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묵시록
벨리반즈,
그의 후원을 받은 네 개의 가문.
레바르도, 젝세리아, 모로온, 수즈.
과거 기사왕 아래에서 위용을 떨쳤던 명문가이자 지금은 벨리반즈의 전신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깊숙이 개입된 깃발들.
그 가운데 젝세리아는 영향력으론 벨리반즈 제도권 내 레바르도 다음으로 대단한 가문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거성 레바르도의 수비 체계는 모두 젝세리아 가문이 관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젝세리아 가문 내 최고 기사이자 레바르도 성의 수비대장인 스필은.
경악한 얼굴로 저 멀리 피어오른 연기 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바르도 성은 그 부유한 이름에 걸맞게 자본으로 떡칠한 수성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 말인즉 단순 수성과 관련한 능력만큼은 고성에 필적할 정도.
단적인 예로 성문에 쓰인 자재는 남쪽의 숲에서 공수한, 귀 큰 자들의 심적 수도라 일컬어지는 세계수다.
댐을 무너트린 범람에도 쉬이 꺾이지 않는, 그런 어마어마한 내구력으로 지어진 성문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빛 한 줄기와 함께 바스러졌다.
“허.”
어찌나 허탈했는지 스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자,
가진 재해를, 인챈트의 힘을 저렇게 터무니없는 정도로 휘둘렀다면 적어도 그 당사자의 힘은 모두 고갈되었을 거다.
스필은 적어도 같은 인챈트를 휘두르는 자로서 그것만큼은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었다.
광신도 크녹스.
말로만 들었는데 진정 칠기사에 버금가는 괴물이로구나.
작은 경탄을 내뱉은 스필은 적들의 가장 큰 힘이 기울어진 지금 시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놈들의 추가 진입을 막아라! 앞으로!”
파르티잔과 전신을 다 가릴 정도로 거대한 사각 방패, 스쿠툼으로 무장한 정예 수비병들을 몰아 정문 쪽으로 진군했다.
막대한 자본이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할 그런 최고 등급으로 무장한 수비병들은 그 이동 과정만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을 뽐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의 수비병을 만든 훈련 역시 하나같이 보통 것들이 아니었다.
이들 수비병은 기사 스필의 인챈트와 능히 동화되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왜 벨리반즈가 중앙 패권에 가까운 남자라 불리겠는가?
그에게 마땅한 밑천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특수한 수비병은 그의 밑천 가운데서도 아주 미약한 것에 속한다.
그렇게 수비군이 성 정문의 진입로를 오목한 진형으로 가로막은 채 방진을 꾸렸다.
이런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맞추어,
아직 연기가 자욱한 정문 너머에서도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이내 정문에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가 가라앉자,
수비군은 막 정문을 통해 들어온 상대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눈부신 군세.
아직 하늘에 펼쳐진 백야 아래, 유리와 같은 매끈한 재질의 갑옷으로 무장한 군세는.
눈부셨다.
이러한 그들에 맞서,
방진의 중앙, 양옆으로 갈라진 대열 사이로 기사 스필이 걸어 나왔다.
그는 한쪽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쯔바이헨더를 땅에 박아넣은 뒤, 마주 도열한 적들을 향해 소리쳤다.
“앙 실러 데우스! 이 행위로 인해 수많은 보복과 불이익이 그쪽으로 향할 것이다! 그것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스필의 외침에 화답하듯.
눈부신 군세의 중앙 대열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튀어나온,
장엄한 기세의 전차.
그 전차에 우뚝 서 있는 우람한 남자.
자신이 펼친 백야의 색과 같은 짧은 금발, 강인한 턱.
솟은 광대, 얇은 입술.
깊은 콧대 양옆에 맺힌 푸른색 부라림.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 크녹스.
그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벨리반즈의 수비병을 한바탕 훑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어,
그야말로 굶주린 짐승과도 같은.
그런 번뜩이는 광기와 함께 얼굴을 일그러트린 크녹스가 벨리반즈 성 전체에 대고 설파했다.
“신의 뜻은 앙 실러 데우스에게 참작과도 같은 것이다. 각오? 신을 떠받드는 일에 각오라는 말이 웬 말인가! 우린 목숨을 걸었다!”
벨리반즈 성의 수비병 몇몇은,
그런 크녹스의 일갈에 질려 크게 위축되어버렸다.
단지 외침만으로도 뺨의 솜털이 드러눕는 느낌이 들 정도인데 누가 위축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수비병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은 크녹스는,
조금은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목숨을 걸고 숭고를 얻으려는 우리의 상대로는…, 그대들은 부족해 보이는군.”
나른함이 느껴질 정도로 풀어진 손짓은 덤이었다.
그의 넘실대는 광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스필은 마음을 다잡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곤 묵묵히 옆구리에 끼고 있던 그레이트 헬름을 쓴 뒤, 땅에 박아 넣었던 쯔바이헨더를 뽑아 들었다.
“부족한 건 앙 실러 데우스의 신도들이겠지, 오늘 네놈들 모두 여기서 순교하게 될 테니까.”
다부진 그의 답에,
위축되었던 수비병들이 덩달아 끓어올랐다.
“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크녹스는 얇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그것은 만족의 미소였다.
“놈들을 몰아내라.”
스필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양옆으로 갈라진 중앙 수비 대열이 뒷걸음질 치는 스필을 흡수했다.
직후,
척. 척. 척.
칼 같은 제식으로 이루어진 발소리와 함께 천천히 진군하기 시작하는 수비병들.
뒤 첨탑 곳곳에선 수비병들의 제식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고,
뒤이어 도착한 또 다른 후원 가문, 수즈의 깃발을 매단 병력이 후발대로 따라붙었다.
이제 스필에겐 직전까지 감돌았던 긴장감 따윈 없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진군하고 있는 수비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이 방진에 맞서기 위해 비슷한 진형을 내세워 선을 긋고 지지부진한 힘 싸움을 할 것이다.
그 힘 싸움으로 전선이 고착되는 순간,
본진에서 싸우는 벨리반즈 측의 승리가 당연해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갑자기 드는 묘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던 스필은 그 기원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어딜 둘러 봐도 투구 눈구멍 속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줄기를 발견하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하늘에는 백야가 펼쳐져 있다.
성벽을 통째로 관통시킬 만큼 강력한 빛줄기를 쏘았는데도?
“무슨…,”
작게 혼잣말을 내뱉은 스필이 급하게 전방을 쳐다보았다.
전차 위, 우뚝 선 크녹스.
그의 뒤통수엔 마치 후광과 같은 무지개가 떠있다.
무지개는 재해를 휘두른 자의 위상을 나타내는 증표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재해의 힘을 과하게 행사했을 때에도 나타나는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녹스는 씩 웃으며 뽑아 든 사브르 끝으로 수비병들을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미… 친…!”
욕지거리를 내뱉은 스필이 급히 수비병들에게 몸짓을 동원한 명령을 내리려 하는 순간.
찬란함으로 버무려져 있던 크녹스의 군세가 일거에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이어.
───── !
크녹스의 검 끝에서 귓전을 때리는 강렬한 굉음이 빛과 함께 터져 나왔다.
* * *
크녹스의 진정한 힘은 그가 이끄는 군세로부터 나온다.
그가 가진 장악형 인챈트.
7년, 풀고르크레.
끔찍한 백야가 하늘을 지배하면, 자연히 그 백야의 빛에 크녹스의 군세가 노출된다.
여기서 크녹스의 군세가 갖춘 특수한 장비로 인해 백야의 빛이 붙잡히게 되는데,
그렇게 붙잡혀 가두어진 빛은 곧 크녹스가 발휘하는 힘의 재료로 쓰였다.
예컨대 지금처럼.
빛을 흡수한 군세의 빛을 다시 거두어,
꽝 ──── !
크녹스의 검 끝으로부터 사출된 직선.
그것이 마주 오던 벨리반즈 수비군 정중앙을 그대로 관통한다.
요란한 폭발, 이에 밀려난 파장이 양쪽 귀를 잡아 뜯는 듯한 굉음을 전달했다.
땅이 울릴 정도의 폭발은 당연하듯 그 후폭풍도 엄청나서,
빛이 치달은 곳 주변은 아직 날아간 병사들의 사지와 건물 파편들이 허공에 체류할 정도였다.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이질적인 재해.
그 사이에서,
순식간에 중앙 진형이 뜯겨버린 수비군들에게 침착함을 갈무리할 의식 따위가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설상가상.
공격 측에서 울려 퍼지는 광기 어린 기도.
“빛이 길을 열었다! 신의 뜻을 따르라! 라아아아 메에에에!”
그 기도에 화답하는.
아 ───────── !
산사태 같이 쏟아지는 함성.
이윽고 크녹스의 전차를 필두로 한 군세가 열려버린 수비군 중앙 진형을 파고들었다.
파바박!
쇠와 살과 뼈가 부딪치고.
아아!
커억!
삶과 죽음이 마주본다.
단번의 부딪힘이 만들어낸 운명의 종장들.
그들 하나하나의 운명을 생각하면 너무나 짧디짧은 곡이리라.
쏘아진 빛, 그 사선에 위태롭게 서 있다가 후폭풍에 휘말렸던 스필은 한참 뒤에야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겨우 몸을 일으켰을 시점엔,
이미 크녹스의 군세가 수비군 후방을 한참 유린하고 있었을 때였다.
“기사 스필이 명한다! 모두 들어라! 진형을 갖추고 적의 후미를 파고들어야 한다!”
목이 터지도록 쏟아낸 그의 명령,
그 진심이 닿았을까.
한바탕 휩쓸린 곳곳 하나둘 일어서 집결하기 시작한 병사들.
그 수만 해도 백에 가깝다.
그렇게 갈무리한 병력을 집결시킨 스필이 크녹스의 군세를 뒤따라 이동하려던 때.
그의 앞에 나타난 한 기사.
“…, 속죄하라.”
아니, 그는 도저히 기사라곤 보기 힘든 헐렁한 면 재질의 옷을 입고 있다.
게다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스필은 그가 내뱉은 말 한마디만으로 적을 특정해낼 수 있었다.
“광신도를 따르는 신도놈…!”
그 말에,
앙상한 남자는 미역같이 길고 물기 가득한 머리카락이 출렁이도록 웃었다.
“글글글…,”
이내,
그의 등 뒤에서 마치 그림자처럼 뽑힌 거대한 곡검 한 자루.
마치 사신과도 같은 인상에 스필을 중심으로 집결한 병사들은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쳤다.
“나는 글론, 앙 실러 데우스의 죄악이기도 하다.”
곧이어 스필을 향해 곡검을 내세운 그가 자신을 소개한다.
이에 스필은 물러서지 않고 응수했다.
“젝세리아의 스필이다, 괴물아.”
그렇게 약속이라도 한 듯,
스필의 검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바람 줄기.
[31년, 엠마르바그]
[한 해의 수확을 거세한 바람]
그것은 더욱 거세져 스필의 전신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글론은 가느다란 허리를 뒤로 꺾은 기이한 자세로 흥미로움을 내비쳤다.
“재림…, 훌륭한 바람…,”
이후,
글론의 검으로부터 펼쳐지기 시작한 어둠.
[10년, 브리스콩테]
[생태계를 좀먹은 교란, 이끼]
아니, 어둠이 아니다.
글론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검은 기운은.
포자,
곰팡이.
자연이 아닌 자연으로 인해 변질한 생태.
엄밀히 말하면 그것도 재해의 한 축.
전혀 새로운 종류의 재해를 눈앞에서 목격한 스필은 저도 모르게 이빨을 부딪칠 정도로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글론으로 인해 번진 포자는 인근 쓰러진 시체들을…,
일으켜 세웠으니까.
* * *
벨리반즈의 휘하 가문, 수즈.
그 가문 내 최고 기사, 알레아니.
붉은색 긴 머리, 억센 콧대.
강인한 얼굴을 가진 그녀가 거대한 할버드로 무수한 선풍을 그리며 크녹스의 군세를 쳐내고 있다.
그런 그녀의 할버드엔 마치 거대한 낫과 같은 고드름이 맺혀 있었다.
[17년, 프렛시스마]
[눈사태로 정형한 겨울 ‘날’]
과거 낙하해 떨어져 그 아래 이름 모를 성관 전체를 박살 냈던 고드름.
프렛시스마.
알레아니는 그것을 자신의 무기에 맺은 채 가차 없이 휘둘렀다.
그 위력은 상당했다.
크녹스의 군사들은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몸이 양단되었고, 빗맞은 자들은 끔찍한 동상에 산송장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할버드가 다시 선풍을 그려내려던 그때.
파각!
할버드는 무언가에 부딪혀 가로막혀 멈춰버렸다.
그에 맞서는 이는,
후덕한 풍체를 가진 남자.
크녹스의 부관이자 심판의 기사,
베커드.
그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상대 여기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레바리스 경의 매력을 따라오긴 힘들어 보이는구려.”
저속하다.
그리고 가볍다.
기사라기엔 한량에 가까운 그의 언행에 알레아니는 이마에 굵직한 핏대 하나를 세워가며 자신을 가로막은 베커드의 무기를 쳐냈다.
아니.
쳐내려고 했지만…,
베커드의 투핸디드 소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9년, 뎀메르기르]
[세상이 물로써 지우려 한 것]
그의 재해는 지반을 꺼트려 수몰시킨 물의 무게 그 자체.
한낮 날카롭기만 한 고드름 따위가 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후 낙엽을 다루듯 가볍게 검을 놀린 베커드는,
그대로 알레아니의 목을 베어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