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묵시록 (2)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벨리반즈 성이 자랑하는 수비군은 철거되듯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그 무너짐의 과정에서 두 개의 깃대가 꺾여버렸다.
크녹스의 전차를 필두로 한 돌격은 기어이 성관으로 향하는 중문 앞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멈췄다.
그렇게 한바탕 허무하면서도 열정적인 충돌 후 찾아온 침묵.
크녹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전차에서 내려와 중문 근처, 언제 세웠는지 모를 간이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장에 무섭게,
천막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리여리한 종자 둘이 달라붙었다.
이에 크녹스는 태연히 피 묻은 자신의 검을 그들에게 건네준 뒤 천막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는다.
“음! 이렇게 쉽게 될 줄 알았다면 그냥 레바르도 놈들이 있었을 때 공격해도 괜찮았겠군.”
자신만만한 말투로 입을 연 그에게, 천막 안에서 봉사하고 있던 종자와 시종들이 작은 웃음으로 화답한다.
뒤이어 시종 하나가 얼음물을 크녹스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그것을 단번에 들이킨 뒤 안에 담긴 얼음은 그대로 바닥에 쏟아 버렸다.
그리고 그때 밖에서는.
쿵 ───── !
중문을 두들기기 시작한 소리가 들려왔다.
뒤따른 후속 부대가 충차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만큼 크녹스가 감행한 돌격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빠르고 날카롭고 강했다.
잠시 후 종자가 깨끗해진 사브르를 들고 돌아오자 크녹스는 말 한마디 없이 그에게 검집을 내밀었다.
이에 종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 내민 검집에 사브르를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뒤이어 종자가 크녹스의 갑옷에 묻은 이물을 제거하기 위해 주위를 기웃거리며 고군분투하는 동안,
천막 안으로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다.
“글론 경! 제법 빨랐소?”
앙상한 몸, 그 위에 뒤덮인 면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있다.
전쟁 사후, 시체 더미 안에서 잉태된 괴물 마냥 무시무시한 모습을 한 그였지만 그런 그를 크녹스는 살가운 표정으로 반겼다.
“제법 심지 굵은 놈이었습니다.”
글론은 터벅터벅 천막 가운데를 가로질러 가 구석에 놓인 물통에 얼굴을 처박았다.
이어 그대로 상체를 일으킨 그가 옆에 놓인 낡은 나무 탁상 위에 무언가를,
턱.
하고 올려놓는다.
동시에 천막 안에 있던 시종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와는 반대로, 크녹스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탁상 앞으로 다가갔다.
“결국엔 이렇게 됐군, 아쉽소! 스필 경! ”
탁상 위.
붉은 기운을 쏟고 있는 그것은.
기사 스필의 머리였다.
크녹스는 그의 수급에 심심한 위로를 던지더니 그 뺨을 탁탁 두들겼다.
그 와중에도,
쿵 ───── !
중문을 두들기는 충차 소리가 거나하게 반복되어 울려 퍼졌다.
그렇게 글론의 몸이 조금은 깔끔해졌을 즈음.
기사 베커드, 그리고 레바리스와 소르자까지 차례로 천막에 들어왔다.
그들 모두 군데군데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들 자신의 피는 아니었다.
“크녹스 경께서 예상하신 대로군요, 레바르도 놈들이 이 시기에 서쪽으로 보기 좋게 튀어 나가다니.”
물컵을 받아든 베커드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크녹스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 말에 크녹스는 정색을 하며 맞받아쳤다.
“신의 뜻을 따른 것뿐이지요.”
이에 베커드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들이켜려던 물을 얼른 내려놓곤 기도 자세를 취했다.
“불경을 용서하소서.”
그 모습을 보던 크녹스는 아까의 그 정색은 어디 갔는지 금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베커드 경께서 취하신 수급은 어디에 있소?”
“제 종자를 시켜 따로 보관해두었습니다.”
“좋군.”
크녹스는 옆에서 바삐 움직이는 종자를 붙잡아 명령했다.
“스필 경도 정중히 모셔라, 곧 긴 거리를 이동해야 할 테니.”
그 말에 종자 둘은 담담한 표정으로 탁상 위에 올라온 수급을 챙겼다.
“그래서, 크녹스 경.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던 소르자가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과 동시에,
쿵 ───── !
전보다 더 큰 파쇄음이 울려 퍼졌다.
그의 물음에 크녹스는 별 고민 없이 즉답했다.
“이 벨리반즈 성은 아주 좋은 거점이오. 우리 기사단의 출발점으로도, 그 출발점 너머의 교두보로도.”
그 말에 베커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곳을 거점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런 베커드에게 크녹스는 손짓으로 시종 하나를 불렀다.
그의 손짓을 확인한 시종은 곧바로 얼음 더미 속에 보관되어 있던 포도주를 꺼내왔다.
“그렇소, 그러니 베커드 경께서는 우리의 이전 거점이었던 곳을 잘 보살펴야 할 것이오.”
크녹스의 말은,
베커드에겐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그런 말이었으니까.
그래서 베커드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크녹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께서 주신 임무라 생각하고 무겁게 받겠나이다.”
이에 크녹스는,
“하하!”
특유의 호방한 웃음을 지으며 잔에 따른 포도주를 그에게 건넸다.
“앞으로 많은 게 바뀔 거요, 이전에 숱하게 겪었던 자잘한 변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격변으로 말이오.”
받아든 포도주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화답한 베커드.
그의 올려진 잔에 크녹스는 병째로 부딪혀 건배한다.
“그 격변에서 무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격변의 근원과 나란히 서 있는 것뿐.”
천막 안에 모인 다섯 기사.
그들이 서로의 시선을 맞물린 채 다시 한 번 거국적인 건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건배를 신호탄으로,
쾅 ───── !
벨리반즈 성관으로 향하는 중문이 무너져 내렸다.
* * *
육중한 발굽이 제일 먼저 땅을 두들기면,
베이고 찔려 쓰러진 전사의 등이 뒤따라 땅을 두들긴다.
그 두들김의 반주 위로,
격정 가득한 쇳소리가 교차하고.
교차 마디마다 짧은 단말마가 섞여들었다.
휘익!
곳곳에서 날아든 볼트가 바람을 할퀴고,
퍽!
끝내 각기 다른 목적지에 다다라 갑옷을 뚫고 피부를 찢는다.
평야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이렇듯 처절한 것이었다.
마치 벌거벗고 싸우는 것처럼, 그럼에도 그 벌거벗은 상태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두 군단에서 일어난 한바탕의 충돌 직후가 되어서야,
유의미한 판세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바탕의 하얀 십자가 그려진 깃발.
베나즈,
그 이름 아래 모인 군세가 유리한 국면을 차지한 것이다.
사실 베나즈의 군세는 아직 이렇다 할 장점 적 특징이 없다.
기업과 조합의 기술력에 기인한 우수한 장비들로 무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무장력은 아이베리아의 이름난 깃발 대다수가 갖춘 환경이기에 내세울 것이 못된다.
그런 분야로 특출남을 내세우려면,
북쪽이 운용하는 ‘겨울 대대’나,
서쪽 황야의 들개인 ‘아히림’정도 되는 특수대급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베나즈의 군세는 특정적 강점이 아예 없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아니다.
베나즈의 군세에겐,
과거의 아이베리아에서나 볼 수 있었던 ‘투박함’이 있었다.
이건 좋게 말하면 무지막지한 거고,
냉정히 말하면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한 것이다.
그럼 이 투박함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그 답은 아주 쉽다.
이 군세를 누가 훈련 시켰는가?
베르융 오르테.
그는 좋게 말하면 기사로선 한없이 교과서적인 자라 할 수 있다.
그 말인즉, 베르융은 기사로서 지켜야만 하는 대원칙 아래 극한적으로 수동적인 사람이란 뜻이다.
이 수동적 사고는 장점보단 단점이 많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다수의 단점마저 뒤덮을 만큼 하나의 장점이 크다면?
베르융은 바로 그 하나의 큰 장점을 만들 만큼의 수동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 자체가 불가침적 모범이어서,
자연히 따르는 자들에게도 같진 않지만 비슷한 모범이 강요된 것이다.
그런 반강제적 강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투박한 결속력은 사실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다.
바로 지금 이곳 평야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처럼.
한바탕 충돌 후,
그 충격에 의한 복합적 후유증을 겪은 채 지지부진한 진형을 유지하고 있던 베가르트 욘테 측 병사들과는 달리,
베나즈 측 병사들은 묵묵히 쓰러진 아군 위로 다음 진형을 그리기 위해 움직였다.
다친 다리를 질질 끌고,
부러진 팔을 거두면서도 한 손으로 들고 있던 방패를 더욱 가다듬으면서.
상태가 아닌 신호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는 부품처럼.
베나즈의 군세는 그저 묵묵히 방패 대열을 상대에게 제시한 것이다.
바로 이런 투박한 인상이,
상대가 보기엔 협상조차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단호함이.
이 베나즈의 군세가 가진 것이었다.
이렇듯 곳곳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것이 다 보이는데도 다음 수를 착수한 그들의 모습에,
베가르트 측 병사들은 자연히 걸음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개인의 뒷걸음질과는 달리 다수의 뒷걸음질엔 한계가 있는 법.
서로의 뒷걸음질에 엉켜 혼란이 가중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전열에 방패를 내세운 채 방패 사이 틈바구니에서 창을 들이민 베나즈의 군세는,
척 ─ !
간결한 제식을 부린 채.
척 ─ !
한 걸음 한 걸음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오… 온다!”
“막아!”
“모여, 얼른!”
황급히 쥐고 있던 볼트를 쏘고, 창을 던지고.
허공에 철퇴를 휘둘러 보지만,
척 ─ !
척 ─ !
방패로 만들어진 벽은 그저 일정한 간격과 속도로 계속해 다가올 뿐이다.
이것은 적에게 있어 그야말로 공포였다.
다수가 되지 못한 하나가 받아들이기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였다.
척 ─ !
척 ─ !
방패 벽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다음,
척 ─ !
제식으로 묶인 베나즈 군세의 발소리를 뒤로 다른 소리가 연달아 이어지기 시작했다.
“끄아악!”
“어어어… 어억!”
“아악!”
찔리고, 짓이겨지고, 그 상태로 꿰인 채 뒤로 계속해 밀려나는 그들의 아우성들.
그 아우성이 들리기 무섭게,
방패 벽 너머에서 덧대어지듯 더 많이 내세워지는 창.
그대로 베나즈의 군세가 적들을 쭉 밀어붙이나 싶었으나,
베가르트 측의 군세가 갑자기 벽을 향해 쏟아지듯 일거에 달려들었다.
죽음의 향기를 맡은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죽음의 향기를 맡으면 강해진다.
이들의 거센 반발에 방패 벽에 균열이 일었다.
그러나 베나즈 측 군세는 정말 지독하게도 그 특유의 투박함을 드러내었다.
만들어진 공백을 육탄으로 틀어막은 것이다.
날붙이가 드세게 찔려 들어와도, 이들 육탄을 자처한 자들은 이를 악문 채 벽의 일부가 되었다.
그렇게 다시,
베가르트 측의 군세가 밀리기 시작한다.
그 밀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하지만 베가르트 온테는 이들의 처절한 후퇴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미에서 자신이 이끄는 기사들과 쐐기 모양의 돌격 진형을 꾸린 채로.
* *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밀고 들어와라.
베가르트 욘테는 눈을 번뜩였다.
그 번뜩임이 어찌나 맹렬한지, 매 부리 모양의 특이한 투구 너머 바깥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군사적으로 베나즈 측이 이길 것은 진즉에 알고 있다.
하지만 전쟁의 마침표는 군사로 찍는 것이 아니다.
이 아이베리아에선 대부분의 마침표가 기사라는 존재로서 찍힌다.
명예라는 이름의 결투가 아니면,
전쟁 과정에서 이뤄진 기사의 죽음으로써.
결국엔 그것만이 전쟁을 끝마칠 수 있다.
방패 진형은 전진을 거듭할수록 그 내구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띠고 있다.
전진 내내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그 방패를 전진시키는 것이 두 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베가르트는 방패 벽이 더 전진할 수 있도록 전방 배치한 군세를 방치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가자, 나의 화살대, 나의 깃대야. 나라는 화살촉이 저들의 심장에 닿게 해 다오!”
베가르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요란한 피리 소리가 울린다.
동시에 방패 벽에 짓이겨지던 군세가 양옆으로 갈라진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
시위를 떠난 활처럼 앞을 향해 쏘아진 쐐기 진형의 기마 돌격.
그 선봉엔,
[6년, 마르판타지]
과거 칠기사 중 하나인 베가르트 욘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