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광기의 백야
‘위대한 후원자’
벨리반즈 넥스.
현 아이베리아 중원구도 가운데 한 축을 이루는 자.
그러나 그의 시작은 아주 미약한 것이었다.
과거 그가 이끌었던 기업 넥스는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작고 볼품없었으니까.
그런 그가 무작정 아이베리아로 떠나길 결심했을 때.
주변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아이베리아는 기업과 조합들의 무덤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들 세계 내에서 불모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벨리반즈의 이러한 결심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발을 들일 무렵의 아이베리아는 곳곳에서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고 있던 때였으니까.
동쪽에선 의회를 필두로,
북쪽에선 절대왕권을 필두로,
서쪽에선 개혁을 필두로.
아이베리아에서 벗어나 독자적 지명을 쟁취한 제국들이 건설되는 시점이었으니까.
벨리반즈는 이러한 변화가 만들어낸 틈바구니가 곧 자신의 생존 길이라 여겼다.
물론 그의 그 꿈같은 이야기는 아이베리아에 발을 들이는 그 순간부터 깨져버리고 말았다.
건설된 세 제국의 전신은 모두 아이베리아의 유구함으로부터 시작되었기에 외부 세력이 개입할 길이 없었고,
때문에 벨리반즈와 같은 외부인이 아이베리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영역은 오롯이 중심 땅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세 제국의 균형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그들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의 방향은 노골적일 만큼 중심 땅으로 향했고.
이러한 과정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레 세 제국의 시선이 중심으로 집중되었다.
이 시기에 벨리반즈는 하루하루가 지옥 위를 걷는 심정이었다.
일말의 기회라도 엿보기 위해 도박하는 심정으로 발들인 낯선 그 땅이,
하필이면 시기적절하게 거대한 세 제국의 동시 표적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덕분에 세 제국 사이에서 일어난 단순한 알력 다툼 하나만으로도 중심 땅은 크게 상처 입고 피를 흘렸다.
이러한 상황 덕에 중심 땅엔 언제나 명분이 넘쳤고,
그렇게 많은 깃발이 일어섰으며,
불세출의 기사들이 앞장섰으며,
심지어는 왕관 몇몇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게 일어선 깃발이, 기사가, 왕관 모두가 내외부에 빗발치는 혼란을 이기지 못하고 몰락하길 반복했다.
그리고 이러한 몰락의 반복은 아이베리아의 중심 땅을 더욱 뜨거운 지옥으로 만들어냈다.
그 과정 가운데 여러 곳에 의탁해 구멍가게 수준의 사업으로 빌빌거리며 연명하던 벨리반즈는,
이곳에 더는 답이 없을 거라 판단하였다.
떠나길 결심했을 때 들었던 비웃음들이 모두 합당한 것이었구나 생각했었다.
그 순간.
드디어 벨리반즈에게 천운이란 것이 다가왔다.
보통 천운이란 것은 본인이 가장 알아차리기 어려운 형태로 오기 마련인데,
그것도 대놓고 기회라고 말하는 그런 천운이 벨리반즈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느 하나의 현상처럼,
중심 땅 가운데 우뚝 일어섰다.
기사왕,
에르앵.
0을 쥐고 나타난 이상과 같은 기사.
흔한 설화, 동화, 전설,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환상적인 존재가 나타난 거다.
그리고 그 기사왕은,
‘조화’로서 중심 땅을 하나로 묶었다.
태풍의 눈으로 주위 바람을 집결시키듯, 에르앵은 자신이라는 눈으로서 난잡하게 퍼져 있던 중심 땅의 바람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벨리반즈는 기사왕이 설파한 그 조화를 통해,
깃발 아래 자신의 족적을 세길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베리아는 4파라는 구도로서 절대 어디론가 치우치지 못하는 팽팽함이 자리잡히게 되었고,
이는 곧 태평과 성대라는 단어를 끝으로 긴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남은 것은,
각 세력의 내부적인 융성뿐.
에르앵이 제시한 파격에 가까운 문물의 자유.
그로 인해 각지에서 모여든 기업과 조합의 융화.
뿌리 깊은 귀 큰 자들의 이주까지 이뤄내며 종족 간의 조화까지 꾀어낸 기사왕은 진정,
이상을 완성하려는 듯 보였다.
이런 에르앵이 구축한 환경 속에서 벨리반즈는 그 덩치를 탐욕적으로 불릴 수 있었다.
본디 이상이란 건 다수에 의해야만 완성되고,
반대로 소수에 의해 힘없이 무너진다.
그래서 이상이 이상이라 불리는 것이다.
에르앵의 이상을 따라오지 못한 소수 인원, 그 가운데 하나인 벨리반즈는 백지에 가까운 법칙 위에서 신명 나게 무법을 써 내려갔다.
편취, 독점, 통제, 압력.
그에게는 그것이 이상이었기에, 다수의 이상을 무너트리는 것이 곧 그의 이상이었기에.
그는 그 나름대로 철저히 이상을 건설했다.
다수의 편에 있었던 기사들을 자신이 속한 소수로 끌어들이고, 파벌을 형성해 뒷배를 든든히 세운 결과.
벨리반즈는 어느새 아이베리아에서 가장 유력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에,
다수의 편에 있던 자들이 칼을 빼 들기 시작했다.
이상에 들러붙어 피를 빠는 소수를 처단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 시점에서 다수는 다수라 불릴 만큼 그 수가 많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의 그 행위로 인해서 이상을 통해 편취를 하던 자들은 더욱 단단한 하나로 결속되었다.
그 결속된 무리의 꼭대기엔,
아이베리아의 가장 혹독한 추위가 있었다.
기사 앵거스.
‘3년, 크리가 프리거스’
혹독한 추위가 태풍의 눈을 얼리기 시작할 때, 벨리반즈 역시 이후 자신의 이름을 주류로 올리기 위해 한 이상의 몰락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기사왕의 가장 강력한 검을 부러트리는 일에도,
자신이 가진 가장 확실한 패인 가헨을 보태 그 지분에 발을 걸치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모든 일이 완벽하게 흘러가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0이.
기사왕이 휘둘렀던 태풍이 사라져버렸다.
가장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전대미문이란 말과 함께 펼쳐져 버린 것이다.
0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주류로 올라선 자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구심으로서 가장 확신할 수 있는 요소가 사라졌으니,
스스로가 나서서 구심이 되어 자기 것을 지켜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다.
그렇지 않으면 보다 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 잡아 먹힌다!
결국 벨리반즈는 기업가라는 자리를 내려놓고 아이베리아의 한 깃발로서 자리 잡기를 결정했다.
자신이 회유한 여러 깃발과 기사를 하나로 묶어 아래에 두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벨리반즈가 이끄는 넥스 가문은 중심 땅의 가장 강력한 세력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벨리반즈에게 또다시 천운이 찾아왔다.
묘연했던 0이 눈앞에 떨어진 것이다.
아니, 이번 천운은 그가 가진 돈으로 찾아낸 것이 분명하다.
그는 막대한 돈으로 마법사이길 포기한, 별과 소통한다는 점성술사를 구매했고.
그녀의 말을 통해 지금의 기회를 잡은 것이라 믿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증명하듯,
베나즈의 병력은 지금 세 개로 쪼개진 상태고, 그 이름에 덧씌워진 오명 탓에 본대는 칠기사 중 하나라 불리는 자와 맞닥트리게 됐다.
그래, 됐다.
된 거다.
못 미덥긴 하지만 실력으로는 확실한 레바르도 가문을 이용해 0을 손에 넣는 순간,
서쪽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가헨을 쳐내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의자에 앉아,
잔잔히 거슬러 올라간 과거를 음미하듯 살피던 레바르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얹어졌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찬가가 아닌가?
이를 두고 욕하는 자들이 있겠지,
다수의 이상을 무너트린 자라 힐난하는 자들도 있겠지.
하지만 세상은 이상을 무너트린 자들에 의해 움직이는 법.
“웃기지 않은가? 나를 욕하는 자들은 지금 내 밑에서 내 법칙에 따라 빌빌거리며 살아가고 있잖은가?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정해준 정답 중 하나인 것을…!”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뜨거운 오만을 내뱉은 레바르도가 쥐고 있던 쇠사슬을 당겨 여인을 흔들었다.
“대답해 보아라, 너는 내 심중에 돌아다니는 말도 훔쳐볼 수 있잖아?”
그의 거친 손짓에 한참 바닥 위를 질질 끌렸던 여인은 겨우 가눈 몸을 일으켜 대답했다.
“그래요, 정답이지요. 세상에 얼마 없는 가장 확실한.”
그리고 그녀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 !
울려,
─── !
퍼지는.
부우우우 ──── !
굵직한 피리 소리.
그리고 그 피리 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청아하게 전파되는,
땡 ─── !
종소리.
그 소리에 레바르도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는 방자했던 자세를 풀어 허겁지겁 의자에서 일어나, 긴 회랑을 달려 성관 밖으로 나섰다.
곧이어 바깥에 나온 레바르도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눈 따갑고 시린 찬란한 아침이 쏟아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니,
이건 아침이 아니다.
누군가가 펼친 백야.
천천히 고개를 내린 레바르도의 눈에,
각 성벽 끝 첨탑 지붕 위에 올라선 네 기사가 들어왔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전령, 아니 사도와 같이 서 있는 그들은 펼쳐진 백야 아래 그림자 진 성 내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이어.
그중 가장 밝은 자가 흰 이빨을 드러내며 외쳤다.
* * *
“빛이 있으라 ── !”
환희에 젖은 듯 광대 밑을 부르르 떨며 외치는 크녹스의 목소리가 벨리반즈 성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의 그 목소리는,
바로 그의 왼편 첨탑 지붕 위에 올라서 있는 심판의 기사 베커드에 의해 증폭된 것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드높은 첨탑 꼭대기에 각각 올라설 수 있었는진 누구도 모른다.
아니 성 내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저 첨탑 위에 올라 서 있는 자들은 재해나 다름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느 누가 휘둘리는 재해를 예상할 수 있겠는가?
예상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짓이란 말인가!
“고인 그림자들아, 이제 빛을 받아 정화될 때가 되었다. 묵은 굴레를 벗고 초연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라.”
광신도,
크녹스의 기도인지 연설인지 모를 말들이 계속해서 벨리반즈 성 전체를 울렸다.
“그래야 만이 다가올 태풍을 예상하고 피할 수 있으리니, 이 태풍의 전조인 백야를 받아들이라!”
이내 크녹스가 품에 있던 작은 사브르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쏟아지던 빛이 더욱 강력해진다.
살갗이 아릴 정도로 뜨거울 만큼!
“라아아아아 메에에에에 ─── !”
그것을 끝으로,
첨탑 꼭대기에 올라와 있던 네 기사의 형상이 뭉개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성벽 위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병들은 그것이 정교한 아지랑이란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애초에 일대에 백야를 펼치는 자가,
어느 한 곳에 아지랑이 하나 못 피우겠는가?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가진 재해를 마음껏 재단할 수 있는 실력자란 소리.
얼이 나갈 대로 나간 벨리반즈가 황급히 정문 성벽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제야 아직 나태함의 얼룩이 묻어 있던 병들이 허겁지겁 정문 너머를 향해 고갤 내밀었고,
그 정문 앞에 집결된 빛나는 군세를 발견하곤.
힘없고 가녀린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적… 적들이다! 적들이 왔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 !
귀를 울리는 이명과 함께 정문 쪽으로부터 발산되기 시작한 강렬한 빛.
그 빛의 근원지는 기사 크녹스의 손에 들린 사브르였다.
[7년, 풀고르크레]
밤을 부정한 아침.
사브르 끝에 비현실적으로 멍울진 빛무리.
그것이 이내 벨리반즈 성 정문을 향해 직선을 그리며 나아갔고,
펑 ─── !
동시에 무지막지한 굉음과 함께 정문을 관통한 빛이 성내 거리 일대를 휩쓸며 폭발했다.
자아를 가진 백야.
말로만 들었던 그 끔찍한 재해를 눈앞에서 목도한 벨리반즈 성 병사들은 그때부터,
표정으로 망연자실을 그려야만 했다.
저걸,
대체 범인의 수준으로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