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걷잡을 수 없는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가헨 레바르도.
과거, 글라디옴을 부러트린 다섯 기사 중 하나인 그가.
막 거대한 회랑에 들어서기 무섭게 한쪽 무릎을 꿇고 누군가에게 아뢰었다.
그런 가헨의 인사를 받은, 거대한 의자를 가득 채운 거구의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
가헨은 그제야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의 눈치를 살필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그 남자의 손에 쥐어져 있는 쇠사슬 쪽으로 시선을 옮긴 가헨은,
아직도 그 지독함은 여전하다는 듯, 질린 표정으로 쇠사슬을 따라 눈알을 굴렸다.
이윽고 그의 눈에 들어온 한 여인.
검은 베일을 뒤집어쓴, 멀리서 봐도 고고함이 느껴지는 그 여인은 마치 짐승처럼 바닥에 덩그러니 앉아 있다.
저게 진정 탑을 거부하고 빠져나온 마법사, 아니 점성술사라고 볼 수 있는 걸까?
목줄에 묶여 마치 애완동물인 양 다뤄지는 저 존재가?
“가헨.”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의 부름에,
여인에 대한 상념에 젖어 있었던 가헨은 퍼뜩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예, 듣고 있습니다.”
“베나즈가 2차 원정을 개시했다지.”
남자의 말에 일순간 가헨의 턱이 갈라졌다.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가헨의 말에 남자는 치켜든 고개를 더욱 빳빳이 세운 채 일갈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마치 닦달하는 듯한 신경질적인 목소리.
이에 가헨이 고개를 번쩍 들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1차 때와 같이 이번 원정도 놈들의 승리로 끝나는 것인가를 묻는 거다.”
남자의 말에 가헨은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때는 앙 실러 데우스의 개입만 아니었다면…!”
“그럼, 이번에는 다르단 건가?”
남자의 권위적인 물음에 직전까지 적극적으로 항변하던 가헨은 입을 꾹 다물어야만 했다.
이어 남자는 곧바로 가헨을 압박하듯 말을 이었다.
“아니, 가헨 경. 달라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지금 레바르도 가문이 받는 후원들이 끊어지게 될 테니까.”
대화의 모든 주도권을 쥔 남자는,
이제 자세를 여유롭게 고친 뒤 한 꺼풀 느슨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거기다 베나즈 가문의 처단은 레바르도 가문의 숙원사업 중 하나이기도 하지 않나?”
그 말은 가헨에겐 아주 모욕적이었다.
왜 모욕적인 건지, 가헨은 하나하나 따져 반문해 알리고 싶은 생각이었지만.
끝내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것만으로 감내해야만 했다.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으니까.
“거기다 개입했다던 앙 실러 데우스도 기사단 전신이 움직인 게 아니라 그곳에 소속된 한 기사의 독단이었다지?”
“한 기사라고 치부하기엔 덩치가 큰 놈입니다.”
“어찌 되었든 개인으로서 움직인 건 명확한 사실.”
남자는 가헨의 말을 변명으로 취급하며 모든 것을 일축했다.
“하면 당시 양측에서 벌어졌던 충돌의 후유증은 그 광신도 기사놈이 더 크다는 말이겠군?”
“저희 병력의 손실도 무시 못 할 수준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내 영지에서 얼마든지 벌충할 수 있다. 문제가 되지 않아. 요는 개인으로 움직인 그놈에게 있어서 2차 적인 개입은 아주 큰 부담이란 소리다.”
가헨은 그 말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이라 불리는, 그놈은 보통 미친놈을 한참이나 넘어선 놈이니까.
“그러니 이번 베나즈 놈들의 약진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아내란 말이야.”
“잘 모르시나 본데, 베나즈 가문의 예상 진출로에 있는 관문과 성들 역시 아주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덴 고성과 칠기사가 내포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더 좋은 거 아닌가? 베나즈에 확정적인 손실을 안겨줄 요소가 될 테니까.”
“반대로 개입의 시기를 잘 못 정한다면, 그 확정적 손실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남자는 픽 하고 웃었다.
“우리라니, 손실은 네가 입는 거지 내가 입는 게 아니야. 레바르도, 너희를 후원하는 건 나라는 걸 언제나 잊지 마.”
“그 후원으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만들어 오는 것도 레바르도 가문입니다.”
분을 넘어 차갑게 식은 감정으로 응수한 가헨,
그의 눈가에 잡힌 검게 그을린 핏대.
보기만 해도 눈에 그을음이 묻을 것만 같은 와중에 의자에 앉은 남자는,
“하하하!”
갑자기 호탕하게 웃으며 연신 자신의 무릎을 쳤다.
덕분에 쥐고 있던 쇠사슬이 크게 흔들렸고,
그 반동으로 바닥에 앉아 있던 여인은 한바탕 이리저리 휩쓸리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맞지, 맞아. 그래서 내 레바르도를 못 끊지.”
웃음을 거둔 남자는 이제 고개를 불쑥 내밀어 물었다.
“원하는 게 뭐지?”
“레바르도 가문이 서쪽의 전신이 되길 원합니다, 0으로 창업한 놈들의 판을 흡수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다시 일어선 베나즈 가문을 척살하고, 그것을 양분 삼아 일어선다라…, 그들에게 더 없는 능욕이군.”
그러나 남자는 다시 등받이에 상체를 쏟은 채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그렇게 되면 레바르도 가문의 덩치가 상당해지겠군, 나의 후원이 없어도 될 정도로.”
물론 가헨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즉답했다.
“후원이 아니지요, 0을 쥐고 중앙 패권을 도모할 공을 섬겨야 할 테니까요.”
남자는,
가헨의 말을 찬찬히 음미하다가 끝내 흡족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명의의 인장 사용권을 1회 부여하지. 그걸로 조속히 베나즈를 칠 병력을 건설해 출정하도록.”
가헨은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남자에게 고개를 숙인 채.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예를 보인 뒤 그대로 뒤돌아 나섰다.
가헨이 사라지고 난 직후.
남자는 쥐고 있던 쇠사슬을 끌어당겨 여인을 자신 쪽으로 질질 끌어왔다.
“네년이 말했었지, 가헨이란 수를 착수했을 때 비로소 찬란한 결실을 얻게 될 것이라고.”
그의 물음에 겨우 몸을 추린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아이베리아 중앙 패권,
그곳에 가장 가까이 도달한 세 성인 가운데 한 명인 그는,
위대한 후원자 벨리반즈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 !”
이전의 웃음과는 다른, 동굴의 울림 가득한 위엄을 뽐내면서.
* * *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
그러나 광신도 기사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리는 자.
크녹스.
그가 자신이 이끄는 휘하 기사단과 함께 막 출정 길에 올랐다.
그 기사단의 이름은 ‘섬광 기사단’
이 섬광 기사단은 이미 앙 실러 데우스 내 기사단 가운데서도 독자적 행동이 가능할 정도로 거대화된 집단이기도 하다.
기사단장이자 기사단의 섬광 그 자체인 크녹스.
부단장이자 심판의 기사라 불리는 베커드.
율자의 기사, 레바리스.
기적의 심문관, 소르자.
그리고 죄악의 글론까지.
이들 다섯으로 구성된, 아이베리아 내에서도 굵직한 대명사로 꼽히는 그들이 지금 한 점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거다.
이 한 점으로 뭉쳐진 섬광 기사단이 향하는 곳은,
그 행렬의 유일한 꼭짓점인 크녹스만이 알고 있다.
그의 뒤를 잇는 행렬은 그저 크녹스가 행하고자 하는 일을 믿고 따를 뿐.
‘앙 실러 데우스는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이들 내부에 오르내리는 강고하고 권위적인 교리 법칙 중 하나이다.
그리니까 이 행렬은 위의 교리에 따라 철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크녹스가 두 갈래로 갈라진 길 앞에 멈춰 섰다.
그 하나만을 믿고 따르는 기사와 병사들 역시 같이 멈춰 섰다.
곧 크녹스의 부관인 베커드가 다가와 넌지시 중얼거렸다.
“한쪽 길은 태풍의 눈으로, 다른 쪽 길은 부유한 장벽으로 이어지는 길이군요.”
그는 이미 일전에 크녹스와 함께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려 시도했던 전적이 있다.
하여,
베커드는 당연히 태풍의 눈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설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리 말머리를 돌려놓고 박차를 가할 준비만을 남겨놓은 순간.
갑자기,
갑자기 크녹스는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태풍의 눈으로 향하는 길이 아닌,
그 반대편 길.
“크녹스 경…?”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은 이곳입니다.”
“신의 뜻입니까?!”
거듭된 베커드의 물음에 크녹스는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국면이란 건 바다와 같이 고착될 수 없는 법이지요. 따라서 국면 앞에선 역설도 자연스러운 거랍니다.”
그 말은 거룩한 설교나 다름없었던 것인지,
베커드는 즉시 두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이마에 성호를 그으며 기도로 화답했다.
“라메.”
그의 화답에 크녹스 역시,
“라아 ─ 메에 ─”
그만의 특유한 억양으로 답했다.
“갑시다, 신의 뜻에 따라.”
그렇게,
그들은 크녹스의 설파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국면을 향해 자연히 방향을 틀었다.
그것은 참으로 비이성적인 광경이었지만,
또 이상하게도 이미 그렇게 정해진 것인 양 자연스러웠다.
* * *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그 대단하다는 고성 레쟈스를 빼면 그곳에 주둔한 병력의 질은 쓰레기에 가깝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죽음으로서 어느 둔덕, 어느 벽을 만들어낼 재료정돈 될 수 있을 테니.
어차피 이 아이베리아에서의 싸움은 재해를 가진 소수 기사의 압도만으로 이뤄지는 것이니까.
쓰레기들을 먼저 밀어 넣고, 그다음 나와 나를 따르는 기사들이 전장의 청사진을 그리면 될 뿐이야.
“베가르트 경…, 지금이라도 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제아무리 고성이라 한들, 0에 수렴된 태풍을 버틸 수 있을까!”
쓰레기 같은 부관의 말을 들으니 속이 메스껍군.
고성에 들어가 지지부진하게 말라 죽어가자는 소리를 저리 태평하게 하는 것을 보면,
과거 여기저기서 영광이 빗발치던 아이베리아는 이제 다 죽었다는 게 실감 된다.
기사왕 에르앵이시여.
왜 그렇게 무력하게 무너져내리신 겁니까?
펼쳐두었던 아이베리아의 영광을 왜 그렇게 쉽게 덮어버렸냔 말입니다!
당신이 원망스럽습니다.
당신을 중심으로 한없이 나아가던, 그 영광스러운 기사들의 믿음을 저버렸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덩그러니 남아버린 나는,
아직 당신을 위해 싸웁니다.
당신을 좀먹고 자라난 것들을 쳐내기 위해서.
기사 베가르트 욘테.
이 원망 많은 충신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나팔을 불어라.”
쓰레기 부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 멀리,
하늘 전체를 뭉갠 구름 무리가 다가오는 게 보였으니까.
부 ────── !
곧이어 달팽이 모양의 뿔피리 속에서 묵직한 음이 뛰쳐나왔다.
직후 시간차를 두며 덧씌워지는 피리 소리에,
부 우 우 ───── !
제법 전장이 기분 좋게 달궈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저 너머 언덕 위로 검은 바탕의 하얀 십자가 자수 된 깃발이 우뚝 솟아올랐다.
그 깃발을 중심으로,
좌우에서 같은 깃대가 치솟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람은 폭력적으로 돌변했고,
구름은 회오리쳐 하나의 눈을 만든 채 단 하나의 대상만을 향한 노골적인 시선을 쏟고 있었다.
이러한 경이로운 광경 하나만으로도,
막 피리 소리에 달아올랐던 쓰레기들의 사기가 팍 죽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 !
우리의 것과는 비교될 정도로 묵직하고 정교한 화음으로 구성된 피리가 저들에게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저음에서 고음으로 단번에 치고 올라오는 그 피리 소리에 맞춰,
솟은 베나즈 가문의 깃대 아래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말머리들.
그래, 오래 기다렸다.
“전군!”
나의 애검, 쯔바이헨더 ‘발라다’를 치켜세운 채 뒤 모든 병사를 호령할 외침을 쏟았다.
이내.
“앞으로!”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뒤 돌아보지 않은 채 박차를 가하고 가해,
태풍의 눈으로 전력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