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16화 (316/365)

316화. 조소 (2)

발리르의 3기사 중 한 명,

요함버크 비조스.

그가 뒤쪽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외친다.

“대기…!”

그 말에 병사들은 꼬나 쥔 파이크를 고쳐 잡으며 긴장과 두려움을 곱씹었고,

이내 그것들을 소화 시켜 만들어낸 결의로 표정을 굳혔다.

“대기…!”

재차 이어지는 요함버크의 목소리,

그리고 더욱 다듬어지기 시작한 진형.

그에 맞춰,

두두 ─── !

너머 전방으로부터 쏟아져 오는 적들.

그것들은 잿빛으로 물든 사체 더미이자, 온전하지 못한 모습으로 온전한 것들을 사냥하는 사냥꾼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의 괴악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마주 선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었을지언정 꿋꿋이 선봉에 선 요함버크에게 온 집중을 쏟았다.

이윽고 요함버크가 하늘을 찌르듯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직후,

“1열 내려!”

번쩍 든 팔을 내림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를 기점 삼아 갖춘 진형으로부터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는 무수한 창대.

일련의 제식이 어찌나 칼 같은지,

착 ─ !

창병들의 움직임은 마치 한 덩어리가 행한 것처럼 군더더기 없었다.

그렇게 갈리키는 삽시간에 구축된 방어진형에 정면으로 크게 맞부딪쳤다.

파박 ───── !

사방에서 난무하는 굉음.

그에 맞춰 여기저기 튀기는 짐승 사체의 파편들.

갈리키 무리 일선이 뾰족한 파이크에 벌집이 되었지만, 그것들은 쏟아짐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슬슬 병사들 사이에서 버거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갈리키 무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진형 자체가 슬슬 뒤로 몰려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이를 악문 채 그저 버틸 뿐이다.

곧,

다음 국면이 제시될 테니까.

이런 병사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창대 사이를 가로질러 나아가 직접 갈리키를 처리하고 있던 요함버크가 뒤돌아 병사들에게 외쳤다.

“2열 받아, 3열 내려!”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2열에 선 병사들이 파이크를 쥔 1열 병사에게 밀착해 지지대 역할을 해주었다.

하여 순간적으로 힘이 실린 1열이 물러진 진형의 모양을 회복하며 나아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3열 병사들의 긴 파이크가 덧대어지듯 사이사이에서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급격하게 힘이 실린 수비 측 진형에 의해 무게를 싣고 있던 갈리키 무리는 되려 힘을 잃고 뒤로 밀려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

요함버크가 비장한 목소리로 외치며 나아간다.

“밀어!”

병사들은 그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가! 가! 가!”

“이야아악!”

“씨발, 다 밀어! 밀어!”

누구는 구령을, 또 누구는 악에 받친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여러 겹으로 쏟아지는 파도처럼.

잔잔히 전개되기 시작한 진형에 자아도, 감각도 없는 갈리키 무리는 그저 파도에 따라 끌려다니는 모래알처럼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 * *

행렬 좌측, 요함버크가 전개한 수비진형이 갈리키 무리를 쳐내고 있을 무렵.

행렬 우측,

발리르의 3기사 중 한 명인 가르렝은 쏟아지는 갈리키에 방패 병들을 내세운 난타전으로 응수했다.

움직이는 시체라곤 하지만,

그 본체는 결국 사냥당하거나 사냥 중에 죽은 짐승에 불과하다.

맹목에 빠진 사념만큼 마음껏 두들겨 팰 수 있는 게 또 무엇이 있겠는가?

가르렝과 그를 따르는 병사들은 투기 무대에 나선 자들처럼 유려하면서도 투박한 움직임을 거듭해 나아가며,

마주 오는 갈리키를 베고 밀치고 걷어차 버렸다.

이들의 무장은 베나즈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검은 망토와 공작의 깃을 단 투구.

사슬 갑옷과 강철 각반, 손목 보호대.

그리고 원형 방패와 짧은 팔카타로 통일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기사 가르렝 멜리즈의 휘하에 편제된 특수병,

‘투사대’

서쪽 땅에서 수입해 온 검술과 방패술로 무장한 그들은 군단장 베르융에 의해 창단된 베나즈 가문의 특수 부대 중 하나다.

방패로 상대를 내쳐 전신을 부러트리고,

짧은 만큼 확실한 휘두름을 그리는 팔카타는 적의 관절을 양단한다.

비록 상대가 시체라고 한들,

그들이 쏟아내는 맹위는 후방에 있는 일반병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투사대를 위시해 일방적인 퇴치가 거듭되고 있을 무렵.

쿵 ─ !

저 멀리서 굉음 하나가 터져 나왔다.

직후 거대한 땅 울림과 함께 나타난 것은,

짐승이 아니다.

반쯤 백골화 된 거대한 괴물.

일반적인 갈리키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개체.

가르렝은 그런 거대한 괴물에 그저 묵묵히 나아가 마주 섰다.

주위서 상황을 정리한 투사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 가르렝의 좌우로 도열했고,

그렇게 곧바로 거대한 괴물을 사냥하기 위한 움직임에 돌입했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좌우로 산개한 투사대.

그리고 홀로 가운데 남아서 앞으로 달려나가는 가르렝.

이윽고 양옆으로 갈라진 투사대는 괴물을 에워싸자마자 벨트에 매어져 있던 나무 수통을 방패에 내리쳐 적신 뒤 그대로 괴물을 향해 방패를 내세웠다.

동시에,

괴물의 시선을 빼앗은 가르렝이 아밍 소드를 번쩍 들어 올리려는 찰나.

후욱 ─ !

엄청난 속도로 휘둘려진 괴물의 팔이 그대로 가르렝을 휩쓸었다.

아니,

가르렝은 괴물의 팔 아래로 보기 좋게 미끄러져 피했다.

곧이어 가르렝은 바닥 위를 미끄러지는 와중에 고쳐 잡은 아밍소드로 괴물을 가리켰다.

그러자 순간 아밍소드로부터 뿜어져 나온 푸른 빛.

그것은…,

[67년, 알레이솔]

[한기에 못 이겨 내민 물의 가시]

과거 참사의 주역이 되었던 겨울의 뾰족한 재해.

그 힘이 발현되기 무섭게 괴물 좌우 투사대가 내민 젖은 방패로부터,

팍 ─ !

뛰쳐나가듯 맺힌 거대한 고드름.

수십 개의 빙창은 그대로 괴물의 전신을 꿰뚫었다.

그렇게 거대한 괴물은 힘없이 쓰러졌고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대충 상황이 소강에 빠져들었다.

그리 생각한 가르렝은 그제야 아직 푸른 기운이 가시지 않은 아밍소드를 검집에 집어넣고서 투사대를 집결시켰다.

근데.

이윽고 근방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소리는 결코 갈리키가 아니었다.

두 두 두 ───

기마대?

하지만 말의 발굽이라기엔 좀 더 경쾌하고 가볍다.

뒤늦게 가르렝과 투사대가 경계태세를 갖췄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한 무리의 ‘사슴’

그 위에는 기사와 병사들이 타고 있다.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정확히 투사대를 저격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고,

그렇게 그들은 사슴의 뿔에 묶여 있는 시위에 활을 걸쳐 당겼다.

파바박 ─── !

이 무슨 무식한 위력이란 말인가!

사슴 한 마리 한 마리마다 뛰쳐나온 거대한 화살은 공성에서나 마주칠 법한 발리스타급의 파괴력을 자랑했다.

거대한 활은 그대로 몇몇 투사대와 그 후방의 병사들을 관통했고,

진형 일부가 붕괴할 정도로 병사들 사이에 커다란 혼란이 깃들었다.

가르렝은 직격으로부터 몸을 겨우 피했지만,

거대한 화살이 땅에 박힌 충격파로 인해 몇 바퀴나 바닥을 굴렀고 해서 이명이 가득한 상태로 허겁지겁 주위를 살펴야 했다.

직격당한 투사대 셋이 절명했다.

뒤로 일반병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뒤늦게 가르렝은 적들의 위치를 살폈지만,

이미 사슴 무리는 스치듯 사라진 후였다.

* * *

“두 번째 갈리키 무리를 보내라.”

갈로샤의 책사 글랙스는 지휘봉을 앞으로 내세운 채 담담히 말했다.

상황 자체는 그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만 의외인 것은 베나즈의 원정군들이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

예상보다 훨씬 많은 갈리키 무리가 1차전에서 소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에게서 인챈트를 유도하지 못해 몇 없는 강한 개체까지 써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서 인챈트를 유도해내는 데에 성공했고,

갈로샤의 특수 부대로 유도지점을 정확히 저격했다.

그 저격에 인챈트를 가진 기사가 요격되었다면 정말 다행이겠지만,

요격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것만으로도 저들의 진행을 더디게 하는 데엔 충분했으니까.

인챈트를 가진 기사의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다.

비단 전략적 가치의 손실뿐만이 아니다.

병사들에게 인챈트를 가진 기사는 곧,

전쟁터에서 가질 수 있는 몇 없는 확신.

이 말은 즉 해당 기사의 죽음은 병사들에게서 그 확신을 죽이는 일이기도 하다.

하여 지금 일어난 1차 저격은 베나즈 군에게 보내는 갈로샤의 경고다.

커다란 손실이 일어날 수도,

아니 일어날 것이다, 라는 경고.

이 이상 갈로샤에 다가가려 한다면.

이러한 경고에 그들이 부담을 느껴 한시적으로나마 퇴각을 결정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유의미하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글랙스는 조용히 고삐를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오늘 하루 만에 6년 동안 쌓아왔던 숲의 방어적 생태가 모두 바닥나겠군…,”

그러자 갈로샤 최고의 기사 라브리엘이 위로하듯 대답했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방어에 성공했다면 6년이란 시간은 결코 아까운 것이 아니지요.”

이에 글랙스는 작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그는 다시 신중한 얼굴로 돌아와 재빨리 고삐를 잡아당겼다.

“계속해서 적의 병력을 깎아야 하니 움직이세. 우리를 찾기 위해 저들도 움직일 테니.”

말머리를 돌려 숲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그의 뒤로,

라브리엘이 바짝 뒤쫓았다.

그런 그의 안장 집에 매달려 있는 긴 워해머 한 자루.

그것에 깃들어 있는 재해는,

[29년, 니히리벤]

[당신으로부터 숨죽인 세상]

한때 과거에 범람했었던 무시무시한 무풍 현상.

이러한 재해를 품은 라브리엘은 글랙스가 펼치는 기만적인 술책의 핵심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위치를 바꿔가며 숲에 들어온 적의 살점을 조금씩 잘라내는 기만은,

필시 술책을 펼치는 책사를 찾기 위한 적들의 행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추적을 위해 적들은 가진 모든 수단을 이용하길 주저하지 않을 것이고,

그 수단 가운데에는 필시 인챈트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라브리엘은 그러한 인챈트를 감지해내는 데에 누구보다 탁월한 자다.

그가 펼친 무풍지대는 일개 두 발 걷는 자의 감각을 넘어선 초월적인 범위 예지에 가까웠으니까.

마음껏 기만을 펼침과 동시에,

인챈트를 가진 적은 감히 쫓아올 수 없다.

이러한 능력적 논점을 바탕으로 내뿜는 글랙스의 주도적이고 과감한 술책은.

지금까지,

깨진 적이 없다.

* * *

들이닥쳐 오는 갈리키에 대비해 전략 전술을 펼친다.

그러나 결국 상대는 포자 따위로 일어난 시체.

싸움은 곧 병사들의 일방적인 피로 축적으로 이어진다.

해서 무의미한 적들의 물량을 확실하고 손쉽게 줄이기 위해 인챈트의 힘을 사용하기라도 하면.

저격대가 나타나 귀신같이 저격한 뒤 사라진다.

숲이라는 무대 장치를 이용한 극도의 기만전술.

귀 큰 책사만이 해낼 수 있는 이 이질적인 전술은 확실히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테티르 론바즈는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의 병사들이 무의미한 싸움에 점점 말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음에도,

그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곧 이 기만전술을 벌이는 책사 놈의 머리통을 부수게 될 테니까.

적이 세운 미지의 판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진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볼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상대가 놓는 수다.

그 놓는 수들의 모양을 복기한다면,

판이 보이지 않아도 나아갈 길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테티르는,

그러한 길을 능히 발견해낼 정도로 야생에 가까운 본능을 가진 자.

이윽고 테티르가 이마에 굵직한 핏대 여럿을 세운 채 한참 동안 열지 않던 입을 열었다.

“움직인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최 정예병이자 30기의 기마대는 아주 은밀하고 조용히,

테티르의 뒤를 따라 깊은 숲길을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