켜켜이 쌓인 주름을 유쾌히 접어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린 기수는 짧게 손 인사를 마친 뒤,

곧바로 마차를 끌고 저 멀리 사라졌다.

이제 길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남자는,

조용히 몸을 돌려 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론.

론 에브리타스.

레프리길 소속 탐정이다.

* * *

그 짧은 시간에 정말 많은 게 변했군.

일전에 기업 모나켈의 산업사고 과정에서 베나즈의 재상을 만난 적이 있었다.

기지어 도.

범상치 않은 인물인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였을 줄은…,

요즘 항간엔 2차 원정이 시작될 거란 소문이 무성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기지어는 2차 원정을 빌미로 기업과 조합들의 전폭적인 투자를 유치시켰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많은 건물이 본격적으로 지어질 리가 없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기업과 조합의 입김이 더욱 세지기 마련이다.

재상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조율할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직전까지 함께 했던 디안 베나즈를 생각해보면…,

그래, 디안 베나즈라는 막강한 보증 수표 하나만으로도 이 티히트라 전체를 조율해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암만 생각해봐도,

아이베리아는 정말 무서운 곳인 것 같다.

신과 같은 소수의 철인으로서 다수가 다뤄지는 곳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고,

그렇기에 철인의 무너짐이 곧 다수의 무너짐과 직결되는 곳이라는 게 두 번째 이유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금 이곳에 왔다.

어쩌면, 지금 내가 파헤치려는 진상은 훗날 베나즈라는 철인을 무너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마부를 통해 제리워드 은행이 이 티히트라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알게 된 이상.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나의 촉은 이제 확신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서둘러 걸음을 옮겨 중앙로라 적힌 이정표를 지나치면,

티히트라의 중앙 광장이 내 눈 앞에 펼쳐진다.

아직 완벽히 건설되지 못한 광장이지만 드러난 윤곽만으로도 완성됐을 때의 모습이 얼마나 대단할진 알 수 있었다.

그런 미완성된 광장 주위엔,

자유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그들은 모두 바빠 보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들의 가슴팍엔 각기 다른 휘장이 걸려 있었다.

이는 각 기업과 조합의 상징 따 만든 휘장은 저들이 해당 기업과 조합에 소속되어 있다는 뜻.

당장 나만 해도,

코트의 안 감에 레프리길의 휘장이 박혀 있다.

다만 내 직업상 신분을 노출했을 때의 실이 득보다 커 이렇게 감추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광장을 지나치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중 가장 대두된 생각이라면 단연,

이곳은 이제 아이베리아의 땅이 아닌 것 같다는 것.

지금의 티히트라는 내가 아이베리아에 오기 전에 보았던 서쪽 땅과 남쪽 땅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거기에 더해 신경질적으로 올라서고 있는 건물들은 마치 메트로폴리아의 모습에 가깝기까지 하다.

물론 냉정히 말하면 비할 바가 못 되겠지만.

중요한 건 이런 나조차,

티히트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풀림이 뭘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디안 베나즈를 아이베리아 중원, 그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겠다는…,

재상의 노골적이고도 당당한 의도가 말이야.

다 태운 연초를 막 휴대용 재떨이에 넣으려는 때.

나는 레프리길의 티히트라 지부에 도착하였다.

이곳 레프리길 역시 여기저기서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곳곳에는 골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아찔한 높이에 매달린 장정들은 고함을 섞어가며 고된 작업을 잇고 있다.

소문일 뿐이지만,

기업 모나켈의 실종은 사실 재상에 의한 숙청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는 이 상황에서.

또 다른 사고를 불러일으킬 만한 환경이 버젓이 펼쳐져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하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군.

티히트라 전반의 근원적 고민을 아무리 해봤자,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결론은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

코트 자락이 휘날리도록, 서둘러 걸음을 옮겨 레프리길 안으로 들어섰다.

그야말로 장대하기 짝이 없는 홀,

바닥은 거울처럼 반질반질하게 다듬은 대리석이 이음새 없이 길게 뻗어 있다.

레프리길의 본점보다 크고 화려한 거 아닌가?

건설자금은 어디서 났데?

더 안쪽으로 향하자 아이베리아의 향이 짙게 밴 갬비슨으로 무장한 경비 인원이 내게 다가왔다.

“론? 휴가를 냈다면서?”

그리고 그자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다.

본점, 홀 경비원으로 근무하던 퍼시슨.

“퍼시슨? 자네가 왜 여기에?”

“발령이 났지, 자네처럼!”

퍼시슨은 짧게 정돈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활짝 폈다.

“이미 소문이 다 났어, 론.”

“무슨 소문?”

“이 아이베리아에 발령 나는 것이야말로 출셋길에 날개를 다는 것이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퍼시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양손을 펼쳐 보였다.

“무슨 소리긴? 주위를 보라고!”

“아까 들어오면서 봤어.”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퍼시슨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앞으로 레프리길의 모든 역량을 아이베리아에 쏟기로 했어. 물론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그 말은 곧 주축인 아이베리아에 발령 나는 것이야말로 본사 직원이 된다는 소리지.”

그리고 이번엔 내가 그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퍼시슨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레프리길의 성격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법제 기업인 레프리길은 각지 전통으로 건설된 유구한 법들을 통한 철저한 단호함을 파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저변을 확대하여 덩치를 불리는 기업과 조합과는 그 시작의 결부터가 다르다는 소리다.

그런데 지금 퍼시슨이 하는 이야기는 일반적인 기업이 행하는 저변 확대이잖는가?

본디 레프리길의 역할은,

각 사회의 완벽한 사유화를 막아주는 제동장치와 같다.

어느 독재자,

어느 귀족 연합.

그들이 사회를 사유화하려 할 때, 자유민들의 반발과 그것으로 이어질 혁명을 막기 위한 패가 바로 레프리길과 같은 법제 기업인 것이다.

이건,

다른 의미로 파봐야 할 문제인 것 같은데.

버릇처럼 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물었다.

“론, 미안하지만 여긴 금연이야.”

“아이베리아잖나, 동쪽 법을 끌고 오면 어째.”

내 말에 퍼시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어, 퍼시슨.”

“어딜 가려고, 론?”

“자료 참고할 게 좀 있어서.”

퍼시슨은 갑자기 바쁜 걸음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거야, 퍼시슨?”

“사내 규칙이 좀 바뀌었어, 이곳 아이베리아로 들어서면서 말이야.”

“무슨 규칙?”

나보다 덩치가 한참이나 큰 퍼시슨은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더니, 상체를 옆으로 기울여 출구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나가라는 무언의 신호일 것이리라.

“퍼시슨, 무슨 규칙이냐고 묻고 있잖아. 이건 정당한 질문이라고.”

“휴가 중인 인원은 사내 시설에 입장할 수 없다.”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그 개 같은 소리가 지금은 레프리길의 규칙이야, 론.”

나는 얼른 휴대용 재떨이에 연초를 비벼 껐다.

“퍼시슨, 한 번이면 돼. 지금은 또 공사 중이잖아? 너에게 피해가 끼치지 않게 조용히 들어갔다 나올게.”

조금은 유쾌한 모습으로 그에게 요청했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론,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실내 흡연의 허락 정도야.”

그래도 과거 지점에서부터 만나왔던 터라 친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보단 출세욕이 더 큰 작자였군.

“그렇군…,”

“론, 아쉽지만 나가줘야겠어.”

“아, 그런데 말이야.”

나는 퍼시슨의 손짓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섰다.

그러자 그는 격앙된 표정으로 두 팔을 펼쳐 내 앞길을 재차 막았다.

“뭐 하는 거야, 론?”

“생각해보니 이곳에 온 다른 이유도 있었지 뭐야, 판사님을 만나러 왔어.”

“그걸 내가 믿을 것 같아?”

“너 믿으라고 하는 얘기 아니야, 애초에 널 믿게끔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고 말이야. 난 탐정이야, 퍼시슨.”

내 강압적인 말에 퍼시슨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리곤 성큼성큼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간 그가 두꺼운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퍼시슨, 허튼짓이야. 판결이나 판례와 관련된 일로 판사를 만나는 건 레프리길의 대 법칙 중 하나거든.”

내 말에도 퍼시슨은 꿋꿋이 책자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반갑군.”

“오랜만.”

“오늘 점심은 뭐 먹지?”

“그보다 정리해야 할 서류가 있어.”

“기업과 조합마다 이자율이 제각각이야.”

다섯의 아주 작은 고블린이 아장아장 줄을 지킨 채 홀을 통과하고 있었다.

거기다 다섯 중 둘은 내게 살가운 인사까지 건넨 상황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판사님들.”

“무슨 일로 왔어?”

“자네는 무슨 연초 피나?”

“점심은 역시 완자가 좋겠어.”

“그래도 계산하는 데엔 어려움이 없지.”

“하지만 서류는 역시 정리하기 힘들어.”

그들 특유의 둥둥 떠다니는 듯한 반응들 속에 파묻힌 나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다름이 아니라 일전에 있었던 판결에 관해 추가 적으로 나눌 이야기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오, 그런가?”

“보아하니 애플베리 연초군.”

“그거 자네가 담당하던 사건이었지?”

“들어가자고.”

“난 완자가 싫어.”

우르르.

다섯 고블린 사이에 끼어 잔걸음으로 홀을 지나친다.

그런 나를,

퍼시슨은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 *

고블린들과 정신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은근슬쩍 자료 참고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그들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마땅히 가서 원하는 만큼 해도 좋다.

그들이 내게 이렇게 말해준 것이다.

그러니까 퍼시슨이 말한 레프리길의 새로운 규칙을 판사들은 모르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판사들 모르게 만들어진 규칙이거나.

그들의 지지를 도움닫기 삼아 자료실로 빠르게 뛰쳐 간 나는 수많은 서류 가운데,

기업 모나켈과 관련한 것들을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주도를 한참 벗어난 수사 막바지에 덧붙여진 내용 가운데, 특정한 한 문장을 찾아내었다.

[제리워드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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