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11화 (311/365)

311화. 다시 그의 이야기

남쪽.

햇살의 쨍함과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박제된 군도.

그 이름도 찬란한 ‘테리라스’

자유를 보장받은 3년이란 시간을 즐기기에 테리라스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으리라.

그렇게 이곳에서 한바탕 느슨해져 있던 나는 지금, 마치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듯 보이는 한 남자로 인해 다시금 정신을 빠릿빠릿하게 세워야만 했다.

지금 나와 마주 앉아 있는 이 남자는,

근방에서 제일가는 정보상.

막시르.

“확실해?”

내 물음에 막시르가 입을 열었다.

“난 거짓을 팔지 않아.”

“그러나 거짓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잖아?”

부정적인 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번지르르한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거짓은 아니잖아?”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알다시피 난 바쁜 사람이야, 살 거야 말 거야?”

그러면서 금으로 도금된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덜컥 조바심을 느껴야만 했다.

그가 내게 팔려고 하는 그 정보가,

정말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기 때문이거든.

거기에 더해 막시르와 같은 거물급 상인을 상대로는 어떤 흥정도 먹히지 않겠지.

해서 나는 서둘러 애달픈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사정했다.

“내가 언제 안 산다고 했나? 당연히 사야지!”

그러자 막시르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한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격은 금화 2,000개야. 운반에 필요한 마차도 그쪽에서 준비해야 하고, 참고로 마차는 무조건 말 여섯 마리가 끄는 것이어야만 해.”

그의 요구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추가수수료로 금화 200개를 더 받아야겠어. 자네도 알다시피…, 출저가 탑인 돈은 대부분 뒤끝이 구린 법이니까.”

“내가 가진 돈의 출저를 어떻게 알고 있지?”

“난 정보상이잖나.”

그보단 다른 이유겠지.

뭐, 이미 그가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단 것쯤은 알고 있었어.

것보다…,

그깟 미신 때문에 금화 200개를 더 태워야 한다니, 그건 좀 속이 쓰리군.

하지만 그의 정보대로라면 내게 있어선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뭐랄까, 결국엔 놈의 설계대로 내가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랄까.

“알겠어, 수수료도 모두 지불할게.”

내 말에 막시르는 그제야 봇짐을 내려놓듯 목젖에 매달아 두고 있던 정보를 살살 풀기 시작했다.

* * *

오랜만이군.

그래 당신에게 하는 이야기야.

이쯤이면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을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어.

음…,

당신 같은 존재가 내 이름을 기억해줄 리는 없겠고.

그럼 다시 소개하지.

나는 아이작.

아이작 엘러.

기억이 안 난다면 기억을 책 모양으로 성형시킨 다음 날 처음 만났었던 부분을 들춰보던가.

마법사면 충분히 가능하잖아?

그래서, 본격적으로 카드 게임인 ‘베레’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나 보지?

그게 아니고서야 거물 정보상을 이용하면서까지 나를 움직일 이유가 없잖아?

다 알고 있어.

당신이 정보상 막시르를 보냈다는 거.

그런데 정말 그 말이 사실이야?

막시르가 내게 판 그 정보 말이야.

그건 순수히 나에게 있어서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거든.

어쩌면 내게 빙의된 그놈에게 제시할 수 있는 흥정 하나를 마련할지도 모를, 그런 일.

걱정할 필욘 없어, 모든 일이 수월히 끝난다면 당신에겐 원하는 것을 주겠어.

그나저나 정말 놀랄 일이로군.

아이베리아의 여덟 자루 검들 가운데 두 자루가 검집을 떠나 부딪히려 하고 있다니!

도대체 아이베리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 뭐 그건 이제 가보면 알게 되겠지.

* * *

설마 나를 위해 배표까지 미리 준비해 놨을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일등석이라니…,

바꿔 말하면 진심으로 그것을 원한다는 소리겠지?

정말 베레에 푹 빠졌나 봐?

특정 카드에 특정 장면을 애써 새겨넣으려 할 만큼 말이야.

그렇게 애정을 쏟을 정도면 직접 소장할 거란 뜻 아닌가?

나 마법사들이 왜 그렇게 베레에 목을 매고 있는지 그 이유쯤은 알고 있거든.

내가 이만큼 바깥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같은 마법사인 너보다!

이것의 효과적인 과시를 위해 만들어진 게 베레잖아, 그렇지?

지금이야 그 원본의 의미가 퇴색될 만큼 카드 게임 자체에 재미를 붙이는 마법사들이 많아졌다지만…,

아무튼, 걱정하지 마.

당신의 카드에 최고의 순간을 새겨줄 테니까.

혹시나 걱정할까 봐서 하는 말인데, 막시르가 내게 건넨 당신 카드는 흠집 하나 없이 아주 온전한 상태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워,

이 두 장의 카드에 그려진 검사들이 진짜 현실에서 결투를 벌일 것이라는 게.

[백로 – 네드릭 나르드]

존재 카드

★15

▲9 ■18

이 카드가 판 위에 존재하는 한 상대가 이용할 수 있는 존재 칸은 3개로 제한된다. (제한된 칸에 이미 존재가 있는 경우 해당 존재가 파괴되기 전까지 해당 칸을 이용할 수 있다.)

이 카드가 파괴되었을 경우 제한되었었던 존재 칸의 이용 비용이 영구적으로 1 증가한다.

그 아름다운 날갯짓은 죽음의 박차. - 묘령의 검사 -

[영산 – 힐리스 체사렛]

존재 카드

★16

▲14 ■14

이 카드가 판 위에 존재하는 한 판 위 모든 존재 카드의 공격과 수비를 3씩 낮춘다.

이 카드가 상대 존재 카드를 파괴할 때마다 판 위 모든 존재 카드의 공격과 수비를 1씩 낮춘다. (최대 3중첩)

이 카드가 파괴되었을 때, 해당 카드로 적용되었던 모든 효과가 해제된다.

그 검, 받으려 하지 마라. 부서진다. - 어느 관측자 -

수많은 베레 카드들 가운데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카드들.

동시에 아이베리아에선 굵직한 대명사로서 존재하는 전설적인 검사들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전투는 어쩌면,

이 두 장의 카드 가운데 하나를 고정 카드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지금 들고 있는 이 카드들이 지칭하고 있는 두 검사의 결투를 목격하러 가고 있다.

그 목적은,

그들의 결투를 통해 목격해낸 거룩한 장면들을 카드에 새기기 위해서.

이 베레에 속한 카드들은 엄연히 등급이란 게 존재한다.

일반 카드,

윤택한 카드,

영롱한 카드,

그리고 찬란한 카드.

이 찬란한 카드는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장면들이 새겨져 있어 그 가치가 엄청나다.

마법사들조차 갖고 싶어 애걸복걸할 정도로!

심지어 찬란함의 대상이 매우 강력한 카드라면 두 번 말하기 입이 아플 정도지.

아, 미안.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네.

아무튼, 내 계획은 이거야.

나도 따로 카드를 챙겨 왔거든.

당신의 카드만큼 상태가 좋진 않지만…,

상관없지, 이제 내 백로와 영산 카드에도 찬란함이 덧씌워질 것이니까.

그리고 이걸 가지고 내게 빙의한 놈과 거래를 할 생각이야.

이 귀한 카드를 어떻게 갖고 있냐고?

그놈의 심부름꾼으로 산 인생이 10년이 넘는데, 오히려 이런 것 하나 없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당신도 그래,

이런 내 경력을 알았으니 이렇게 부탁한 거잖아.

오, 곧 있으면 아이베리아에 도착하겠군.

이거 정말 지랄 맞게 빠른 쾌속선이네!

* * *

배에서 내린 아이작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무시무시했던 속도를 자랑했던 쾌속선처럼,

엄선된 마차는 바람과 같이 빠르게 길을 가르며 북동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덕분에 아이작은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가운데 단 한 장면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마차에서 내리면,

이번엔 늙은 길잡이 하나가 약속이라도 한 듯 다가왔다.

아이작은 그 늙은이를 보고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 역시 어느 마법사의 빙의자라는 걸.

이내 숲을 활자 삼아 읽어내려가듯,

늙은 길잡이는 아이작을 더욱 깊은 숲으로 끌고 들어갔다.

길 아닌 곳을 길 걷듯 가길 몇 시간이 흘렀을까.

아이작은 거대한 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절벽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거기서 늙은 길잡이는 작게 펼 수 있는 천막과 음식을 건네주곤 홀연히 사라졌다.

이제,

아이작은 천막을 펴고.

말라비틀어진 음식을 먹으며 챙겨온 망원경으로 저 아래 평야를 진득이 살폈다.

이렇게 하루가 지났다.

이튿날 새벽.

일찍 눈을 뜬 아이작은 다시 시선을 평야 쪽으로 쏟았다.

끝내 망원경에서 눈을 뗐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

이틀째는 그렇게 끝났다.

사흘째 되던 날.

새벽부터 평야를 지켜보고 있던 아이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곧장 망원경에서 눈을 뗀 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심상치가 않다.

그런데,

탑이 만든 날씨가 아니다.

두근두근,

아이작의 심장 소리가 바깥에서 들릴 정도로 커졌다.

아이베리아에서 탑이 배제된 기후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망원경에 두 눈을 담은 채 평야를 살폈다.

보인다.

아이베리아,

그 위에 전설이라 불리는 두 검사가.

* * *

마치 대치하듯 벽을 이룬 채 갈라진 구름.

그로 인해 어둑해진 하늘.

그 아래 두 남자가 마주 서 있다.

인근엔 형형색색의 깃을 가진 새들이 숨죽인 채 가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 누군가가 보낸 시선들이었으리라.

이러한 시선 가운데엔 비단 새뿐만이 아니었다.

두 발 걷는 자들도 있다.

멀찌감치 떨어져,

마주 서는 것만으로도 하늘을 일그러트린 두 검사를 지켜보고 있는 그들은,

하나같이 아이베리아 내에 강자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누군가는 기사의 이름으로,

누군가는 검사의 이름으로,

또 누군가는 무인의 이름으로.

그들은 저 마주 서 있는 두 검사의 대결을 지켜봐 줄 입회인이었으며,

암묵적이고도 절대적인 증인이자,

목격자들이었다.

전설이라 불린 일곱 기사 중 한 명,

이안 경.

아이베리아의 여덟 자루 검 중 하나,

홍련, 텔마 겔비.

동쪽 어느 비전의 창시자,

운.

모두가 그저 침묵으로 일관한 채 지켜보고 있다.

이윽고,

대척점을 두고 마주 서 있던 두 검사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백로, 이번 날갯짓은 그리 우아하지 못하군그래.”

그는 영산, 힐리스.

여덟 자루 검 중 하나이자 체사렛 류 검술의 원맥.

그런 그의 물음에 마주 서 있던 더벅머리 사내가 인자한 얼굴 속 날카로움을 드러내며 답했다.

“사냥에 접어든 백로는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지.”

백로, 네드릭.

여덟 자루 검 중 하나이자 나르드 류 검술의 원맥.

그가 힐리스를 향해 쏘아붙이듯 묻는다.

“여덟 자루 검은 하나의 대명사이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어느 사유물이 아니다, 힐리스.”

“우리 모두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 피로스의 탕아를 방치했었으니까.”

“그리고 그 탕아가 죽자마자 생겨난 공백을 점유하려는 자가 나타났다.”

“맞아, 그게 바로 나다. 네드릭.”

네드릭은 조용히 허리춤에 매달린 칼자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힐리스는 허리를 살짝 숙여 등에 메고 있던 중검을 바짝 당겼다.

이윽고 힐리스가 두꺼운 턱을 움찔거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되었든, 이 부딪힘으로 여덟 자루 검엔 변화가 찾아오겠지.”

네드릭은 그런 힐리스의 냉소에 화답했다.

“막 요동치려는 아이베리아의 중원처럼 말이야.”

그렇게,

두 검사의 손에서 반짝이는 은빛이 딸려 나왔다.

동시에 하늘에선 백색의 오로라와,

무겁고 뜨거운 잿가루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3부 에필로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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