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12화 (312/365)

312화. 새로운 시작점들

티히트라.

시끄러움을 삼키며 장성한 성관.

그 앞 광장에 모인 양복쟁이들.

그들은 이제 온전한 재상의 세력으로서 기능할 준비가 된 자들이기도 하다.

제리드 은행을 주축으로 건설된 그들 세력은 각 기업과 조합마다 사유한 병들까지 포함되어 있으며,

그 전체적인 덩치는 대략으로 따져도 천에 가까운 숫자를 자랑했다.

이는 곧,

베나즈 가문의 내실 가운데 가장 거대한 덩어리였고.

위상은 베나즈의 집사부와 나란히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오늘 이 자리는 그들 세력의 창업을 공식화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창업에,

베나즈 집사부의 수장인 바돈이 직접 축하를 위해 찾아왔다.

재상 기지어는 바돈의 방문에 직접 발 벗고 나와 화답했으며, 그의 인사를 받은 바돈은 대동한 집사부와 함께 곧바로 리케니엔으로 돌아갔다.

이는 재상이 아닌 외부의 인물과는 대면할 필요가 없음을 과시하는 집사부의 위력 행사이자,

동시에 집사부는 재상과 언제나 한편이라는 무언의 동의를 건넨 응원이기도 했다.

그렇게,

집사부의 등장과 함께 이뤄진 빠른 퇴장으로 일순간 장내가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광장 앞에 마련된 조촐한 단상.

그 위로 막 재상 기지어가 올라서며 장내는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뜻깊은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의 다짐, 그리고 앞으로 보여주실 성원을 마음속 깊이 새기기 위해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기지어의 목소리.

장내는 웅성거림을 죽이고 시선을 한 점으로 모아 단상을 가리켰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기지어는 단상 위에 놓인,

품은 바다가 드러나도록 깎은 소라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전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입니다.”

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전보다 더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 진득하게 장내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한없는 진지함이 더해질 것 같은 와중에, 기지어는 갑자기 불편한 다리를 뒤로 빼 짝다리를 짚고는 가벼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뱉고 보니 새삼스럽군요, 투자자들인 여러분들에게 이 자리는 투자총회나 다름없는데 말입니다.”

가벼운 농담에,

장내에 모인 자들은 똑같이 가벼운 웃음을 보냈다.

덕분에 장내는 유연함을 되찾았지만,

그것도 잠시 기지어는 제법 완강한 탄력을 섞기 시작했다.

“또 새삼스럽지만, 여러분들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 단상 위에 서 있는 내가 여러분의 유일한 대변자라는 것을.”

그가 발휘한 탄력에 자리에 모인 기업가와 조합의 대표는 작은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다.

그들의 반응에 만족한 기지어는 살짝 손을 들어 다시 장내를 침묵으로 일변시켰다.

덕분에 마른 침도 쉬이 삼키기 어려운 경직이 찾아왔지만,

“그래요, 여기까지 하죠. 이 자리의 주인공은 여러분들이니까.”

기지어는 또 그것을 뒤바꾸는 유쾌를 부리며 살짝 단상에서 물러나 뒤쪽으로 손을 펼쳤다.

“여러분, 제리드 은행의 수장인 깁슨 씨입니다.”

그렇게 이어진 기지어의 소개와 함께,

폭발적인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무대 위로 올라온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남자.

깁슨 제리드.

그가 조용히 단상 앞에 섰다.

* * *

제이는 막 무대 위로 나서는 깁슨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런 그의 왼쪽 귀에 걸린 귀걸이에선 막 누군가가 보내는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상 없습니다, 대장’

‘북쪽 성관 탑, 이상 무.’

제리드의 경호대, 그들의 보고를 듣고 있던 제이는 귀걸이에 손을 얹은 채 입을 열었다.

“확인, 지금부터 본사는 내가 책임진다. 쉬어.”

말을 마친 제이는 조용히 단상 위에 선 깁슨을 바라보았다.

본사로 지칭된,

경호대의 최 중요 수행 인물인 그를.

경호대 대장 제이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에게서 시선을 뗀 채 한 구석으로 걸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벽에 기대었다.

누구보다 가장 앞서서 경호 임무를 수행해야 할 그가,

누가 봐도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제이는 아주 느슨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윽고 품에서 작은 수첩을 하나 꺼내든 제이는 마찬가지로 품에서 작은 만년필 하나를 꺼내 집었다.

특이하게도,

만년필의 촉 끝엔 잉크가 흐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펼친 수첩에 무언가를 적으려는 찰나.

“우리는 뿌리가 되어선 안 됩니다.”

무대 너머 단상 위에서 울려 퍼지는 깁슨의 연설이 흘러나왔다.

“다시 일어선 베나즈 가문에게 필요한 건 오직 곧은 가지뿐이기 때문입니다.”

좌중을 단박에 휘어잡는 힘 있는 목소리.

“우리는 철저하게 베나즈라는 뿌리를 토대로 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린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서로가 서롤 견제하며 건실을 쌓기 위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박혀있는 이상이란 이름의 심지.

누가 감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가 저자를 과거, 자본의 화신이었던 철강왕의 후손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제이는 잠시 입가를 올리다가,

다시 자기 일에 집중했다.

펼친 수첩,

그 안에 새긴 첫 문단은.

[그가 가진 운명의 개연성이 생각보다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었다.

그다음으로 새긴 문장은 이러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만큼 그의 운명이 대단하다는 증거이니까요. 애초에 그 정도로 거대한 인챈트라면 충분할 겁니다.]

그렇게 두 번째 문장을 완성했을 때쯤.

깁슨의 연설이 오묘하게 겹치기 시작했다.

[티히트라에서 나타난 운명은 생각보다 약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강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운명 역시 보통 기구한 것이 아니라서, 좀 더 한계까지 몰아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베나즈라는 이름이 도달하려는 원론에 우리 역시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 도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합시다,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해서. 배신이 아닌 자신으로.”

[그리 걱정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레프리길의 탐정 하나가 냄새를 맡았기에 적절한 미끼로 빨아들여 처리했거든요.]

“이 다짐을 공고히 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서 발표합니다. 기업과 조합의 대표 11명으로 구성된 ‘11인회’ 입니다.”

[이후 후속 처리는 이곳에 있는 ‘두 명’의 제리드 소속 인원들이 처리해 줄 거라 믿습니다.]

천천히,

수첩을 들여다보고 있던 제이는 곧 만년필을 품에 집어넣은 뒤 작은 유리병을 하나 꺼냈다.

그리곤 병 안에 담긴 걸쭉한 걸 수첩 위에 쏟고는 곧장 덮어버렸다.

이윽고 태연한 표정으로 다시 본래 위치로 돌아온 제이는 귀걸이에 손을 얹은 채 경호 인원들에게 명령했다.

“집중,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라.”

그것은 으레 형식적인 명령이었다.

* * *

깁슨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참으로 오랜 방황이었다.

철강왕이란 이름을 가진 제리드 가문에 오랫동안 짓눌려 있었던,

갈 곳을 잃은 그만의 이상이 오늘 이정표를 만났으니까.

바로 이곳 아이베리아에서.

이윽고 단상 위에 차례로 올라오는 11명의 인원을 깁슨은 달려가 맞이했다.

11인회.

재상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구.

사유한 병들을 비롯해 자유롭게 쓸 수 있게 조성한 자금을 운용하는 단체인 그들은,

바꿔 말하면 재상이 휘두를 수 있는 열 한 자루의 검.

물론 그들 구성원 모두가 기지어와 깁슨의 입맛대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연성 공방, 제임스 막포드.

접은 엄지, 릭콘 켄다르와 같은 한없이 충성을 맹세한 자들도 있는 반면…,

포개어진 손, 스페라.

로베스 공업, 알란 바켄과 같이 냉철하고 계산적인 자들 역시 있었으니까.

그중에서도 단연 부담되는 상대는,

역시 스페라였다.

깁슨은 온유한 표정으로 막 단상에 올라선 스페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 자리에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행사상 기계적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그 친절한 모습에 스페라는 콧방귀를 뀌었다.

“감투 받는 자린데, 당연히 나와야지요.”

그러나 그녀는 깁슨에 대한 존중을 숨기지 않았다.

스페라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처럼, 그녀 역시 깁슨이 가장 부담스러운 상대였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깁슨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 * *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아니,

내가 잠들어 있었던 게 맞나?

간단한 사고적 충돌일 뿐인데 머릿속이 깨질 듯 아프다.

비싼 화약 한 바가지를 뇌 속에 집어넣고 불을 붙은 것 같아.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이베리아는 지금 겨울일 텐데, 왜인지 하늘에선 봄에서나 볼 법한 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상체를 들어 올려,

주위를 살폈다.

앳된 아이의 손에 들린 파스텔로 그려낸 것처럼.

세상은 지나치게 뿌옇고 옅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직전까지 고통에 얼룩져 있던 머릿속엔 이제 동그란 공백이 박힌 것처럼 공허가 가득했다.

이런 내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일찍 깨어났네.”

서둘러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요염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조용히 내 앞에 놓인 그루터기 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다.

그 이름도 당연히 알고 있다.

“벨리타인…?”

내 부름에 여인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오랜만이야. 론.”

론.

그래, 내 이름이다.

그런데 이런 내 이름을 듣기 무섭게 머릿속이 또다시 아파져 온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문했다.

“내가 묻고 싶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그녀의 질문에 한참 머릿속을 되뇌던 나는 답답함을 느끼며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몰라, 모르겠어. 기억이 나질 않아.”

그 답답함은 곧 신경질로 번졌다.

“여긴…, 어디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내 물음에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즉답했다.

“여긴 꿈속이야.”

“… 뭐?”

“네 망가진 머릿속이 그려낸 꿈.”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지금 수술 중이야, 머리에 꽤 큰 구멍이 생겼거든.”

“하지만 기억이…!”

“쉽게 날 리가 없지, 머리에 구멍이 뚫렸으니까.”

갑자기 속에서 역함이 들끓어 올랐다.

그래서 나는 벌떡 일어나 상체를 숙여 한바탕 속을 게워냈다.

“우… 우웨엑…!”

“진정해, 바슈는 꿈을 이용한 치료 기술로는 으뜸인 기업이니까.”

그런 내 등을 무심히 두들기며 나직이 중얼거리는 벨리타인.

“나는…, 그럼 지금 수술 중인 건가?”

“응, 바슈에서도 제일가는 3번 치료단이 집도 중이지. 여덟 명으로 구성된…,”

“왜…?”

“왜? 왜 우리가 당신을 치료해주는 건지를 묻는 거야 아니면 왜 머리에 구멍이 뚫렸나를 묻는 거야?”

“둘 다.”

벨리타인은 나를 자리에 앉힌 뒤,

조용히 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그야 머리에 왜 구멍이 뚫렸는지 알고 싶으니까지.”

* * *

검은 바탕,

하얀 십자.

베나즈 가문의 깃발을 한쪽 어깨에 두른 채 앞으로 나아가자, 미리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조용히 끼고 있던 아무 문양도 없는 반지를 내게 내밀었고,

나는 그들의 그 반지에 직접 미리 달궈진 베나즈의 인장을 가져다 대었다.

그렇게 두 기사의 손에 걸린 반지엔 오목한 베나즈의 인장이 각인되었다.

이는,

그들에게 각각 한계 없는 군사적 지휘권을 보장해주는 증표였다.

“베르융 경, 테티르 경.”

내 부름에 두 기사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나아가시오.”

이어지는 내 명령에 두 기사는 동시에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뒤돌아 망토를 휘날리며 멀어졌다.

그렇게 그들이 베나즈 저택의 정문 밖을 나서자,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백 병사들의 깃발이 솟구쳐 올랐다.

2차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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