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13화 (313/365)

313화. 두 개의 추

1차 원정을 통해 베나즈 가문은 아이베리아의 중원으로 향하는 세 가지 길을 확보해 내었다.

북서, 물의 도시 발치아를 거치는 길.

그 아래 고성 레자스를 거치는 길.

그리고 마지막 남서쪽, 굽이진 성채 갈로샤를 거치는 길.

나와 파견대가 메트로폴리아에서 향후 1년간의 배부름을 확보할 동안 기사들은 나를 대신해 2차 원정에 대한 고민을 쌓았다.

그렇게 배부름을 가지고 돌아온 직후 그들이 쌓아 올린 고민의 높이를 가늠하면서,

또 하나둘 헤아리며 내놓은 나의 결론은 미리 내놓은 두 기사의 의견과 일치했다.

해서 일치되어 나온 결과물은,

북서와 남서.

두 길을 동시에 개진해 나가는 것.

기사들과 종자들은 길목에 수놓아진 적들을 알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쏟아냈다.

그래서 가진 인챈트로,

가진 새들로,

그것도 안 된다면 구름에 묻은 이야기나 나뭇잎에 갈라진 바람까지도 앎을 위해 박박 긁어모았다.

이는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정말 말 그대로 불어온 서풍에 적들의 메아리가 묻어 있을까, 일대에 있는 절벽 전체를 긁어 그 부스럼을 가져오기까지 한 것이다.

위 일례는 기사들과 종자들이 벌인 수많은 첩보 작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는 바꿔 말하면,

적들 역시 우리를 스쳐 지나간 동풍을 놓치지 않았을 거란 것.

우리가 안 만큼,

적들도 우리를 알고 있다.

첩보는 싸움의 유리가 아니라 공평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란 걸,

2차 원정의 계획을 세우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이러한 기사들과 종자들의 노고 덕에 우리는 적들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서와 남서, 두 개의 길을 동시 개진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은 것도 이러한 적들의 윤곽을 상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북서쪽 길은 임시로 새워진 세 개의 관문 요새가 있다.

그리고 그 세 개의 관문 요새를 넘으면 비로소 중요 거점인 물의 도시 발치아가 나온다.

그 발치아의 영주는 ‘대녀 엘로랭’

그녀의 휘하에는 인챈트를 가진 두 명의 기사가 있다.

이어 남서쪽 길은 요새화된 관문은 없지만, 길목 대부분이 귀 큰 자들의 공법으로 만들어진 방어형 숲으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했다.

험준한 길을 반영한 듯 이러한 길 끝엔 그 이름도 굽이진 성채인 중요 거점 갈로샤가 나온다.

갈로샤의 영주는 ‘대니’

대녀라 불리는 엘로랭과는 달리 그 누구의 후원도 등에 업지 않은 그에게는 대신,

귀 큰 책사인 ‘글랙스’가 있다.

어쩌면 재해를 휘두르는 기사들보다 더 어려운 상대일지도 모르는

말 그대로 견고한 하나의 상상과 맞붙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그의 존재는 확실히 부담스럽다.

대녀 엘로랭 역시 그녀 뒤의 후원자가 누구인지 아직 정확히 알아낸 바가 없어 부담되는 상황.

그러나 이런 위의 부담들을 껴안으면서까지 북서와 남서를 동시에 개진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마지막 남은 서쪽 길.

그 하나 때문에.

서쪽 길은 가장 크고 윤택하여 보급을 비롯한 행군 전반을 쾌적하게 진행할 수 있기까지 한 곳이나,

그곳엔 고성 레자스가 있다.

그리고 그 고성 레자스에는 전설이라 불리는 기사이자 동시에 과거 테티르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칠기사 중 한 명,

‘베가르드 욘테’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일찍이,

베나즈 가문의 공표에 친히 적개심으로 화답한자들 가운데 하나.

나는 그것을 어느 때나 찾아볼 수 있도록 첫 번째 서랍에 보관하고 있다.

아이베리아는 저주스러운 이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긴말이 필요한가.

조만간 마주칠 전장에서, 내 직접 그대의 마지막 핏방울까지 털어내 그 자취를 없애겠다.

- 베가르드 욘테 -

테티르와 같이 베나즈에 대해 케케묵은 증오를 가진 기사.

그러나 테티르와 같이 설득이 가능할 진 확신이 서질 않는 그런 상대.

거기다 레자스는 무려 고성이다.

이 고성이란 이름을 가진 성은 아이베리아를 통틀어 열세 곳에 불과할 정도로 그 위상이 대단하다.

그 말인즉슨,

건설로 이룬 난공불락이란 것.

오죽하면 13 고성이라는 명칭이 아이베리아 내 고유적 명사가 되었겠는가?

아직 우리에겐 그런 고성을 상대할 공성 병기가 없다.

있다 해도 고성을 무너트린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가진 인챈트의 힘으로 공성의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전력 적으로 아주 큰 손해다.

우리는 중원,

기사왕의 성지인 오쿨루스를 목전에 두고 망설임 없는 최선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만전인 상태여야 하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는 서쪽 길을 가지 않는다.

북서와 남서로 나아가 그들을 고립시킬 것이다.

그 고립에 고성 레자스가 반응을 보인다면,

…, 그땐 어쩔 수 없이 태풍이 불어야 하겠지.

적어도 확실한 억제는 될 것이다.

나 혼자만이 아닌, 그 에커즈 기사단이 함께일 테니까.

이윽고 베가르드 욘테가 보낸 서신 아래 포개어져 있던 종이를 나는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래서 지금은 이 편지가 더 절실해지는군.

아직 윤곽조차 확인되지 못한, 이름만 아는 기사.

디안 베나즈여,

우리는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벨샤드의 기사, 렝케지스-

* * *

“곧 태풍이 올 겁니다.”

검은색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여인이 고개를 숙인다.

그에 따라 귓불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감색 단발이 찰랑거린다.

그런 그녀의 꿇은 두 무릎 아래엔 둥근 달이 새겨진 깃발이 깔려있었다.

“그 전조로 두 개의 바람이 두 갈래로 휘몰아칠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앞.

드높은 천장에 닿을 정도로 그 등받이가 굉장히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거대한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어떤가, 그 두 개의 바람을 내민 태풍은? 끝내 성지에 닿겠는가?”

그의 물음에 여인은 침묵을 유지하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제 별은 그리 밝지 못해 거기까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상체가 앞쪽으로 크게 당겨지듯 쏠렸다.

“커헉…컥!”

격한 기침이 쏟아질 정도로 거칠었던 움직임, 이제 여인은 두 팔을 바닥에 짚은 채로 힘없이 늘어져 있다.

그런 그녀의 목엔 검은 목줄이 채워진 상태였다.

그 목줄을 쥐고 있는 남잔 재차 목줄을 당겨 여인을 흔들었다.

“보았음에도 못 본 척하는 것이냐, 아니면 그저 대답하길 거부하는 것이냐?”

비아냥거리듯 한 남자의 물음에 여인은 마른기침을 멈추곤 얕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아쉽게도 그 가운데 제가 드릴 대답은 없습니다.”

“식은 별의 점성술사인 널 계속 살려둘 필요가 있을까?”

살벌함이 가득한 남자의 말에 여인의 입술은 되려 냉소를 그렸다.

“제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진 본인이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운명에 빌붙는 기생충 같은 년.”

“그리고 당신은 그 기생충 덕에 예정에 없던 비대한 운명을 가지게 되었죠.”

여인의 말에 그림자에 반쯤 묻힌 거구의 남자는 이를 가득 씹었다.

하지만 끝내 쥐고 있던 목줄을 놓은 남자는 뭔지 모를 두려움을 내비치며 고개를 가로저어야 했다.

“이미 아이베리아의 중앙 패권을 두고 ‘3인의 성인’이 철저한 대치를 이룩한 상태다. 거기에 과거의 태풍까지 더해진다면…,”

“제 별은 밝지 않을 뿐 아직 빛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직 내 운명에 여지가 남았다?”

“균열은 많을수록 좋지요, 세 개의 균열로도 부서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곧 네 개의 균열로서 부서질 수도 있다는 뜻.”

여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3인의 성인이라, 참 아이러니한 이름입니다. 그중 하나가 기사왕의 피를 빨았던 자인데.”

그녀의 말에 남자는 콧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아이러니한가? 성인의 피로 배를 불렸다면 성인의 걸로 채워진 그자야말로 마땅히 성인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남자의 말에 여인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검은 천으로 가려진 두 눈으로 무엇을 보려 하는지 한참이나 움찔거렸다.

이내 오묘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다.

남자는 여인의 그런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뭘 보았지?”

“그저 방금 그 말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뿐입니다.”

“깨달음?”

“수많은 칼날이 성인의 배를 갈랐지만, 정작 그 내용물을 취한 자는 단 하나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면 마땅히 성인이라 불릴 법하다는 것을.”

어쩌면 비굴해 보이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남자는 강인한 턱 위로 만족한 미소를 그렸다.

“그렇지, 그게 결정적 차이인 것이다. 그렇기에 기사왕을 찌른 수많은 칼날 중 하나였던 가헨이 내 밑에 있는 것이지.”

“그를 움직이실 생각입니까.”

“놈은 다루기가 지극히 까다로워, 그 뜨거운 피로 이뤄진 가족들 모두.”

중얼거리던 남자는 대뜸 상체를 여인 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동시에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그의 얼굴도 드러났다.

하얗게 질린 왼쪽 눈, 그 위를 세로로 가로지른 거대한 흉터.

까끌까끌한 흰 수염과 사방으로 뻗친 흰 머리.

그리고 맹렬히 타오르는 하나의 주홍빛 눈동자.

그의 그 눈빛엔 순수한 탐욕이 깃들어 있었다.

“너, 보았지? 내 운명의 이정표를. 가헨, 그 녀석을 움직이면 되는 거로군?”

“그는 이미 독자적으로 한 번 움직였지만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이 보태진다면 분명 결과는 달라지겠지요.”

남자는 거대한 두 어깨를 들썩였다.

식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 별이 용케도 뭔가를 밝혀냈구나.

“그런가? 그래! 어떻지? 내 손으로 가헨이란 수를 착수했을 때 도달할 그 결과 말이야!”

남자의 집요한 물음에,

여인은 자신 있게 확답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찬란함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 * *

“기합이 너무 들어갔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연 베르융,

그런 베르융 옆에 나란히 말을 타고 가는 테티르.

“자네는 기합이 너무 부족한 것 같은데!”

전신을 무장한 그들이 가볍게 쥔 고삐를 휘두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베르융, 이게 대체 얼마 만인가! 대의를 위한 싸움 말이야!”

“이전까진 대의를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이 말인가?”

베르융의 물음에 테티르는 푸르락누르락한 얼굴로 극렬히 반응했다.

“이 사람아, 그 말이 아니잖나! 싸움에도 본 궤도가 있으니 하는 말이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융은 활짝 웃었다.

“그래, 자네 반응을 보니 실감이 나는군. 과거에도 전투 직전 자네는 그런 표정을 지었었지.”

그가 부리는 친근함에 테티르는 누그러진 표정으로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렇지. 그랬었지.”

“좋지 않은가, 베나즈의 이름으로 다시 싸운다는 것.”

테티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겐 갚아야 하는 빚이기도 하네.”

이어 베르융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가 갚아야 하는 빚이지.”

이제 테티르는 정면을 응시한 채 굳은 얼굴로 퍽 진지함을 쏟아냈다.

“베르융, 지금부터 나타나려는 적들은 모두 과거와 연결되어 있을 걸세. 그 말은 베나즈의 숙적들이란 거네.”

“오히려 그들이라면 다행이지, 혹여나 우리가 모르는 불세출의 천제가 나타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낭패가 아니겠는가.”

“맞지, 맞지.”

너털웃음을 지은 테티르가 이내 고삐를 오른쪽으로 당겼다.

“베르융,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걸세.”

이에 화답하듯 베르융 역시 고삐를 왼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그럼, 조만간에 다시 만나지.”

“아, 참.”

“왜 그러나, 테티르?”

“이번 원정은 자네나 나나, 같은 직위잖나? 그럼 이번 우리들의 행보는 모두 경쟁 거리가 되겠군.”

“그래서, 그것 가지고 공께 돌아가 정치질이라도 하시려고?”

“혹시 모르지, 이래 보여도 나 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거든. 게다가 이미 군사총책의 내정은 자네로 되어있기도 하잖나.

“그래서 더더욱 아쉽군, 자네 같은 유망한 인재를 실컷 굴려야 하는데.”

테티르는 귀가 떠나가라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굴러야지, 기사에게 여부 같은 게 있을까!”

시시껄렁한 장난을 끝으로,

테티르는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였다.

그런 그의 뒤로 길게 늘어진 중장병들의 행렬이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이들의 행렬이 절반 정도 지났을 무렵.

곧 베르융도 북서쪽 길목을 향해 말머리를 고정한 채 속도를 높였다.

묵직한 두 개의 추가 부딪혀 떨어졌고,

이제 다시 만나 부딪칠 때를 위해 각자의 방향으로 열렬히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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