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묵시록 (3)
“칠기사라…,”
어느 늦은 밤.
공무로 인해 늦게까지 저택에 남아있던 조이와 자연스레 만들어진 자리.
그는 내 질문을 속으로 몇 번이고 곱씹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도 잘 모릅니다.”
“잘 모른다니요?”
조이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빽빽이 꽂힌 책장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한낱 서기였을 뿐입니다. 듣고 보며 증언하는 자가 아닌, 읽고 쓰며 기록하는 자였을 뿐.”
이윽고 그가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래서 그들에 관해 읽고 쓰며 기록한 게 있지 않겠느냐고 물으시겠죠. 네, 그들의 행적이 제 손을 거쳐 기록화된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는 이어 내 옆 빈 의자 뒤쪽으로 다가와 등받이에 양손을 얹은 채 말했다.
“읽어드립니까?”
밤마다 누이가 작은 세상을 들고 와 내게 들려줬던 때가 생각나네.
묘한 두근거림에 부응하듯 나는 얼른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다시 의자에 앉은 뒤,
팔짱을 낀 채 몇 분 동안 골똘히 생각한 끝에 내게 읽어줄 첫 문단을 소개하듯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당시의 계보입니다.”
* * *
아무래도 종이에 적으면서 설명하는 게 더 이해가 쉬울 것 같군요.
에르앵
-오른손, 통칭 ‘집행’
-집행자 : 맥레인 베나즈.
-집행 부관 : 베르융 오르테.
-왼손, 통칭 ‘기록’
-서기장 : -
-서기부장 : 조이 크레비디
기사왕 직하, 통칭 ‘칠기사’
-사자 레이온
-겨울 앵거스
-환상 베가르트
-완력 테티르
-고요 라힘
-요람 빌
-무색 엠프리오
적고 보니 짧군요.
이것이 아이베리아 중앙을 관통한 역사입니다.
바꿔 말하면 짧은 만큼 나열된 하나하나가 굵직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란 방증입니다.
이제부턴 부연 적인 설명을 할 차례로군요.
기사왕 직하엔 많은 기관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 독자적 관철의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
칠기사로 명명된 그들 모두 독자적 군사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는 소립니다.
아예 분리된 독립 조직이라고 보셔도 무방할 정도로요.
그래서 당시 서기였던 저조차도 누군가의 기록물을 통해서만 칠기사와 관련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겁니다.
…,
그런데 공, 칠기사에 익숙한 이름이라도 발견하신 겁니까?
아까부터 시선이 한쪽에 고정되어 있어서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냥…, 막연히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름이 있어서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이 칠기사로 명명된 자들은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독자적 군사권을 쥐고 대대적인 정복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그들 하나하나의 영향력이 왕관에 버금갈 정도였지요.
이렇게만 들으면 꽤나…,
기사왕이 과격해 보이는 것도 당연할 겁니다.
하지만 당시 중앙을 하나로 묶기 위해선 충격과 폭력이 필수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기사왕이란 단어 뒤에 과격함이란 단어가 어울린다고 느끼실 테지요.
사실 많은 이가 착각을 합니다.
이상은 정의와 동의어일 거라고 말입니다.
아니요,
이상은 정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상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편의적인 것에 가깝습니다.
기사왕은 그걸 이해했기에 타인의 공감이 필요했고,
그 공감을 위해 대의라는 이름으로 자기희생을 한 겁니다.
이상에 뒤따를 것들을 모두 짊어지기로 한 거지요.
…, 아마도 맥레인은 기사왕과 함께 하며 그 부분을 닮게 되었나 봅니다.
어쨌든 기사왕이 제시한 파격으로 인해 공감이 덧대어지고 공동의 이상이 완성됩니다.
정말 냉정히 말해서.
에르앵 집권 후기에 들어선 시점에 중앙 통일은 단지 시간문제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저만이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보이십니까?
제가 적은 것들 가운데 유일하게 공백인 부분 말입니다.
네,
바로 서기장입니다.
기사왕의 오른팔, 집행 다음으로 강력한 서열을 갖고 있던 건 기록으로 명명된 왼팔이었습니다.
집행이 기사왕의 결정을 외부적으로 표출하던 부서라는 걸 생각하면,
외부적 행보 없이 내부적으로 묵묵히 일을 수행하던 기록이 갖고 있던 힘은 잠재적이었을 뿐 집행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을 겁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당시 서기부장이었던 저조차도 서기장의 얼굴을, 그 이름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기록 내 서기장과 서기부장은 아예 다른 분파라고 생각할 정도로 분리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수수께끼와 같은 인물이 어느 날,
처음으로 대외에 드러났습니다.
‘실종’으로서 말이지요.
그냥 사라진 겁니다.
애초에 서기장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 실종이란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마저 힘들더군요.
그리고 그것이 신호탄이 된 마냥,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마도 맥레인이 공께 들려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련의 사건들 말입니다.
세워진 이상이 무너져내린…,
딴 길로 샜습니다.
저는 아마도 매튜의 이런 부분을 닮게 되었나 봅니다.
항상 참지 못하고 샛길로 빠져나가는,
“…, 그립고 아련한 이름이네요. 하마터면 깜빡 잊어버릴 뻔할 정도로.”
그러게 말입니다.
자…,
칠기사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이들 개개인에 관한 것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 그 행적으로 이룬 업은 잘 알지요.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냉정히 생각해도 그들이 이룬 업은 말 그대로 전설이었다는 걸 말입니다.
기록상의 레이온은 전형적인 철인이었습니다.
그의 별칭이 ‘야전의 신’인걸 생각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사적 감각을 자랑했겠지요.
앵거스 역시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기계 같은 자입니다.
다만 유별난 인도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어 그 인품에 많은 깃발이 따랐다고 합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그다음은 베가르트인데…,
공께 친히 전서구를 보냈던 그 자 말입니다.
기록상 그는 레이온의 정 반대 격 인물이었습니다.
포괄적인 의미로 야전의 신이라 불렸던 레이온과는 달리,
그는 전형적인 무신, 야전 내 유일한 신으로 군림했던 자였으니까요.
모든 기록을 헤아린 저로선 그가 칠기사 내 무력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든다 확신합니다.
이런 기록도 있었거든요.
‘단신으로 두 개의 거점과 하나의 성을 점령함’
아무리 대단한 자라고 해도 저 일을 해내는 시간 동안 발휘한 인챈트의 힘을 유지할 순 없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공께서 더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베가르트로 인해 새겨진 저 기록의 상당 부분은 개인의 무력에 의해 쓰인 것이겠지요.
테티르 경은 특유의 완력과 그 완력을 위시한 인챈트의 무시무시함으로 유명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본능적 감각일 겁니다.
단적인 예로 기록 대부분이 대대적 전투 경과가 아닌, 우회 및 중요 목표 제거가 주류일 정도였으니까요.
라힘은…,
공, 개인적으로 저는 그가 지금 살아있지 않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기록들은 모두 역전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역전이 한 줄짜리 책략으로 이뤄졌지요.
저는 재해를 펼치는 기사보다 이런 자가 더 무섭게 느껴집니다.
지금 시점에 살아있다고 한다면, 부디 적이 되지 않길 바라고 있습니다.
다음은 빌입니다만,
이자는 협상의 달인인지 전투보다 거래를 통한 합의로 쟁취한 승리가 대부분입니다.
역설적으로 피해 없는 진정한 승리를 가장 많이 쟁취한 자이기도 하죠.
마지막으로 엠프리오는 전대 칠기사에 이어 막 임명된 기사였기에 당시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습니다.
이 정도면 공께서 해주신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당시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태양은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 위로 영원히 군림하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 대부분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을 것이고,
지금 떠오른 태양의 얼굴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들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시지요?
‘절대’란 건 없다는 말 말입니다.
* * *
그날 밤을 되뇌어 보았다.
그리고 그 되뇜을 바탕으로 저 멀리 다가오는 기마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조이의 그 말은 진정 거짓 하나 없는 진실이란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전방을 향해 나아가던 방패 벽을 문자 그대로 찢으며 나타난 수십의 기마대.
그 기마대의 꼭짓점에 맞물려 있는,
검은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
매 부리 모양의 투구 뒤편으로 노출된 검고 긴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베르융의 것과 비슷한 터무니 없는 크기의 쯔바이헨더를 앞으로 치켜세운 그의 모습은.
진정 무신이라 불릴 만큼 위압적이었다.
그를 위시한 기마대의 독주에 반사적으로 기사 가버트가 자신의 기마대 서른을 이끌고 나아갔다.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창대에 푸른 기운이 너울거렸고,
그 기운은 곧,
[27년, 프리스모스]
[흘러버린 고산의 고인 바람]
주위에 압도적인 고압을 펼쳤다.
그 고압은 귀를 기반으로 하는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다.
침묵,
침묵을 통한 방향감각의 손실.
그 손실로 인한 인지의 부조화.
부조화의 따른 혼란.
쏜살같이 달려나간 가버트의 기마대가 그렇게 마주 오는 베가르트의 기마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렇게 몇몇 말이 허공에서 한 바퀴 구를 정도로 크게 맞부딪혔지만,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지만.
어느샌가.
베가르트는 홀로 내 바로 앞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놓친 게 아니다.
단지 기마대끼리의 충돌 직전, 그는 이미 그곳에 있던 것처럼 나타났을 뿐이다.
* * *
성가신 놈이 온다.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지.
장악형,
그것도 감각을 무력화시키는 쪽이로군.
…,
꽤 거물이 낚였다.
저놈이 베나즈 놈 지척에 있었으면 골치가 꽤 아팠을 텐데 말이야.
나를 따르는 기마대 정도라면 저놈의 발을 묶는 패 정도론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기마대를 동원한 이 돌격은 저 베나즈 놈에게 있는 패 몇 개를 거두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내 목적은 단 하나,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베나즈 놈에 다다르는 것.
온다.
베나즈의 깃발을 단 기마대 놈들이.
벌써 귀가 먹먹해지려 하는군.
임박했다.
놈들과의 충돌이.
그럼 이쯤에서…,
[6년, 마르판타지]
[방랑민족을 멸절시킨 황야의 장난]
충돌 직전,
내가 가진 인챈트를 휘두른다.
그것은 공간을 왜곡시킨 굴절이자 신기루.
수천수만의 눈을 동시에 속여 절벽 아래로 떨어트리게 한 환상.
나는 이 환상을 휘둘러,
나와 베나즈 놈 사이의 거리를 왜곡시킬 것이다.
나의 애검, 발라다를 전방으로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나뭇가지로 수면을 긁는 것처럼, 그 휘두름에 맞춰 일렁이기 시작하는 공간.
이내 나와 베나즈 놈 사이의 풍경이 반쯤 접힌 모양새로 변하기 무섭게,
고삐를 치달아 달려나갔다.
그와 동시에 뒤에선,
퍼벅 ──── !
막 내 기마대와 베나즈 측 기마대가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충돌음도 왜곡시킨 공간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나는 이미,
내가 의도한 위치에 도달해 있었다.
왜곡으로 반쯤 접은 길 위를 달린 지 십수 초.
지금 내 앞엔 베나즈 놈과 그를 수행하는 자들이 나열되어 있다.
내가 가진 인챈트의 성질은 허상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그 허상을 휘두르는 나는 실제한다.
보는 자에겐 선명한 신기루이나, 그 신기루를 통해 나타난 나란 존재는 실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능력.
나라는 재해.
“베나즈!”
이윽고 나는 검을 치켜세워 한 점을 가리켰다.
그 점에 맞물린 이는 나와 같은 칠흑의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래 맺힌 것은 영롱한 잿빛 눈동자.
앳되고 아름다운,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성인의 모습을 한 남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이상향을 느끼게 하는 그자에게,
나는 한결같은 결심을 관철했다.
“베가르트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