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25화 (325/365)

325화. 묵시록 (4)

풍기는 분위기는 분명 까마귀다.

그러나 생긴 것은, 그리고 내뿜는 기세는 맹금에 가깝다.

베가르트 욘테,

그의 첫인상은 그러했다.

자신의 키보다 큰 검으로 나를 겨눈 채 그는 그대로 안장 위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나를 수행하고 있던 여러 인원이 무기를 뽑아 들었음에도 베가르트의 시선은 오롯이 나만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 그를 따라,

나도 안장 위에서 내려왔다.

“어차피 피할 수 없음을 너도 알고 있겠지.”

베가르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아니, 피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군?”

그는 어렵지 않게 내 진의를 파악했다.

덕분에 나는 그를 상대로 숨길 것이 없다고 쉬이 판단 내릴 수 있었다.

나에 대한 감상을 그대로 열거하듯 내뱉는 그를 보면,

적어도 뒷배를 끼고 거대한 꿍꿍이를 꾸리는 자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무섭다.

그의 목적의식이 그만큼 뚜렷하다는 뜻일 테니까.

아마도 테티르 경이 보였었던 맹목만큼 뚜렷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베르융 오르테란 촘촘한 거름망이 있었다.

덕분에 당시의 나는 한바탕 격전을 치른 후의 테티르를 상대로 고전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나는 베나즈에 덧씌워진 오명이란 신기루를 진실로 여기고 쫓아왔으면서,

동시에 온전한 자를 마주하고 있다.

나는 그런 그와 맞서야 한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상황은 내게 또 다른 증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걸.

지금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나를 뒷받침해주는 자들에게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람비에서 증명했던 0처럼,

공표식을 통해 일으켜 증명했던 베나즈의 깃발처럼.

아이베리아의 디안으로서 행하는 증명.

내 표정을 읽었는지, 베가르트는 매부리 투구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살피다가.

“나 베가르트 욘테, 디안 베나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일대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에 대해 나는 짧게 대답해주었다.

“그 결투에 응하겠다.”

* * *

투구를 쓴 뒤 안장 위에 올라타면,

마주 서 있던 베가르트 역시 자신의 말에 올라탄다.

이윽고 나란히 말을 몰아 인적이 드문, 그러나 일대 모두가 목격자가 될 수 있는 평야로 향했다.

방금 성사된 결투로 인해,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투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직전까지 사선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길 하고 있던 병사들은 이 결투로 인해 약간의 안도를 얻은 듯 보였지만,

반대로 결투 결과에 따른 두려움 역시 느끼는 듯 보였다.

그렇게 한참 말을 몰아 드넓은 평야에 멈춰 선 나는,

베가르트는,

안장 위에서 내려와 각자 말의 엉덩일 때려 쫓아낸 뒤 곧바로 대치했다.

이렇게 단독으로 마주하고 보니,

그의 무시무시한 기세가 절절히 느껴졌다.

그의 갑옷은 나와 같은 검은색이지만, 그 특유의 흉흉한 기운이 더해지니 나의 검은색이 가짜로 보일 정도였다.

그런 상대인 거다.

언제나 압도함으로 끝났던 일련의 싸움이 아닌,

지금 상대는 그야말로 동등으로 빚어진 바탕 안에서 싸우는 거다.

베가르트는 거대한 자신의 검을 땅에 꽂은 뒤, 십자에 가까울 정도로 큰 가드에 팔꿈치를 댄 채 말했다.

“몇 마디 말보다 때로는 한 번의 부딪힘이 더 큰 이해를 낳는 법이지.”

직전까지 과열된 분노로 일관하던 상대가, 결투를 앞둔 지금 겨울만큼 차갑게 식어있다.

떨린다.

심장이 뻐근해져 온다.

그러나,

“그 말에 동의한다.”

나는 애써 담대하게 대답했다.

투구에 가려져 있어 베가르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내 대답에 그는 아마도 활짝 웃고 있었을 거다.

느낌이 그랬다.

그는 이제 땅에 박아 넣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에 맞춰 나도 새비안을 뽑아 겨눴다.

상호 간 이빨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경직되어버린 일대 기류.

덕분에 숨은,

흡. 흡.

절로 가빠져 왔고.

그에 따라 심장은 뻐근함을 뛰쳐나와 상체를 울릴 만큼 빠르고 크게 뛴다.

그리고 그 박동을 반주 삼아.

막,

날카롭고 쨍한 연주가 시작되었다.

* * *

말 그대로 매와 같이,

베가르트는 단박에 땅을 박차 디안 쪽으로 날아들듯 다가왔다.

그에 맞춰 디안이 한쪽 발을 뒤로 쭉 뺀 채,

서로를 향해 은빛 궤적을 내밀었다.

그렇게 맞물린 은빛 궤적 사이로 터져 나오는,

─── !

시린 신음.

그것은 일반적인 검들의 울음이 아니었다.

이어 터지는 이질적일 정도로 밝은 섬광.

그리고,

후욱 ─── !

맞부딪힌 검 사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후폭풍.

한 합이다.

단 한 합 만에 둘의 무대였던 평야 일대는 뒤집혔고 그 위에 누워 있던 낙엽들 모두가 분쇄된 채,

잿빛 눈처럼 흩날렸다.

그 메마른 눈보라 사이에서 둘은 다음 수를 착수했다.

더욱 사나워진 검격과 검격.

사이 공간에 아로새겨지듯 점점이 찍히는 불똥과 섬광.

서로가 한없이 첨예하지만, 반대로 그런 첨예조차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둘 모두가 치밀하다.

끼익 ───

날과 날이 맞물린 채 미끄러져 은빛 분수를 터트리고,

캉!

이어 짧고 굵게 부딪힌 검들의 굶주린 배곯음 소리가 울려 퍼진다.

디안의 검은 베가르트가 그린 궤적 위를 올라타듯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둘려졌지만,

그 곡선이 유의미한 결실에 도달하기 전에 베가르트의 궤적이 또 한 번 그려졌다.

검의 궤적 자체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디안의 그 검술을,

베가르트는 자신의 육체적 강력으로 메꾼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베가르트는 속도를 더욱 높여 디안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아직까진 둘 사이에 인챈트의 힘이 발휘되지 않았건만, 베가르트의 그것은 작은 돌풍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속도전으로 번지면서 충돌의 단음이 마치 장음처럼 들릴 정도까지 이르자.

둘 사이에 하나의 치우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치우침 속 밀리는 쪽은,

베가르트였다.

“음…?!”

저도 모르게 작은 신음을 내뱉은 베가르트는 조용히 몸을 뒤로 물려야만 했다.

기세를 올려 속도를 높인 것은 분명 베가르트 본인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저 기묘하기 짝이 없는 검술에 주도권을 다 내줘버리고 있었던 거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디안의 그 검술이 가진 파급을 금세 알아내었다.

평생 검을 잡고 살아왔던 자이기에 할 수 있었던 통찰이었다.

그렇게 그는 디안이 가진 검술에 대해,

순수히 경탄했다.

증오의 대상이니 뭐니를 떠나서,

저 검술 만큼은 찬사의 영역 안에 두어야 한다.

검날을 쓰다듬듯 말도 안 되는 치밀한 각으로 빗겨 휘두르는 검술은 그 역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디안의 검술은 몸이 반쯤 잠기는 얕은 호수와 같다.

문제는 호수 곳곳에 아주 깊은 곳이 있다는 것이다.

얕은 호수 안에 들어와 신나게 검을 휘두르다 보면 어느새 전신이 잠긴 채 수중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꼴이 되어버리는 거다.

디안의 검술은 그런 것이다.

천부적.

그야말로 천부적 재능.

능히 베나즈라는 이름에 걸맞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에 도달한 베가르트는,

되려 기쁘게 웃었다.

왜냐하면,

드디어 자신의 천부적 재능을 부딪쳐 볼 상대가 나타났으니까.

* * *

[6년, 마르판타지]

[방랑민족을 멸절시킨 황야의 장난]

내가 가진 재해는 허상이자 환상이며 왜곡이자 신기루다.

그리고 나는 이 변칙적이기 짝이 없는 재해를 통해,

비전을 만들어냈다.

‘관측의 망실’

내가 가진 재해, 마르판타지로 왜곡시킬 대상은 다름 아닌 나의 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검날 부분이다.

그렇게 마르판타지로 인해 왜곡된 검날은,

상대가 관측한 검에 대한 정보를 모두 망실시킨다.

왜곡을 입힌 나의 검 ‘발라다’가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진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마치 검을 물속에 잠근 뒤 그 위에 파문을 일으킨 것처럼.

혹은 검 위에 거대한 볼록 유리를 얹어놓은 것처럼.

예상대로 투구 속에 점점이 빛나던 디안 베나즈의 눈빛이 당황으로 물든 게 보였다.

발라다의 검날을 읽고 얻은 이해를,

모두 다 잃었으니 어쩔 수 없겠지.

그뿐만이 아니다.

[접안]

재해 마르판타지의 기억.

그것을 통한 공간 자체의 왜곡까지 더해져.

나는 언제든지 디안과 대치한 그 사이의 공간을 접거나 펼쳐 거리 적 이점을 독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허상 위에 군림하는 실체,

베가르트라는 환상.

그렇게 공간을 접어 한 걸음 만에 디안의 턱 아래로 접근한 나는 아래에서 위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보기엔 엿가락처럼 휘어진 검날이 디안에게 닿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보이지만,

보이는 모양은 허상일 뿐,

실체는 곧게 뻗은 검날 그대로다.

덕분에 디안은 내 검에 뒤늦게 반응했고,

그 반응의 결과는.

퍼억 ──── !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디안이 뒤로 나자빠졌다.

그의 왼쪽 어깨 갑은 찌그러졌고, 투구의 턱 부분엔 붉은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헉… 헉…!”

격통에 시달리고 있을 텐데도,

용케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거친 숨만을 내쉬는 그는.

나를 황홀하게 했다.

극상의 상대로다.

그래, 베나즈라면 그래야지.

끝내 내가 물리쳐야 할 상대라면 응당!

비틀거리며 일어나 자세를 고친 그는 다시금 검을 부여잡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 내 검은 아까완 다른 반대 방향의 긴 초승달 모양으로 왜곡되어 있었고,

동시에 나와 그 사이 공간을 약간 펼쳐 내 검 끝만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정도로 벌려놓았다.

역설적이지?

너의 그 기민한 육안적 감각이 지금은,

널 수렁에 빠트리는 환시가 되어있으니까.

그렇게 정확히 디안의 턱 아래를 가로지르는 궤적을 그리며 검을 휘두른 순간.

놈은 오히려 얼굴을 들이밀어 자신의 투구로 내 검 끝을 읽어냈다.

물론 그에 따른 대가는,

카각 ──── !

처절했다.

놈의 고개가 크게 꺾였다.

그에 따라 상체 역시 크게 휘청거린다.

이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얼른 놈에게 근접해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런데,

그렇게 상체가 휘청거리며 쏟아지려는 와중에도.

놈은 찌르며 들어온 내 검 끝 위로 자신의 검을 얹어냈다.

그리곤 굶주린 짐승이 사냥감을 발견한 것 마냥.

내 검을 미끄러지듯 타고 들어왔다.

최고다.

맥레인, 네놈과 겨뤄보고 싶었는데.

이렇게라도 조금이나마 충족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 턱밑을 향해 정확히 쇄도해 들어오는 디안의 검.

나는 발을 뒤로 물려,

미리 길게 펼쳐놓은 공간을 통해 한 번에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허공에 대고 보기 좋게 검을 휘두른 디안은 제풀에 지쳐 바닥에 처박혔다.

이쯤 되니 입이 근질거린다.

“제 아비의 인챈트였다면 진짜로 날 베었을지도 모르겠군.”

그 말 그대로,

맥레인의 인챈트를 위시한 그의 검술이었다면.

나는 분명 아까의 공격에 당했을 것이다.

그 반증으로 이 말을 하는 와중에 목 뒤로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네가 가진 그것은, 그 눈은 휘두르기에 너무나 버거운 것이다.”

다시 한쪽 무릎을 딛고 일어서려는 그를,

나는 내려다보며 일갈했다.

“아직 그 눈에 대한 한 줄의 역사도 이해하지 못했지? 그렇다고 대놓고 전개하기엔 부담이 될 테지. 나를 상대로 그 거대한 걸 펼쳤다가 후에 펼쳐야 할 상황에서 펼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과욕이었다, 젊은 베나즈여. 나를 통해 네놈을 증명하려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어.”

내 말에도 그는 묵묵히 자리를 털고 일어서 다시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담담히 대답했다.

“난 증명에 목숨을 걸었다. 그깟 과욕 따위가 아니라.”

사타구니가 저릿하다.

잘도…,

에르앵의 것과 비슷한 말을 내던지는군.

“0이 아닌 베나즈의 이름으로서 증명하길 선택했다? 찬탈을 기반에 둔 깃발이긴 하지만 그것만큼은 존중받을 만하군.”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너에게 존중이 담긴 죽음을 주기로.”

이에 디안은 양손으로 검을 고쳐잡아 나를 맞이했다.

다시 휘둘러진 왜곡된 나의 검, 발라다.

시시각각 왜곡 점이 변해 그 모양을 종잡을 수 없으나 실체는 곧게 뻗은 검 그대로인 그것은,

어떻게 보면 상대의 육안 그 자체를 베는 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발라다가 그의 목에 다가가는 그 순간,

디안의 투구 속 눈빛이 일순간 사라졌다.

동시에 휘둘려진 그의 검이 내 검 위에 올라탔고,

그대로 물 흐르듯 미끄러져 내게 다가와…,

아니, 나에겐 네가 번복할 수 없는 거리 적 이점이 있다.

내 뒤로 미리 길게 늘어트려 놓은 공간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그에게서 멀리 떨어진다.

다시 한번 그의 공격이 무력화된 것이다…,

?

놈은 아직 그대로 내 코앞에 있다.

안일했군.

지척에서 검을 휘두른 게 아니라 내가 뒤로 물러날 것을 상정하고 그대로 계속 달려간 것이었어.

이건 비전의 이점을 너무 믿고 단순해진 내 탓이군.

디안의 검이 정확히 내 턱밑을 가격한다.

검의 예기가 어찌나 살벌한지, 그대로 투구를 뚫어 내 턱뼈 근처를 베어버렸다.

충격에 휘청거린 상체,

베어진 투구 틈새로 흘러나오는 피.

아,

승부의 저울은 다시 수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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