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조소 (3)
부패 된 발톱, 이빨 그리고 드러난 뼈.
갈리키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치명적이다.
이미 한창 부패 된 시체였기에 공격의 유효는 곧 필연적 감염으로 이어진다.
그런 갈리키 무리의 쏟아지는 공격을,
요함비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둥근 항아리 모양의 갑옷은 보기에 둔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그 갑옷만이 도달할 수 있는 곡률에 기인한 방어력은.
가히 움직이는 성벽에 필적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요함비크는 정면에서 쏟아지는 갈리키 무리의 공격을 모조리 빗겨냈다.
그렇게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빠르게 가르렝 쪽으로 다가간 그가 마주 오던 갈리키 두 개체의 머리를 연달아 박살 냈다.
“괜찮나, 가르렝?!”
이에 갈리키 무리와 뒤섞여 난타전을 이어가던 가르렝이 요함비크와 등을 맞댄 채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보다시피, 아주 안 괜찮네.”
“방진 안으로 들어오게, 적의 저격대를 확인한 이상 진형 외적인 행동은 불필요한 소모만을 일으킬 걸세.”
쓴 투구를 끄덕이던 가르렝은 이내 투구의 안면 가리개를 들어 올려 못마땅한 표정을 드러냈다.
“적의 의도대로 휘둘려야 된다는 게 맘에 들지가 않군.”
“상대는 오히려 우리가 진형을 파하고 갈리키와 적극적으로 교전하는 것을 노리고 있을 거야.”
통통한 투구의 눈구멍 속 요함비크의 두 눈이 반짝였다.
“애초에 이곳은 그들의 무대야, 우리가 주도를 가져가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어. 그렇다면 최소한 저들의 주도에 우리가 호응하지 않는 쪽으로 움직여야겠지. 아주 철저하게!”
한 차례 저격을 받은 터라 경황이 없었던 가르렝은,
요함비크의 따끔한 조언을 듣고 차분함을 되찾았다.
“투사대! 본대 뒤쪽으로 이동하라!”
그렇게 가르렝의 지시와 함께 투사대는 후방에 갖춰진 방어진형 속에 자연스레 흡수됐다.
이윽고 진형 안으로 들어온 가르렝이 한숨을 내쉬며 토로하듯 중얼거렸다.
“젠장, 실제로 본 건 처음이야.”
이에 요함비크 역시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베리아에 귀 큰 자들이 유입된 건 알고 있었는데, 그들의 전통적인 병과까지 나올 줄은 나도 몰랐어.”
가르렝은 펼쳐진 방어진형 너머,
저격에 직격당해 죽은 투사대원들 쪽을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끝내 정신을 환기하려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사슴뿔을 활대로 써먹는 저것들을 뭐라고 불렀더라?”
“커버크, 커버크였을 걸세.”
“그래, 그렇게 불렀었던 것 같군. 젠장…, 돌돌 만 거인 힘줄로 쏜 발리스타인 줄 알았어.”
곧이어 진형 전방으로 나아가 전투에 돌입하려던 가르렝을,
요함비크가 어깨를 잡고 막아섰다.
“자네, 정말 괜찮은 건가?”
“괜찮아, 다시 싸울 수 있어…, 아!”
순간 가르렝의 멍한 눈빛에 선명한 초점이 잡혔다.
“테티르 경께서는 어디로 가셨지?”
그 물음에 요함비크는 뒤쪽 숲을 넌지시 바라보며 작게 대답했다.
“만들러 가셨지, 주도를…,”
그의 시선을 쭉 따라가던 가르렝은 앞서 자신에게 했던 말과 정 반대말을 내뱉는 요함비크에게,
군말 없이 순응한 듯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올렸던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적의 주도 안에서 자신의 주도를 만들어내는 것.
테티르 론바즈는 그런 허무맹랑한 일을 능히 해낼 수 있을 만한 존재였으니까.
* * *
커버크는 귀쟁이들이 쓰는 병종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만큼 고급 병종이다.
대형 수사슴, 그것도 귀 큰 자들의 숲에서만 서식하는 붉은 사슴으로만 완성 시킬 수 있는 병종.
다 자란 뿔을 활대 삼아 쏘아내는 활은 양품에 해당하는 기사 갑옷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뚫는다.
이렇게만 말하면 그야말로 무적의 병종처럼 보이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그중 가장 약점으로 꼽히는 것은 단연,
짧은 운용 시간.
고기동을 확보한 상태에서 발리스타 급 위력의 화살을 쏠 수 있는 대신,
사슴에게 가해지는 부하 역시 상당하다.
오죽하면 숲 병종과 관련된 어느 책에서는 커버크에 운용되는 사슴 절반은 작전 과정에서 목이 부러져 죽는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그런 한시적 운용이 바탕인 병종을 동원했다는 건.
그만큼 뚜렷한 의도가 있다는 뜻.
그리고 그 의도는 당연히,
기사를 죽이는 것일 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챈트를 휘두르는 기사를 저격해 죽이는 것이 저 부대의 목적이겠지.
숲, 갈리키를 이용한 진형 압박.
그 압박을 통해 적들의 진형 변형을 유도.
그렇게 적극적인 진형으로 변형되면서 따라오게 될 기사들의 위력적 전개.
이 전개는 곧 기사라는 명확한 목표가 본대와 동떨어져 있을 거란 소리고,
이는 곧 커버크의 저격으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아이베리아에 사는 귀쟁이놈이 쓸 법한 전술이다.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군.
아이베리아의 전투 양상을 아주 잘 알고 있고, 그 위에 자신의 태생적 지식을 잘 버무려놨어.
그렇기에,
한시라도 빨리 놈의 머리통을 부서야 한다.
메이스를 쥐고 있던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하면 메이스 안에 잠들어 있던 재해가 눈을 뜬다.
[22년, 훌리가트]
[열 개 산을 정형한 바람]
이것은 아이베리아에 나, 테티르 론바즈를 새겨준 바람.
바탕으로서 내게 기사라는 근본을 만들어준 바람.
그리고 지금,
이 바람이 역사했었던 당시의 기억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떠올릴 것이다.
하나는 일전에 베르융과의 대결에서 썼었지만.
지금 떠올리려는 기억은 그것만큼 거친 종류가 아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쥐고 있던 메이스를 통해 내 전신에 수많은 바람 뭉치가 들어찼다.
언제인지 모를, 그러나 과거라 확신하는 거대한 산맥의 풍경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 산맥을 개 머리 쓰다듬듯 흘기는 바람의 윤곽이 보인다.
아,
나는 이제 내 기억 속 바람이 되었다.
산맥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바람은 훗날 몰아닥칠 재해의 전조.
이러한 바람의 이름은,
훌리가트.
[재현]
[산맥을 탐닉한 바람]
떠올린 기억을 토대로,
나와 쥔 메이스를 기점 삼아 거나한 바람이 사방에 퍼진다.
그리고 그 퍼진 바람의 범위에 맞물리듯.
내 감각이 확장된다.
온종일 숲의 동향을 살피는 다람쥐처럼 예민하면서도,
늘 숲을 발아래 두며 포식의 기회를 엿보는 매처럼 기민한.
이윽고,
“놈…!”
내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찾았다,
내 기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놈들을.
본능적으로 말머리를 돌려 빼곡한 숲 사이를 비집고 달려갔다.
내 뒤를 따르던 최정예 기병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바짝 쫓았다.
* * *
“무슨…?!”
아무리 무감각한 자라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밀도 높은 기류가 급작스레 주위를 가득 채웠다.
이러한 주위의 변화에 글랙스는 빠르게 이동하던 것을 멈추고 바삐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동한 시선은 바로 옆, 나란히 이동하던 기사 라브리엘을 끝으로 멈췄다.
글랙스는 이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라브리엘의 표정이 범상치 않았으니까.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아랫입술을 살짝 떤 라브리엘은 잠시 후 입을 열어 메마른 목소리를 내었다.
“테티르, 필시 그일 겁니다.”
글랙스는 초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상황이 꽤 급박하군, 아니…, 절망적이라고 해야 하는가?”
라브리엘은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에 걸쳐 이 숲에 박제시켜놓았던 기류가, 방금 일순간에 다 어그러졌습니다.”
“과연…, 과거 칠기사라 불렸던 자인가.”
짧은 감상을 마친 글랙스는 다시금 고삐를 고쳐잡았다.
“지금부터는 생과 사가 실시간으로 오가는 수 싸움을 해야겠군. 각오가 되었는가, 경?”
기사만큼이나 담담함을 내비친 글랙스의 말에,
라브리엘은 묵묵히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숙였다.
“기류가 상대에게 넘어갔으니, 역으로 그 기류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겠네.”
직후 치달기 시작한 글랙스와 라브리엘, 그리고 휘하 정예병 무리.
글랙스는 손가락으로 사방을 찌르며 막힘없이 지시를 이어갔다.
“지금부터 모든 지시 할당은 전서구로 한다, 정찰병은 즉시 모든 새를 풀어 숲 전역 사방의 모든 척후병에게 연락을 넣어라!”
그의 지시에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는 몇몇 병사들.
“가용 가능한 갈리키 무리를 모두 적 본대에 쏟는다, 테티르가 없는 이 기회에 피해를 최대한 누적시켜야 해. 대기 중인 커버크 소대 역시 저격이 아닌 무차별 사격으로 작전 노선을 변경한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의 지시에 숲 곳곳에서 새들이 교차하며 바삐 날아가기 시작하고,
그 아래 병들 역시 사방으로 비산하듯 흩어졌다.
그의 옆에 바짝 붙은 라브리엘은 걱정을 아끼지 않고 쏟았다.
“성으로 돌아가시지요, 수성을 준비하는 게 나아 보입니다.”
“그럼 그 즉시 테티르 론바즈는 본대에 합류하겠지, 차라리 이 상태로 계속해서 그들 본대를 소모시키는 것이 나아.”
“그렇게 되면 그만큼 공께서 위험에 노출되십니다!”
“이미 우리 모두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난 귀 큰 자이지만 아이베리아를 디딘 두 발 걷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이야.”
“그 말인즉, 숲의 수비 자원을 끌어 적 본대에 쏟는 동안 숲에 나가 있는 모든 병력을 성으로 귀환시킨다는 말씀입니까? 공께서 테티르의 미끼가 되는 동안?!”
“자신 없는가, 경? 여긴 우리 무대네.”
라브리엘은 턱이 갈라지도록 이를 씹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쓸 수 있는 모든 인챈트의 역량을 다 써서라도 이 작전을 성공시킬 것입니다.”
“좋네, 가지.”
이제 그들은 당당함을 가득 안고 더욱 빠르게 숲을 가로질렀다.
라브리엘은 치고 올라오는 숲의 기류를 지나가는 족족 무풍으로 박제시켰고,
그를 통해 얻어낸 테티르의 대략적 위치를 보고받은 글랙스는 몇 수 앞에 해당하는 동선으로 움직였다.
꽤,
아니.
그들은 잘 해내고 있었다.
재해의 기억을 내비친 테티르를 상대로, 글랙스의 지식과 라브리엘이 만들어내는 무풍은 상당히 선전 중이었다.
그리고 그 선전 가운데 둘은 이러한 생각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테티르는 결코 우리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일단,
이곳은 숲이다.
본인들이 제일 잘 아는 무대인 것이다.
거기다 테티르가 숲 전반에 쏟아낸 기류는 사방에 명령을 하달한 글랙스에 의해 여기저기 어지럽혀진 상태다.
그러니까 테티르의 입장에선 온 감각이 어지러워질 정도로 많은 불상의 목표가 숲 전체에 어지럽혀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좋다.
이대로만 가면,
그 테티르 론바즈를 상대로 성공적인 유린이 될 거야.
처음으로,
라브리엘의 입가에 미소가 얹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내 이름은 ─── ! 테티르 론바즈 ──── !”
불쑥,
쏜 살처럼 옆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그림자.
입에서 벼락을 쏟으며 기세 좋게 달려든 그 그림자는 뭐라 할 새도 없는 찰나의 시간,
글랙스를 스쳐 지나갔다.
뻐억 ───── !
끔찍한 타격음과 함께.
“아…!”
뒤늦게 라브리엘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엔 이미 안장으로부터 튕겨 나와 바닥을 나뒹구는 글랙스의 모습이 맺혀 있었다.
테티르는,
수 싸움을 통해 곳곳의 무풍과 사방의 거슬림 속에서 그들을 찾아낸 것이 아니었다.
그저 펼친 기류를 통해 느낌이 가는 대로.
그 본능이란 것으로 찾아낸 것이었다.
“아….”
라브리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식이 세어 나왔다.
글랙스는 단말마도 남기지 못한 채,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이미 머리는 붉은 웅덩이에 반쯤 빠져 있었다.
의식을 앞선 적의,
반사적으로 라브리엘은 검을 뽑아 테티르를 겨누었다.
“이놈…! 불경한 이름을 단 침략자 놈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 겨우 욕지거리를 솎아내 내뱉은 라브리엘의 일갈에.
테티르는 피 묻은 메이스를 털며 가당치도 않다는 듯 읊조렸다.
“네놈의 후원자에게 가서 물어라, 침략의 서순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영주가 아닌,
후원자라는 멸칭으로 비아냥거린 테티르는 라브리엘로부터 말머리를 돌렸다.
“뒤를…, 보이는 것이냐! 이 내게!”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네가 기사인 것을.”
테티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기사이기에 뒤를 치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을 알고 하는 소리이자,
동시에 뒤돌아서 서 줌으로써 목숨을 살려줬다는 모욕적인 말로써.
그러나 이런 말을 듣고서도 라브리엘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라브리엘에게,
테티르는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서 성에 틀어박혀 있거라, 곧 찾아가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