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14화 (314/365)

314화. 첫 번째 파쇄

물의 도시 발치아.

서쪽 경계를 위해 세워진 세 개의 관문 중 첫 번째, 콴.

그곳의 수비대장 엘리난도는 복귀한 정찰대의 보고를 받는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진짜 온다.

말로만 듣던 리케니엔의 베나즈에서 출정했다던 군사들이.

혹시 몰라 인근 숲에 풀었던 새들까지 모두 불러 그것들의 지저귀는 목격담까지 모두 다 들었다.

정말 오는 거다.

태풍의 전조 격에 해당하는 무지막지한 바람이.

엘리난도는 버릇처럼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 행동이 왜 버릇이 되었는지를 증명하듯.

그는 이내 침착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엘리난도.

발치아의 6번 견습 기사.

그러나 그는 견습과는 거리가 먼, 잔뼈 굵은 기사다.

기사로 살아온 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갔으니까.

그럼에도 견습이란 칭호가 붙은 이유는 발치아의 유구한 전통 때문이다.

1번과 2번 기사를 제외한 아래 기사들은 모두 견습에 해당한다.

그것이 대녀 엘로랭이 내세운 규칙이자 통치법.

군사의 위계는 위 숫자의 순서로 이루어졌기에 정식 기사들의 입맛대로 그 아래 기사들의 줄 세우기가 가능하다.

그렇기에 아래 기사들은 경쟁이란 미명하 가문에 대한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문제는 그 1번과 2번 기사가 대녀 엘로랭의 유력한 친족들이고, 실상 두 기사로 구성된 철벽 아래에서 나머지가 고군분투를 강요받고 있는 거다.

이런 환경에서 무려 6번 견습 기사의 자리까지 올라온 엘리난도는 어찌 보면 일찍이 기사의 소양은 다 갖춘 인물이란 것.

그는 냉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관 둘을 이끌고 접견실 밖을 나섰다.

“1 부관, 즉시 병사들을 시켜 요새 외곽을 흠뻑 적셔라. 2 부관은 요새 밖 길목에 함정을 설치한다.”

이윽고 밖에 나서기 무섭게 쏟아지는 그의 명령에 두 부관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부관들이 명령 이행을 위해 자리를 뜨기 무섭게,

엘리난도는 조용히 높은 난간에 기댄 채 덜덜 떨리는 두 팔을 부여잡았다.

기사다.

기사이기에 물러섬 없이 싸워야 하는 거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그의 입술은 파르르 떨린다.

“리시론에서 건너온 목재와 난쟁이들이 구운 벽돌로 만들어진 요새다, 어지간한 물리력으론 무너트리기 힘들어.”

진정하기 위해서 마치 주문을 외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엘리난도는 역시 안 되겠는지 직접 발 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려가 부관들에 의해 집결한 병사들을 하나하나 시찰하고 장비들까지 모두 살펴본 후에야,

그는 다시 본인의 방으로 올라와 대기하고 있던 종자의 시중을 받아 갑옷을 입었다.

갑옷의 차갑고 무거운 감각이 전신을 짓누르자,

엘리난도는 다시 상기했다.

진짜 시발 오는구나.

절로 어금니가 꽉 소리 나도록 맞물렸다.

엘리난도, 향년 34세.

어머니, 이 불효자는 먼저 갑니다.

진짜 가기 싫은데.

오만가지 생각이 들면서도 엘리난도는 꾸역꾸역 굳건한 표정을 지은 채 검집에 맞물린 플랑베르주를 들어 한쪽 어깨에 거치했다.

그런 엘리난도의 모습을 지켜보던 종자는 정말 죽음을 불사르겠다는 듯 감격한 표정으로 가죽 갑옷을 걸쳤다.

“끝까지 함께 싸우겠습니다.”

너 왜 그래.

속으로 씹어 삼킨 물음을 뒤로하고 엘리난도는 말없이 종자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직후 속속 부관들이 보고를 위해 찾아왔다.

그들 역시 모두 중무장을 마친 뒤였다.

“외벽을 모두 적셨습니다, 추위가 깃든 리시론의 목재이니 금세 서리가 낄 정도로 바싹 얼 겁니다. 저들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화염 관련 인챈트는 그리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할 테지요.”

“대략 사백 보 정도 되는 거리에 함정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적어도 저들의 발 한쪽, 아니 발가락 하나 정도라 할지라도 제대로 된 진창에 빠지게 될 겁니다.”

담담한 이들의 보고를 들은 엘리난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냥 단지 고개를 끄덕인 것뿐인데,

어째서인지 두 부관은 결연한 눈빛으로 엘리난도에게 화답했다.

두려운 것이다.

그들도 엘리난도 만큼.

부관들도, 종자도, 이곳에 주둔한 병들도.

모두 엘리난도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 두려움을 덜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결연함을 내비치는 엘리난도를 의지하기 시작한 거다.

이 요새를 대표하는 자가 내비치는 각오에 기꺼이 감화된 거다.

물론 엘리난도는,

그딴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이미 정찰병의 보고가 귀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의 머리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초장부터 그런 냉정함을 내비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직업병 때문이었다.

기사라는 직업병.

이내 조용히 책상에 둘러앉아 있던 그들에게, 정찰병 하나가 급히 달려 들어왔다.

“헉… 헉! 수비대장님! 왔습니다…!”

엘리난도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힘을 바짝 주었다.

지릴 것 같은 오줌을 참기 위해 한 행동이었지만,

자리에 있던 부관들과 종자는 그저 그가 임박한 전투를 위헤 전신에 힘을 쏟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적의 수는?”

이어지는 엘리난도의 물음에,

정찰병은 당황에 혀가 녹은 듯 한참을 더듬다가 힘겹게 대답했다.

“그게…, 혼자입니다…,”

* * *

헐레벌떡,

엘리난도는 요새 밖 난간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뒤를 부관과 종자, 그리고 병사 몇이 따랐다.

그렇게 요새 바깥을 살핀 엘리난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려야만 했다.

정말이다.

요새 정문 앞에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전신을 뒤덮은 흑색 갑옷.

밤에 젖은 호수에서 건져 올린 것 같은 무지막지한 난쟁이제 갑옷이다.

저자가 바로 말로만 듣던,

기사 베르융 오르테.

지리겠다.

저 멀리 서 있는데도 여기 있는 모두보다 머리 두 개만큼은 더 큰 것 같다.

엘리난도는 감추고 있던 떨림을 드러내듯 두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그의 뒤를 따르던 자들 역시 베르융에게 시선을 집중한 터라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베르융 경.”

이윽고 엘리난도는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요새 앞 홀로 서 있는 남자에게 외쳤다.

그러자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답한다.

“경의 이름은 무엇이오?”

“엘리난도, 엘리난도라고 합니다.”

소개가 끝나자 기사 베르융은 말에서 내렸다.

단지 말에서 내렸을 뿐인데 요새 위 초병 전원이 볼트를 먹인 석궁을 내밀어 바짝 조준했다.

그래봤자 저 갑주에 흠집 하나 못 내겠지만 말이다.

엘리난도는 좌우를 한 번씩 둘러본 뒤 주먹을 번쩍 들어 초병들을 진정시켰다.

이에 베르융은 엘리난도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양쪽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보였다.

없다.

무기가.

말 그대로 그는 혈혈단신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

왜?

뭐지?

맨몸으로 손수 여기 있는 모두의 모가지를 꺾어 주겠다는 건가?

정말 순수한 의문에 엘리난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곧이어 부관 하나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엘리난도에게 속삭였다.

“수작을 부리는 겁니다, 먼저 선수를 쳐 그를 우리 수중에 두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순간 엘리난도는 속에서 끌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겨우 참아내야만 했다.

그랬다간 정말 다 죽을 거야 미친놈아.

“부관, 그는 기사다. 어찌 기사가 자신을 미끼로 사사로운 전술을 쓰겠는가?”

눈치 챙겨, 부관 새끼야.

를 아주 잘 돌려 말한 엘리난도는 나대는 부관의 가슴팍을 살짝 손으로 밀어 뒤로 물리게 했다.

“그는 적어도 지금 싸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국면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베르융 경, 보여주신 뜻을 잘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차분하게 입을 연 엘리난도에게,

베르융은 투구를 벗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경.”

그렇게 곧바로 아래로 내려가려는 엘리난도를,

부관 둘이 가로막았다.

“대장님…! 그래도 베나즈를 위해 일하는 자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숙고하셔야…!”

“같은 기사로서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다, 그는 내게 예의를 보였고 나는 그에 상응하는 예로 답해야 한다.”

그러나 엘리난도는 그 둘의 말을 가볍게 맞받아치며 빠른 걸음으로 요새 밖을 나섰다.

“보다시피 저도 비무장 상태입니다, 들어오시지요.”

같은 평지에서 마주한 베르융에게,

엘리난도는 양손을 든 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에 베르융은 그의 뒤로 다가갔고, 그에 맞춰 엘리난도는 거리를 유지한 채 요새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집무실까지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베르융은 거리낌 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요새의 전반을 살폈다.

이를 두고 제지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아니, 엄두조차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베르융은 엘리난도와 마주 앉았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연 것은 베르융 쪽이었다.

“정말 잘 갖춰진 요새요, 흐트러짐이라곤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완고하군.”

그는 엘리난도에게 진심 어린 경의를 보내었다.

그 경의에 엘리난도는 화답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린 혼신의 혼신으로 이곳을 수비할 것입니다.”

베르융은 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엘리난도는 조바심을 드러낸 채 물었다.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 물음에 베르융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집무실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는,

“요새의 규모와 부대시설의 배치를 보아하니 주기적인 보급으로 이곳을 유지하는가 보오. 요새 내 기강은 그 주기적 보급 임무를 통해 다잡는 것으로 보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감상을,

동시에 이 요새의 전반적인 흐름의 간파를 내뱉었다.

“베르융 경, 설마 이곳을 염탐하기 위해 기사도를 보험 삼으신 겁니까?”

엘리난도의 물음에 베르융은 되려 상체를 탁상 쪽으로 숙여 보다 주도적인 자세를 잡았다.

이에 압도된 엘리난도는 슬쩍 상체를 뒤로 물려야 했다.

“아니, 나는 경에게 차선책을 제시하는 것이오.”

“무슨…?”

베르융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보면 지금 요새에 충당된 보급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길게 봐도 보름이 채 안 될 것 같은데.”

“해서요?”

“우린 이 요샐 한 달간 포위할 것이오.”

“요새 내 자체적으로도 보급을 충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정말 아끼고 아껴서 두 달까지도 버티겠군?”

베르융의 물음에 엘리난도는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베르융은 이내 팔짱을 낀 채 느긋한 말투로 즉답했다.

“그럼 넉 달로 하지.”

순간,

집무실에 차갑고 무거운 기류가 내려앉았다.

“우린 이곳을 넉 달 동안 포위할 것이오.”

담담하고 솔직하기 짝이 없는,

사형 선고와도 같은 포고.

그런데 그 바탕은 한없이 인자한 표정이다.

그 상반된 차이에서 오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이 모두를 집어 삼켜버렸다.

이게 참 묘하다.

분명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냉정하기 짝이 없는 포고지만,

짓고 있는 인자한 표정에선 또 다른 타협점이 보였으니까.

그리고 엘리난도가 그 인자한 부분에 대해 기대하기 시작한 찰나.

“엘리난도 경, 기사로서 그대의 전부이자 전신인 부하들을 살리시오. 저 병들이야말로 그대에게 있어 진정한 요새가 아니오?”

귀신같이 눈치를 챈 베르융이 꿀 바른 당근을 내민다.

이거 먹어,

하고 친절하게 당근을 흔들며 내놓는 베르융의 그 말을…,

놓칠 엘리난도가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