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15화 (315/365)

315화. 조소

굽이진 성채 갈로샤.

깎아 만든 산 중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 성채는 붙여진 이름에 걸맞게 오목하게 굽어진 성벽을 갖고 있다.

언뜻 보면 산중에 난데없이 마주친 절벽처럼 그 위압감이 대단한 성벽 위쪽엔,

한 남자가 초라하고 작은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잿빛 리넨 셔츠, 테 없는 커다란 안경.

그러한 안경알 양옆으로 뾰족하게 솟은 귀.

그런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작고 화려한 지휘봉.

이 귀 큰 자의 이름은 글랙스.

갈로샤의 책사이자 영주 대니의 사위이며,

마이스터 ‘말른’의 제자이다.

그는 신중한 표정으로 날카로운 눈매 속 박혀 있는 감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아래 펼쳐진 숲을 살폈다.

그러다가 목에 매달고 있던 삼단 망원경을 펼쳐 어느 한 곳을 주시한 그는,

“초입 사시나무들이 떨기 시작한 걸 보니 적들이 막 우리의 숲에 발을 들였구나.”

담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를 수행하던 기사가 다가와 묻는다.

“그럼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그는 라브리엘.

갈로샤 최고의 기사.

그의 물음에 글랙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숲이 저들을 완전히 흡입했을 때를 기다려야 해.”

“하지만 공, 적의 선봉장은 테티르 론바즈입니다. 본능만으로는 이 땅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글랙스는 망원경을 눈에서 떼며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잘 아네.”

그러나 글랙스는 다시 태연한 표정으로 망원경을 눈에 가져다 댄 채 말을 이었다.

“해서 지켜봐야지, 저 부대가 테티르 경의 본능적 재능을 모두 대변할 수 있을 만큼 숙련되어 있는지 말이야.”

아까의 경직된 표정은 어디 가고,

자신만만한 눈빛을 반짝이던 그가 저 멀리 흔들리는 숲 일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기사 테티르는 한껏 치켜뜬 눈을 이리저리 부라리며 예민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내 그는 주먹 쥔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뒤따르는 천에 가까운 군사를 정지시켰다.

그러자 곧 행렬 중간 쪽에서부터 말을 타고 달려온 부관 가르웨가 테티르에게 물었다.

“경.”

“가르웨, 꽤 지랄 맞은 숲이구나.”

다가온 가르웨에게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테티르.

그 말을 듣고 눈 앞에 펼쳐진 숲길을 살피던 가르웨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딱 보아도 갈로샤의 책사가 맘껏 버무려 놓은 것 같군요. 지금부터는 선 개척 후 진행 방식으로 숲을 통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가르웨의 의견에 테티르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되면 1군단에 뒤처지게 된다.”

“1군단과 속도를 맞춰 전개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만큼 위험이 따르게 될 겁니다.”

테티르는 곧바로 고삐를 고쳐 잡았다.

“가르웨, 바로 숲을 돌파한다.”

이에 가르웨는 담담한 표정으로,

퉁퉁!

건틀릿을 낀 손으로 흉갑을 두들기며 명을 받들었다.

직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베나즈의 2군단.

그들의 행군 속도는,

전보다 오히려 더 빨라진 모습이다.

* * *

본격적인 2차 원정이 시작되기 직전,

늦은 밤.

티히트라 외곽의 어느 이름 모를 술집.

한참 전에 발길이 끊긴 듯,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그곳에 곧 웬 남자 하나가 말을 탄 채 나타났다.

그는 곧장 술집 안으로 들어섰고,

그렇게 낡고 허름한 술집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이가 그를 반겼다.

“이쪽으로.”

벌써 몇 잔 마신 듯, 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 앞엔 빈 술잔들이 놓여 있었다.

막 술집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그의 부름에 성큼성큼 다가가 마주 앉은 뒤,

쓰고 있던 잿빛 후드를 벗었다.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테티르 경.”

후드 속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테티르 론바즈였다.

맞은편 남자의 인사에 테티르는 탁상 위 굴러다니는 빈 잔을 하나 집어 직접 술을 따른 뒤,

“재상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어딨겠소.”

허공에 건배를 던지며 화답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부리부리한 두 눈 속, 꿈틀거리는 야망을 드러내며 묻는 테티르에게 기지어는 자신의 빈 잔을 불쑥 내밀었다.

“무슨 이유일 것 같습니까?”

되려 묻는 기지어에게,

테티르는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없이 그가 내민 술잔을 손수 채워주었다.

“내 재상의 부름을 흔쾌히 응한 이유와 일맥상통하겠지요.”

직후 이어지는 테티르의 말에 기지어는 식은 미소를 지으며 가득 채워진 잔을 재차 테티르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테티르는 망설임 없이 기지어가 내민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쳤다.

짤그랑.

작은 술집을 가득 채우는 건배 소리.

그리고 마주 앉은 두 남자는 말 없이 가득 채워진 술잔을 비운다.

그것으로 벌써 한 마디씩을 나눴는지, 그들의 대화는 곧장 본궤도에 올라와 있었다.

“테티르 경.”

“말씀하시오.”

“내 검이 되어 주십시오.”

거침없이 드러낸 속내.

그런 기지어의 포부가 마음에 쏙 들었던 테티르는 역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자루를 쥐게 된다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휘두를 생각이오?”

이어지는 테티르의 반문에 기지어가 조용히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럼 테티르는 자신의 빈 술잔을 들어 내밀었다.

쪼르륵.

유리잔에 채워지는 어두운 갈색.

이어서 테티르가 술병을 이어받아 기지어의 빈 잔을 채운다.

“꼭 휘둘러야 할 필욘 없지.”

그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기지어는 술잔을 들이켰다.

이에 테티르는 아주 활짝 웃는 얼굴로 화답하며,

“무기란 때론 과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니까.”

술잔을 기울였다.

“맞소, 그래서 나는 휘두르지 않고 그저 과시할 것이오.”

“누구에게?”

“모두에게.”

“모두?”

기지어는 날카로운 눈으로 테티르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기업가들의 의회와 대척점에 있는 군 세력에게.”

그 말을 여러 번 곱씹던 테티르는 끝내 입안에서 씁쓸한 맛을 느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과시의 나쁜 점은 모두에게 노출된다는 것이지. 과시할 대상이 아닌 쪽에게까지도.”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노출로 인해 적과 아군 각각에 확실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그건 과시의 좋은 점이지요.”

“해서, 앞서 말한 그들 모두를 적대하겠단 것이오? 과시로써?”

말을 끝마친 테티르는 금방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기지어가 방금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경이라는 검을 쥐고 적이 될 자들과 아군이 될 자들을 구분할 생각입니다. 그 판가름은 곧 대업의 견고함을 지탱해 줄 청사진이 되겠지요.”

“너무 이상적이오, 재상. 서로 솔직해집시다. 결과적으로 베르융 쪽과 수평적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의표를 찌르는 테티르의 말에 기지어는 저도 모르게 두 어깨를 파르르 떨어야 했다.

“과연…, 테티르 경입니다. 사람 꿰뚫는 본능이 무서울 정도로군요.”

이제 테티르는 스스로 술잔을 채웠다.

“수평을 이루기 위한, 그런 천칭의 중심이 되어달라라…,”

이윽고 그는 사내대장부다운 호쾌함을 과감히 드러내며 술잔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하지, 하겠소. 그대의 검이 되겠단 말이오.”

그러나 테티르는 금세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술잔으로 기지어를 찌르듯 내밀었다.

“그런데 재상, 명심하시오. 기사의 검은 양날이란 걸.”

테티르는 마치 맹수의 것과 같은 위압감을 내비쳤지만,

“글쎄, 검집에서 뽑지 않는 이상 그게 뭣이 중요하겠소?”

기지어는 되려 식은 웃음으로 여유롭게 맞받아쳤다.

이렇게 그들의 비밀스러운 회동은 끝이 났다.

* * *

숲은 외부인을 향한 노골적인 적대로 가득 차 있었다.

의도적으로 돋아난 가시덤불,

향만 맡아도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꽃들.

뿌리가 헤쳐놓아 꺼져버린 땅바닥과 까칠한 군화를 가차 없이 밀어내는 이끼들.

덕분에 테티르가 이끄는 2군단의 행렬은 벌써 곳곳에서 사고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푹 꺼진 땅에 발을 잘 못 디뎌 우르르 넘어진 수십 장정, 독성을 띤 가시에 찔리고 스친 병사들.

이유 모를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한 말만 다섯 마리.

가르웨는 즉시 부상자들을 후방 보급대에 합류시키기 위해 말을 몰아 뒤쪽으로 빠져야 했다.

선봉에 선 테티르는 행렬에 일어난 일들을 모두 꿰고 있었지만, 결코 속도를 줄이지는 않았다.

분명 가진 인챈트를 휘둘러 능히 전방 숲의 노골적인 적대를 물리칠 수도 있었을 텐데도,

테티르는 메이스를 뽑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의 부관들인 가르렝과 요함비크 역시 가진 인챈트를 휘두르긴커녕 병사들을 독려해 행군 속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겉으론 모두가 담담히 숲을 통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들 모두는 초조함에 서서히 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발휘하는 속도는 유일하게 일정한 것이었기에.

벌써 도달하고야 말았다.

숲의 절반 지점을.

그리고 그 절반을 넘어선 곳에서 마주한 것은 드넓은 버섯 군락이었다.

그제야,

테티르는 조용히 안장 집에 담겨 있던 메이스를 뽑아 들었다.

그의 그 모습을 지켜본 부관들은 즉시 기수와 함께 행렬 전반을 아우르며,

“공격 준비! 공격 준비!”

성대로 졸여낸 벼락을 내뱉으며 군단 전체를 하나의 의지로 결속시켰다.

이런 테티르의 기민함에 반응하듯,

이내 버섯은 검은 연기와 같은 포자를 토해냈고.

일대는 순식간에 어둠으로 젖어 들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으로부터,

코를 찌르는 악취와 함께 나타난 것들.

끼이이익 ─── !

‘갈리키’

이곳이 귀 큰 자의 숲이란 걸 증명하는 그것들은 기생 포자로 움직이는 사체들이자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 괴물.

또 생태계 일부를 떼어내 만든 방범이자, 파수병.

그것들이 일제히 테티르의 2군단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 * *

글랙스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지금 슬쩍 초조해진 상태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테티르 론바즈는 숲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으니까.

발이 묶이긴커녕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숲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벌써,

벌써 숲의 절반을 통과해버리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저들의 행렬은 숲 초입에서부터 지지부진의 늪에 빠졌어야 했다.

이 숲은 개척 후 진행하려는 자들을 막기 위해 최적화되어 있다.

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손실이 누적되는 양상을 유발하지.

그런데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손실을 상정한 속도전으로 과감히 숲을 가로질러버린 것이다.

정말 오감을 넘어선, 본능이란 이름의 육감이 기관으로서 존재라도 한다는 것인가?

글랙스는 인정해야만 했다.

과연 전설이라 불릴만한 기사라고.

테티르 론바즈.

곧이어 말 위에 올라탄 글랙스는 금세 차분함을 되찾았다.

비록 적들의 손실이 예상한 만큼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이 이후에 준비한 것들은 아직 많다.

그러니까 진짜 전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작게 중얼거린 글랙스는 곧 지휘봉을 좌우로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뒤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져 숲으로 대거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숲은,

글랙스에겐 하나의 정형화된 판에 가까울 정도로 익숙한 무대.

그 말인즉.

판 위의 놓인 수가 어떻든 아래서 내려다보고 헤아릴 수 있다는 소리.

적은 볼 수 없는 그 판 위에서,

글랙스의 다음 수가 막 착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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