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18화 (318/365)

318화. 반발

비가 내린다.

이 비는 탑에서 조립된 날씨도,

방랑하던 어느 구름의 객기도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의 눈물이었으리라.

“들어… 가시지요.”

늙은 시종의 말에도,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새하얀 검집에 물려 있는 자루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푹 숙인 그의 무릎 맡에는.

한 자루의 검이 두꺼운 천으로 봉인된 채 반쯤 박혀 있었다.

착잡한 표정을 짓던 시종은 조용히 다가가 다시 한번 불렀다.

“도련님.”

그러나 이내,

늙은 시종은 말문을 굳게 닫은 채 고개를 떨궈야 했다.

남자는,

작고 여린 꽃 한 송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행여나 비에 젖을까 봐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던 그 꽃의 봉우리는,

하얀색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비가 그쳤다.

그의 눈물도 그쳤다.

그제야 남자는 품에 안고 있던 꽃 한 송이를 땅에 반쯤 박힌 검 앞에 내려놓았다.

“형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것을 끝으로 남자는 흠뻑 젖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박힌 검 뒤편에 세워진 비석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장식 하나 없는 단출하기 짝이 없는 잿빛 비석에는 오롯이 한 단어만이 새겨져 있었다.

[백로]

그 고고한 이름은 비석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겐 전부나 다름없었던 존재의 것이었다.

세상 유일하게 자신의 치기와 어리광을 받아주던,

그것을 포근히 보듬어주던 세상이었다.

그 백로가,

날개가 꺾인 채 돌아왔다.

“영감, 우리 형님이 진정 그에게 패배했다 생각하십니까?”

그의 물음에 시종은,

분노한 표정으로 단호히 대답했다.

“천만에요.”

이러한 분노를 달게 받은 남자는, 슬픔으로 붉게 짙어진 코끝을 움찔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우리 형님이 그깟 검을 상대로 부러졌을 리가 없지.”

아이베리아의 백로다.

여덟 자루 검 가운데서도 손꼽을 만큼의 실력자란 말이다.

그는 여덟 자루 검 내 세력의 편중을 막기 위해 그들이 제시한 결투에 친히 응했다.

결투를 벌일 장소도,

시간도 모두 그들이 정한 것이었음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응했다.

그러면서 그는 출발 직전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었지.

확실히,

그에게 도움을 구하러 가길 잘했다고.

그에게서 얻은 조언을 통해 자신은 맞서 싸울 명분을 얻었다고.

그런 그가,

검을 뽑길 결심한 그가 패배하였다.

그리고 그 패배에는 확신과 수긍보다 의문이 가득했다.

그래서 남자는 파헤치고자 한다.

지금 아이베리아에서 일어난 전쟁, 그 밑바탕에 깔려 있을 여덟 자루 검들의 있을지도 모를 담합을.

남자는 확신한다.

백로는 한 검이 아닌 여러 자루의 검에 의해 스러졌음을.

“영감, 이제 나르드 가문을 이끄는 건 누구지?”

남자의 물음에 시종은 즉답했다.

“바로 당신입니다.”

그 답을 들은 남자는 천천히 뒤돌아,

분함에 가득 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지금부터 나르드 가문은 여덟 자루 검으로 명명된 자들을 부러트릴 것이다.”

그것은,

이 아이베리아의 굵직한 대명사 하나를 분쇄해버리겠다는 다짐이었다.

* * *

13 고성중 하나인 레자스.

그 외곽엔 숱한 공성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성벽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

이 성벽의 복잡한 구조는 맞바람을 효과적으로 분쇄하며 동시에 성내로부터 나부낀 바람의 세기를 더욱 증폭시킨다.

그 말은 즉,

성의 구조 자체만으로 공성법 대다수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단 소리였다.

이런 미로와 같은 성벽 너머엔 깊게 파인 해자 위로 우뚝 솟은 성관이 장관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한 성관 안쪽,

대리석 조각으로 점철된 경이롭고 화려한 복도 위.

한 남자가 큼지막한 걸음걸이로 그곳을 가로질렀다.

그의 뒤로는 좌우 2열로 도열 한 기사들이 줄줄이 따랐다.

그렇게 복도 끝,

굳게 닫힌 집회실 문을 박차고 들어간 남자가 앞에 비어있는 의자 하나에 다가가 껄렁하게 걸터앉았다.

허리까지 내려온 검은색 곱슬머리.

짙은 음영이 깔린 맹금의 것에 가까운 눈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옅은 주름과 창백한 안색.

반대로 붉은 핏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입술.

그의 용모는 확실히 멀리서 보아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반증하듯,

집회실에 모여있던 귀족들 모두가 그의 등장과 동시에 얼어버렸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출병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으시오.”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도,

귀족들은 서로 눈치만 볼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귀족들의 눈빛이 어느 한 곳에 맞물릴 때쯤.

집회실 최상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경, 아직까진 섣부르게 판단할 필요가 없지 않겠소?”

직위상 훨씬 아래에 있을 남자에게, 최상석의 남자는 도리어 신하 된 마음인 양 예를 갖추기 급급했다.

그의 그 말에 남자는 검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동작만으로도 장내에 있던 귀족들의 몇몇 어깨가 손가락을 마주친 소라게처럼 움츠러들었다.

그들의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걸 증명하듯,

벌떡 일어난 남자는 그대로 탁상 위에 주먹을 꽂았다.

퍽 ───── !

탁상은 고목으로 만들어져 그 두께가 굉장한 것이었음에도, 마치 살을 얻어맞은 것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탁상 위에 꽂힌 남자의 주먹을 시발점으로 쩍쩍 갈라진 균열이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괴력.

그의 호리호리한 체격에서 나왔을 거라 상상조차 못 할 괴력이었다.

“섣부른 판단? 그걸 왜 당신이 판단하는 거요?”

최상석에 앉은 이는 분명 고성 레자스의 성주였을 거다.

그런 그에게 남자는 더 위압적인 태도로 따져 물었다.

직위에 따른 상하 관계를 생각한다면 귀족들이 나서서 그를 제지하거나 보다 큰 처벌을 내려야 했지만,

누구도.

귀족 누구도 탁상에 주먹을 꽂아 넣은 채 건방을 떠는 남자를 제지하지 못했다.

잠시 후,

두려움을 가다듬은 성주가 입을 열었다.

“경, 그들의 원정군이 2군으로 갈라져 발치아와 갈로샤로 향하고 있소.”

“그래서 무얼 말하려는 거요?”

“우리는 고성 레자스를 등진 채 그 2군 가운데 상대적으로 힘이 빠진 쪽을 빠르게 처리하는 게 좋다고 보고 있소. 그리고 그렇게 해야 만이 비대해진 베나즈 세력을 상대로 싸움이란 걸 할 수 있지.”

과연, 합리적이다.

귀족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심해 내놓은, 마땅하기 짝이 없는 결론.

물론 성주의 말을 들은 남자는 그깟 결론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베나즈가 코앞에 있는데 등을 지고 싸워?”

지성이라곤 없는 그의 말에 성주는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경, 그것이 최선입니다. 성을 나가 서쪽으로 향한다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뭘 돌이킬 수 없다는 건가?!”

“…, 태풍이 움직일 테니까.”

“그 태풍을 죽이기 위해 내가 여기에 있는 거요.”

이죽거리며 살기를 드러낸 남자에게,

성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어야만 했다.

“애초에 성주는 베나즈가 스쳐 지나가도록 이 원정을 방관할 생각이 아니었소?”

남자는 그치지 않고 성주를 꼬집었다.

그렇게 성주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은 남자가 일갈하듯 말을 이어갔다.

“표정 관리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요, 기사왕을 무너트리는 데에 일조한 당신을 살려두는 건 내게도 이 고성이 좋은 패이기 때문이니까. 만약 당신으로 인해 베나즈를 무너트리는 데 내가 나서지 못했을 경우엔…,”

남자는 끝내 탁상에 박아 넣었던 주먹을 비틀었다.

그러자 균열이 더욱 벌어져 끝내 버티지 못한 탁상이 여러 방향으로 쪼개졌다.

“탁상에 처박힌 주먹이 어떤 정도의 세기였는지, 그 머리통으로서 알게 될 테니.”

이내 남자는 자리를 박차 집회실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귀족과 성주는 그저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

그가 이 성을 찾아왔을 때만 해도.

성주와 휘하 귀족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천금 같은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남자는 과거 기사왕의 칠기사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 정도로 대단한 기사라면 아이베리아의 중심 패권을 넘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기사왕의 실각을 주도했던 자들.

그자들을 후원했던 수많은 이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레자스의 성주였다는 것을.

그것을 빌미 삼아,

베가르트는 오히려 성내 모두의 목숨줄을 쥐게 되었다.

그것도 모르게 성주는 그의 움직임에 두 팔 벌려 환영했고, 굳게 닫혔던 고성의 문을 열어 그를 안으로 들였던 거다.

이제 그는 고성 안에서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베나즈가 2차 원정을 시작한 지금.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밖으로 나선다.

* * *

베나즈의 정찰대 대장.

할리 멜르아.

그가 붉은 안광을 흘리며 어느 한 곳을 주시하고 있다.

그런 그의 옆에,

부관 소여가 고개를 빼쭉 내밀어 조심스레 물었다.

“뭐가 보임까…?”

잠시 후,

두 눈을 질끈 감은 할리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심상치가 않아, 외곽 성벽 쪽 부대시설에서 군사들이 움직이는 걸 확인했어.”

그 말에 소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대답했다.

“기어이 고성 밖으로 나선 검까? 그…, 칠기사란 양반 말임다….”

칠기사의 위상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소여의 얼굴에는 금세 짙은 두려움이 깔렸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할리는 초연한 표정으로 눈을 뜬 채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 것 같아, 서둘러 돌아가자.”

이윽고 둘은 서쪽으로 전력을 다해 달렸다.

기업과 조합의 후원 덕에 그들이 탄 말들은 모두 문서화 된 족보가 존재할 정도로 명마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하여 그들은 원하는 만큼 속력을 낼 수 있었고,

덕분에 돌아가 보고하는 데까지는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편자에 밟힌 낙엽이 뒤늦게 알아차려 부스러지고,

나무 사이에 자리 잡았던 바람결이 저도 모르게 와류가 되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릴 정도로.

그야말로 쏜살같이 달려낸 둘은 전방 배치된 베나즈의 본대,

그로 향하는 교차로까지 반나절만에 접어들 수 있었다.

그러자 교차로가 있는 그 평야에서,

할리는 별안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소여가 할리의 시선을 따라 황급히 고개를 뒤로 돌렸지만,

그의 눈에 보일 리가.

“뭐… 뭐임까! 대장?!”

그의 물음에 막,

눈 주위에 붉은 안광을 흘리던 할리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무슨…?”

이윽고 급작스럽게 고삐를 잡아 방향을 튼 할리.

그런 그를 따라 소여 역시 반사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소여, 누군가 우리를 아주 정확히 추격하고 있다.”

“추격하고 있다니 그게 뭔…?!”

“잘 들어, 그리고 우린 그 추격자에게 무조건 잡힌다!”

“하지만…, 이 속도를 말임까?!”

정찰대를 쫓는 추격자라면,

파수병 내지 같은 정찰대일 터.

그러나 같은 수준의 말을 타고 있다고 해도 벌어진 거리를 이렇게나 짧은 시간 안에 좁힐 수는 없다.

소여는 지극히 합당한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여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들린다.

바로 뒤에서.

두 두 ───── !

엄청난 기세로 울려 퍼지는 편자 소리가.

말이 아닌 다른 생물이 내는 발소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괴이하기 짝이 없는 편자 소리는 이내 소여 바로 뒤에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직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소여의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할리는,

뒤이어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럼에도 그 상대가 누구인지 보기 위해, 할리는 붉은 안광을 쏟으며 뒤를 바라보았다.

흑진주 같은 말,

그 위에 타고 있는…,

서코트를 걸친 기사?

기사는 손에 얇고 형편없는 나뭇가지 하나를 쥐고 있었다.

이윽고 아주 손쉽게 할리 옆에 나란히 따라붙은 그가 나뭇가지를 휘둘러 할리의 뒤통수를 정확히 가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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