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묵시록 (5)
그의 검이 내 육안을 베어버렸다.
딱 그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가 휘두르는 모든 것은 거짓이며 동시에 진실이었다.
믿어서도 안 되지만 믿지 않으면 당하는 그런 모순덩어리.
그게 바로 베가르트 욘테였다.
문제는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의 검.
저 거대한 쯔바이헨더는 내 새비안에 밀리지 않는 강성을 자랑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그가 가진 검술은 또한 내가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것이다.
내 검이 맥레인으로서 완성되었단 걸 생각하면,
즉 베가르트의 검술 역시 비전에 해당한다는 뜻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구조상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것이 가장 이득인 거대한 검을 가지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베는 것을 주력으로 삼은 검술이라니!
그가 가진 검술조차도 모순이었다.
그리고 그 검술 적 모순은 살 떨릴 만큼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매부리 투구,
그 아래 균열 사이로 붉은 실을 흘리며 다가오는 남자.
“으음!”
짧은 기합을 끝으로 거대한 검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올라온다.
지금 그의 검은 길게 늘어난 초승달처럼 한없이 왜곡된 모습을 갖고 있다.
그 모습을 인지하고 믿는 순간,
나는 그의 저 위력적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대처하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그가 공격을 감행하는 그 순간부터 눈을 감아버리는 것.
말 그대로 도박에 가까운 수였지만, 그 도박 안에서 한 가지 만큼은 얻을 수 있다.
왜곡된 검의 모습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결과 하나만큼은!
그렇게 두 눈을 감은 채 새비안을 크게 휘둘렀다.
카아악 ───── !
두 검날이 비벼 교차하며 지리멸렬한 비명을 지른다.
무신이라는 호칭에 걸맞은 괴력.
그 괴력이 자아낸 선풍에 대항한 것만으로도 나는 뒤로 멀찍이 날아가 버렸다.
아니, 여기서 끝이 아닐 것이다.
급히 눈을 떴다.
역시.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일그러져 있다.
그리고 그 일그러진 풍경 가운데 가장 선명한 모습을 가진 베가르트는,
이미 내 코앞에 다가온 상태였다.
신기루로 풍경을 접어 한달음에 내 쪽으로 달려온 것이다.
가진 인챈트의 완벽한 이해로서 완성된 비전.
그야말로 한계 따위가 없는 마법에 가까운 이능이다.
아직 몸의 균형은 베가르트의 검격으로부터 회복되지 않은 상태다.
이런 내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는 곧바로 긴 팔을 뻗어 내 목을 붙잡았다.
“훅…!”
거대한 매 발톱에 꿰인 듯, 목에 휘감겨 들어오는 우악스러움에 몸속 남아있던 숨이 빠져나왔다.
이내 베가르트가 나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렇게 불쑥 당겨진 내 눈앞엔,
그의 거대한 검의 가드가 놓여 있었다.
퍽 ─ !
아찔해진 머릿속.
투구 눈구멍 밖 세상은 빙빙 돈다.
아마도 가드에 맞는 그 순간 허공에서 한 바퀴 굴렀을 것이다.
그대로 바닥에 내쳐진 내 위로,
거대한 은빛 줄기 하나가 쏟아져 내린다.
그 직전,
강하게 일어난 본능에 쫓겨 고개를 젖힌다.
키잉 ─ !
그렇게 젖혀진 머리 바로 옆에 그의 검이 살벌한 울음과 함께 꽂혔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나는 새비안을 땅에 꽂힌 그의 검날에 가져다 대었다.
보이는 것은 왜곡되어 있지만,
어쨌든 그 왜곡 안에 담겨 있는 실체는 그대로다.
그 실체와 맞닿아 있는 새비안을 통해.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해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가진 비전,
‘운명의 노래’
이미 이런 내 특성을 눈치채고 있었는지 베가르트는 얼른 땅에 박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놓치지 않는다.
아니 놓치지 않을 것이다.
팔꿈치로 땅을 박찬 나는 그의 검을 따라 일어섰다.
이런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 검을 뒤쪽으로 가득 당긴 베가르트였지만,
그 일련의 행동은 오히려 발견한 길 위에 서 있는 날 부추기는 꼴이다.
뒤로 당겨진 검을 따라간 새비안을 통해,
나는 그릴 수 있는 궤적 하나를 발견했고.
이내 발견과 동시에 그 궤적 하나를 충실히 그려냈다.
휘익 ─ !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휘둘려진 새비안.
그 궤적 끝에 맞물린.
카각 ─ !
베가르트의 흉갑.
그 두꺼운 갑옷이 종이 잘리듯 베어져 균열이 일었다.
놓치지 않고 그 균열을 향해 새비안을 찔러 넣었지만,
“… 헉!”
내가 찌른 것은 그의 빈틈이 아닌,
허공 일부.
어느새 주위 풍경은 길게 늘어진 채 일렁거리고 있었고,
베가르트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놈…, 무슨 모순을 휘두르는 거냐.”
차분함에 냉철함이 덧대어진 베가르트가 내게 말했다.
웃기다.
더한 모순을 두르고 있는 작자가 저런 말을 내뱉는다니.
이 말을 직접 내뱉어주고 싶었는데,
“후욱…후욱…,”
그럴 수가 없다.
그의 무력에 이끌리다 보니,
또 직전에 있었던 타격 탓에 지금 할 수 있는 건 숨을 몰아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투구 아래로 계속해서 피를 쏟고 있던 베가르트는,
태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눈 뜰 생각은 없는 것이냐?”
이어 그는 거대한 검을 치켜세워 나를 겨눴다.
“장고는 수 자체를 죽이기 마련이지.”
그의 말에,
막 숨을 고른 나는 자세를 고쳐 잡은 채 답했다.
“그러나 그 장고가 죽어가던 판마저 살린다.”
이런 내 답에 매부리가 살짝 기울어진다.
직후.
초 단위 만에 내 앞에 도달한 베가르트가 사신과 같은 모습으로 일갈한다.
“그럼 증명해 보아라 ─── !”
빠르다.
내 의식보다.
그가 자아내는 신기루는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저것을 재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지, 저것이야말로 지금 이 세상에 걸맞은 재해일 것이다.
다가온다.
물리적인 죽음이.
좌측, 하단.
본능으로 읽어내린 결론이 머릿속에 나열된다.
그 나열과 체결된 육체는 이성을 초월해 움직인다.
주위 바람을 허옇게 물들 정도로 치달은 베가르트의 검을 그렇게 맞받아쳤다.
쾅 ─ !
단순한 두 검의 부딪힘으로 나타난 것은,
재벌을 파산시킬 정도의 화약에 버금가는 폭음이었다.
일대가 일그러진다.
이제 흩날리는 것은 낙엽의 파편이 아니라 땅이 토해낸 토사물들이었다.
팔에는 욱신거림이란 얼룩이 져 있고,
전신 곳곳에 퍼져 있던 내 의지는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는 베가르트와 검을 나누고 있었다.
직전 있었던 거나한 충돌의 후폭풍이 채 가시기도 전, 그 근원지 중앙에서 나는 베가르트와 수 없는 교차를 나누었다.
───── !
검으로 나타낼 수 있는 모든 음이 한 단위 오선지 안에 그려진 듯 터져 나왔다.
내 검은 그의 궤적 위를 포개길 반복했고,
베가르트의 검은 포개진 내 검의 궤적을 지운 뒤 다시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길 반복했다.
이,
계속된 반복 속에서.
이제 내게 얼마 남지 않은 미량의 이성은.
한 가지 답을 도출해내었다.
그리고 내 본능에 일러 주었다.
알아냈다고.
베가르트가 가진 왜곡의 반복 점을.
그렇게 두 검의 다음 교차가 일어나기 직전.
나는 지금껏 장고 끝에 두길 망설였던 수를.
판 위에 탕 소리가 나도록 두었다.
[0, 마그나베노스]
새비안에 잠들어 있던 눈동자를 일으켰다.
동시에 내 정수리 위 하늘이 둥글게 갈라졌고, 그 갈라져 나타난 태풍의 눈은 내가 가진 오감에 녹아들듯 스며들었다.
베가르트라는 신기루의 다음 왜곡을 예측한 그 상태에서,
태풍의 눈이 담긴 전신으로 새비안을 휘두른다.
보아라,
이게 내 증명이다.
후우욱 ─────── !
휘둘려지는 새비안 주위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 일그러짐 안에 담긴 것은,
태풍의 눈 마그나베노스가 끌어당기고 있던 바람들 가운데 하나.
베가르트, 너는 태풍의 일각을 이겨낼 수 있는가?
그렇게 휘두른 새비안.
그 새비안으로부터 뛰쳐나간 마그나베노스의 파편.
그것이,
내 눈앞의 세상을 양단했다.
* * *
기사 가버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일대에 풀어놓은 그의 고압은 이미 휘발되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눈앞에 모든 것을 관제하는 눈이 떠졌기 때문이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가버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눈 앞에 펼쳐진 묵시록에 집중했다.
사실 집중하고 싶어도 쉬이 집중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도저히 실감할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이었으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래, 디안 베나즈의 검으로부터 폭발하듯 튀어나온 그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별들을 감싸는 고리에 버금가는 위풍이었다.
그만큼 검의 궤적으로 정형된 거대한 바람 줄기였다.
그리고 그것이…,
평야 저 너머 산의 봉우리마저.
베어버렸다.
그래, 보인다.
한 박자 늦게 저 멀리서 쏟아지는 산의 봉우리가.
산사태가.
진정 시야 끝에 맞물린 산에까지 닿은 것이다.
디안 베나즈, 그의 검격이.
* * *
벨리반즈 성.
그 내부 깊숙한 곳에 수놓아진 화려한 성관.
이러한 성관을 가득 수놓은 앙 실러 데우스의 깃발.
그 사이를 가로지르던 크녹스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저 멀리 펼쳐져 있는 풍경에 시선을 쏟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병사, 기사들 모두가 마치 뭐에 홀린 듯.
똑같은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어 모두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직 한 사람, 크녹스를 제외하고.
크녹스는 황홀경에 가득 찬 얼굴로 웃고 있었다.
“글글…,”
특유의 목젖을 끓이는 웃음소리를 내며 웃고 있는 크녹스의 두 눈동자 안에는,
석양이 내리쬐는 느긋한 풍경 가운데 검으로 그린 듯한 궤적으로 생성된 구름과,
그 구름 끝에 맞물린 채 실시간으로 무너져 내리는 산의 봉우리가 담겨 있었다.
직후,
크녹스는 병사들과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우리의 묵시록에 집중해라!”
그 우렁찬 벼락에 별안간 모두가 황급히 크녹스를 바라봐야만 했다.
“저편에 벌어진 묵시록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잖느냐?”
이어지는 그의 말에,
살짝 얼이 빠져있었던 눈빛들이 다시 본색을 드러내듯 번뜩였다.
이윽고 크녹스가 성관 중앙 복도를 지나쳐 그 끝에 있는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방금까지 우왕좌왕하던 벨리반즈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크녹스…!”
아랫입술을 벌벌 떨며 입을 연 벨리반즈에게,
크녹스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방 안 가운데 놓여 있는 의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게 무신경하게 보일 정도로 벨리반즈를 지나친 크녹스는 의자 앞에 멈춰 선 채,
그제야 뒤돌아 벨리반즈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벨리반즈, 아이베리아를 관통하던 수식이 뭔지 아나?”
그 말에 벨리반즈는 반지투성이인 두 손을 모아 조심스레 답했다.
“그게… 뭐지?”
그 대답에 크녹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자리엔 그에 걸맞은 힘이 필요하다.”
크녹스의 말에 벨리반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물질적 힘만으로 이런 자리를 차지하기엔 한계가 명확한 법이지.”
직후.
크녹스로부터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저 밝기만 한 어느 불빛 따위가 아니었다.
동공을 태우고, 살갗을 일그러트리며, 비명을 내질러야 하는.
그런 찬란한 빛이었다.
“아아악… 아아…!”
녹아내려 들러붙기 시작한 반지,
그 늘어 붙은 반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살점.
벨리반즈는 이렇듯 찬란한 빛에 처참히 녹아내렸다.
* * *
무지개.
그 칠색 찬란한 후광을 등에 업은 채.
한 남자가 서 있다.
아니, 하나가 아니었다.
막 그 맞은편에서 다른 한 남자가 일어섰다.
“그리웠다, 에르앵.”
반쯤 부서져 내린 매부리 투구.
그 안에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처연했다.
곧 그의 처연한 눈빛은 분노의 멍울이 되어.
“하지만 넌 에르앵이 아니야.”
소리쳤다.
동시에 그의 등 뒤로 피어오르기 시작한 칠색의 후광.
이윽고 거대한 검 발라다를 디안에게 겨눈 그는,
‘비전, 관측의 망실’
[실체의 연장]
기다렸다는 듯 가진 최강의 수를 꺼내어 들었다.
이윽고 그의 검날이.
문자 그대로 길게 늘어났다.
아니,
늘어난 건 검이 아니었다.
풍경.
그가 늘여낸 건 신기루로 잡아당긴 풍경이었다.
하지만 늘어진 풍경 속 길게 뻗은 검날은,
실체였다.
칠기사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무신의 결정체라 할만한 그 거짓 속 진실의 힘은.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던 디안을 향해…,
…,
검은 빗나갔다.
아니, 검은 제대로 뻗어 나갔지만.
그 선상에 있던 디안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빗나가 버렸다.
베가르트는 조용히 늘여놓은 풍경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직후.
그는 왜인지.
그대로 그저 뒤돌아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