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19화 (319/365)

319화. 동쪽에서, 동쪽으로

무슨 일이 있었지.

맞아.

어떤 그림자, 아니 밤이 나를 쫓고 있었지.

문제는 내가 그 밤에 필연적으로 따라잡힐 아침이나 다름없었다는 거였어.

이러한 터무니 없는 비유를 할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굉장한 추격자였다.

의식이 차려짐과 동시에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을 되새겨본 결과.

나는 자연히 감긴 눈꺼풀에 더욱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나는 불상의 누군가에게 잡힌 상태다.

몸이 속박된 것 같진 않지만, 반대로 말하면 속박할 필요가 없을 만한 장소에 있다는 뜻이겠지.

하면 내 신변과 관련한 모든 주도권은 납치범에게 있다.

그러니 황급히 눈을 떠 의식이 돌아왔음을 그에게 알린다면, 그는 즉시 납치 본연의 목적을 수행하려 들 거다.

고문,

강요,

아니면 처형.

따라서 철저한 마음의 준비를,

납치범이 내미는 모든 것들에 초연함으로 대답할 수 있을 냉정함을 차릴 준비를.

하기로 했다.

후우 ─

죽은 듯 조심스레 깊은숨을 내쉰 다음 슬슬 눈꺼풀을 움찔거리려는 찰나.

미처 상정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 버렸다.

소여.

그는 무사한 건가?

이미 나보다 먼저 온갖 고문을 당하고 죽었을까?

아니면 그의 생사를 빌미로 내게 잔인한 거래를 요구할까?

만일 납치범이 종족 차별자라면 이미 소여는 한참 전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슬슬 머릿속에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 하나가 만들어질 때쯤.

“으음.”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신음은 틀림없이 소여의 것이다.

그의 목소리를 확인한 순간 직전까지 냉정함을 차리겠단 생각을 모두 날려버린 나는 상체를 급히 일으켰다.

소여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

상대적으로 중요 목표에 해당하는 나를 투신한다면, 작게나마 소여가 생존할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그가 나를 대신해 베나즈 가문의 중요한 전서구 역할을 해줄 거야.

그렇게 감겨 있던 눈을 활짝 떴다.

그럼,

“일어나셨슴까?”

…,

소여가 천연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반긴다.

한 손에 생선 꼬치구이를 쥔 채로.

* * *

“소여…?”

“하긴, 처음 겪어보셨을 테니 늦게 일어나시는 것도 이해됨다.”

그리 말한 뒤 다시 손에 쥐고 있던 음식을 한입 베어 먹는 소여,

“으음.”

그 신음은 음식의 뜨거움을 불사한 호방한 한입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대체…?”

얼빠진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잡고 앉으면, 소여는 기다렸다는 듯 모닥불 근처에 꽂혀 있던 생선구이를 하나 뽑아서 내게 건네주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저 어벙하게 그가 건네는 음식을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처음 겪어봤다는 말은 뭐지?

“소여, 대체 무슨 일이…?”

그에게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오, 드디어 일어나셨군.”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

모닥불 근처,

냇물 소리가 들려오는 쪽에서 나타난 그 남자는 성큼성큼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런 그의 손에는 막 다 태운 연초가 걸려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턱 전체를 덮은 까끌까끌한 수염.

뒤로 시원하게 넘긴 적갈색 머리카락.

날렵한 눈매, 그 좁은 눈매 사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작은 눈동자는 깊은 갈색을 말하고 있다.

그 때문에 눈동자의 방향을 어디로 두어도 째려보고 있는 것만 같은 사나운 인상이어서,

나는 더욱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재를 턴 연초를 모닥불에 던진 뒤 자연스레 모닥불을 사이에 끼고 나와 마주 앉았다.

“슬슬 걱정됐었는데, 다행입니다.”

미간을 찌푸리며 퍽 걱정스러운 말투로 안부를 묻는 그에게, 내 옆에 앉아 있던 소여가 반응했다.

“저와는 달리 할리님은 인간이니 어쩔 수 없는 거겠죠.”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귀 큰 자들은 달라도 다르군요.”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거기다 소여는 왜 그에게 이토록 순순한 반응인 건지.

폭발하는 의문을 참지 못한 나는 신경질적으로 토로하듯 말했다.

“소여,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기에…,”

그러자 마주 앉은 남자는 양손 바닥을 내게 펼쳐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례했군요, 차근차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의 시간은 남들의 것보다 좀 더 많은 촉박이 얹어져 있다는 거 잘 압니다.”

뭘까?

그가 내뱉는 말은 마치…,

그래, 디안님을 닮았다.

기묘한 동질감에 나도 모르게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그러나 그 촉박에 시간이 어그러질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주셨으면 합니다. 우선…,”

남자는 이내 모닥불 근처에 굴러다니듯 방치되어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나와 소여를 기절시키는 데 썼던 것이었다.

“이것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이 나뭇가지는 탑의 물건입니다. 물질화한 가을을 바른 것이지요. 휘둘러 낙과를 유발하는 물건인데, 그 낙하의 대상이 누군가의 의식까지 해당할 정도로 범위가 넓습니다.”

탑과 관련된 이야기는 언제나 아리송할 뿐이다.

그러니까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란 말이다.

설명을 마친 남자는 집어 든 나뭇가지를 휘휘 휘둘러 자신의 뒤통수를 가리켰다.

“두 분은 이 나뭇가지에 의해 의식을 잃으신 겁니다.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물리적인 방법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강력의 차이는 분명하지요.”

확실히 저 얇은 나뭇가지론 누군가를 기절시키긴 힘들어 보여.

결정적으로 내 뒤통수엔 어떤 상처나 통증도 없었으니까.

직후 소여가 말문을 열었다.

“대장님관 달리 저는 귀 큰 자여서 상대적으로 빨리 깰 수 있었을 검다. 뿌리내린 것들과의 친화력이 인간보다 강하기 때문에 말임다.”

위의 알아들을 수 없었던 둘의 대화는,

바로 이것을 주제로 두고 한 것이었나.

그렇담 이제 남은 건,

“당신은 어느 깃발 아래의 누구입니까? 어째서 베나즈 가문의 정찰병을 억류시킨 겁니까?”

마주 앉은 남자에게 단호히 묻자,

그는 되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와 소여를 번갈아 보았다.

“붙잡아두긴 했습니다만 억류까지 한 건 아닙니다, 보다시피 여러분들의 손발은 자유로우니까요.”

“그렇다면 소여, 즉시 리케니엔으로 돌아갑시다.”

할 말을 마친 뒤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말에 소여 역시 묵묵히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마주 앉아 있던 남자 역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단지 전해드릴 말이 있어 두 분을 잠시 붙잡은 것입니다.”

“전할 말? 누구에게서 말입니까?”

베나즈 가문의 공표식이 끝난 지가 언젠데, 하물며 이런 방식으로 접근이라니?

내 표정을 읽었는지,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주 먼 곳, 기업과 조합이 아닌 어느 왕관 아래에서 나온 말이지요.”

그 말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왕관’

아이베리아에 이 단어를 짊어질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되던가?

내가 알기론 적어도 세 명뿐이다.

“어느 방향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레 예를 갖춰 되묻자 남자는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동쪽입니다.”

동쪽,

제국 시르아…!

어안이 벙벙하다.

그 남자에게서 나온 말들은 나나 소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시르아의 의회는 지금 베나즈 가문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어… 째서 입니까?”

아이베리아는 중심을 제외한 동과 서, 그리고 북. 3강이 서로 비등함을 빌미로 침묵의 대치를 하는 상황이다.

이 비등함을 완성 시키는 것은 단연…,

세 제국의 꼭대기에 올라서 있는 ‘0’이겠지.

“저희 왕관께선 조화를 사랑하십니다, 하여 과거 중심 땅에 있었던 기사왕을 언제나 그리워하셨지요.”

그리고 그 세 개의 왕관을 중심에서 조율했었던 유일한 존재가 바로,

기사왕 에르앵.

“그렇기에 제2의 기사왕이 될 재목에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겁니다.”

제2의 기사왕.

내뱉는 것들이 하나같이 파격적인 것들뿐이군.

“그래서, 요점이 뭡니까? 전하고자 하는 말 말입니다.”

“북, 리시론의 필연적인 움직임을 막아주겠다 단언하셨습니다.”

뭔갈 놓친 걸까.

내 머리론 전부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이야기다.

그것 역시 남자는 알고 있다는 듯,

“이해가 아닌 전달에 의의를 두십시오. 애초에 행하는 자의 이해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는 말이기도 하니.”

처음으로 강압적이고 단호한 모습으로 내게 일갈했다.

나는 이에 끌리듯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베나즈 가문의 정찰대여. 지금쯤 칠기사 가운데 하나라 불리는 자가 고성에서 빠져나왔을 테니 속히 리케니엔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렇게 홀연히 뒤돌아 사라지려는 그의 뒷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물었다.

“잠깐.”

그러자 그는 뒤돌아 날카로운 눈매로 날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 남아있습니까?”

“귀하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그 절망적인 추격을 선사했던 상대에 대한 경의였을까.

내 물음에 남자는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그건…,

“헬게.”

아이베리아의 굵직한 전설 중 하나였다.

이윽고 그가 수풀 너머로 들어서기 무섭게,

──── !

그르렁거리는 맹수의 울음이 울려 퍼지고 뒤이어 묵직한 편자 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맹수의 울음을 내는 말.

이는 필시 최고의 명마인 마이어일 것이다.

헬게라는 이름 뒤에 영혼처럼 붙어 다니는 이름이기도 하다.

헬게와 마이어.

아이베리아 제일의, 전설적인 추격자.

* * *

보고를 마친 할리가 막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예전, 촙이 내 머리를 우악스럽게 쓰다듬어 헝클어진 머리카락만큼이나.

전혀.

상정하지 못했던 존재가 나타나버렸어.

…,

“동쪽이라…,”

넌지시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 본다.

베나즈의 이름으로서,

그 이름에 묻은 오명을 지우기 위해 움직인 내 앞에.

이보다 훨씬 넓은 이해관계를 가진 자가 나타나 전한 말.

그것은 내게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면서도, 동시에 넓은 이해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갑시다.”

조용히 집사부의 수행을 받아 저택 1층 홀로 내려온 나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사,

엘르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뒤 저택 밖을 빠르게 빠져나가 미리 집결해 있던 군단에 천둥을 내뱉었다.

“모두 출정하라!”

밖이 한창 소란스러워진다.

이와는 반대로 저택 내부는 더욱더 무게감 짙은 차분함이 내려앉았다.

그 차분함은 바돈과 조이가 양분해 만들어내고 있었다.

“조이, 바돈. 리케니엔을 잘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그들은 가슴에 손을 얹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저택 밖으로 나서 행군을 위해 재배치된 장장 육백에 달하는 병력을 거슬러 올라간 나는,

내 출발을 기다리고 있던 휘하를 한 번 뒤 돌아본 뒤.

조용히 고삐를 당겨 앞을 향해 나아갔다.

* * *

“확실해. 태풍이 움직이는 게 관측되었어.”

“일대에 온갖 재해가 판을 치겠군.”

“아니면 허무하게 일축될 수도.”

작게 마련된 기도실 밖,

높은 직책을 가진 부장들이 모여 작게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땡 ─

청아한 종소리가 울린다.

땡 ─

그러자 부장들은 하나같이 입술을 꾹 닫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기도 시간이 된 것이다.

그렇게 마련된 침묵 가운데 작은 기도실 안에서는,

상의를 탈의한 한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고독히 앉아 있다.

기사단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

크녹스

그는 정중한 표정으로 종소리를 반주 삼아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때입니까?”

이내 표정은 폭력적인 광기로 물들기 시작하고,

끝내 기도는 포고문으로 변질된다.

“이제 휘둘러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어디로 향하는 포고문인가.

“당신을!”

이제 그가 움직임으로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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