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27화 (327/365)

327화. 묵시록 (6)

눈꺼풀이 걸쇠로 잠긴 듯 뻑뻑하다.

힘을 쥐어짜 눈을 떠 보려고 해도 그게 쉽지가 않다.

두 귀는 또 왜 이렇게 먹먹한지,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좋으련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온 신경을 손가락 끝에 집중했다.

움직이지 않는다.

석고를 뒤집어쓴 듯 단단한 껍데기 안에 속박되어있는 느낌.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온 신경을 손가락 끝에 쏟았다.

아,

손가락 속 힘줄에 내 신경이 깃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그렇게 온 힘을 쥐어짜,

까딱.

손가락 끝을 움직였다.

그 순간 온몸 구석구석에서 뼈아픈 경련이 일어났다.

먹먹했던 두 귀 역시 삐 거리는 이명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렇게 급작스레 생긴 몸의 이상에 반동하듯, 무거웠던 눈꺼풀 역시 번쩍 떠졌다.

“하…!”

짧게 터져 나온 숨과 동시에 확 트인 시야.

살갗 바로 아래서 꿈틀거리던 경련 역시 잦아들었고 귓속에 울리던 이명도 점점 작아진다.

자잘하게 일었던 파문이 다시 가라앉은 호수처럼.

금세 진정을 되찾은 나는 덜덜거리며 떨리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차 천장이다.

이를 증명하듯.

다닥다닥.

바닥을 수놓는 간지러운 편자 소리와,

드르르 텅, 드르르.

포장되지 않은 길 위를 구르는 바퀴의 요란한 준동이 오감을 통해 느껴졌다.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기울어진 상체에 미끄러진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내 검이었다.

직전까지 숱한 섬광과 불씨를 낳았었던 새비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에 잠겨 있었다.

반사적으로 바닥에 떨어진 검을 부여잡은 나는,

멍하니.

그저 멍하니 마차 뒤편에 이어지는 작은 행렬을 바라보았다.

행렬 위로 솟은 깃발은 베나즈의 것이다.

그렇다면…,

베가르트와의 결투 이후 이들이 날 수습해주었다는 말인데.

지금 이들은 어디로 가는 거지?

아직 전투가…,

마차 뒤쪽으로 상체를 빼려는 찰나,

말 위에 올라탄 기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공, 괜찮으십니까?”

갑옷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그 기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가버트 경, 전투는 어떻게 된 겁니까?”

직후 이어지는 내 물음에 가버트는 잠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더니, 식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고성 레자스 측에서 최종적으로 항복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엘르길 경이 그와 관련해 그들과 접촉하는 중이고요.”

“… 그렇습니까.”

가버트의 말을 들은 나는 다시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런 내 모습을 살피던 가버트는 눈치를 살피다가 조용히 마차에서 물러났다.

* * *

2대 베나즈의 검술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불합리라고 할 수 있다.

베가르트는 그렇게 정의했다.

불합리.

맞지.

인챈트로 완성된 자신의 비전을 2대 베나즈는 검술 하나만으로 상쇄하려 들었다.

그리고 개중에 몇몇은 진짜로 상쇄시켜버리기도 했다.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인지, 전사라 자부하는 자들이라면 모두가 다 알 것이다.

상대가 그리는 궤적 위에 올라타 그에 따른 비정상적 궤적을 그리며 역으로 공격해오는 검술.

딱 보아도,

맥레인이 작정하고 완성 시킨 불세출이다.

떨렸다.

베가르트는 지금 떨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에 의한 떨림이 아니었다.

전율.

과거 아이베리아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그 전율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2대 베나즈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결점이 존재하는 미완성품에 가깝다.

베가르트는 보았다.

직전, 거대한 창공의 눈을 뜬 채 달려들었던 그의 모습은 그가 닿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아직 그가 왜 아이베리아에 돌아와 베나즈의 깃발을 일으켰는지,

베가르트는 그 이유를 아직 모른다.

은연중에 생각나는 것은 두 가지.

찬탈자 맥레인의 존재하지도 않는 오해를 풀기 위함이거나,

…,

과거 한없이 이상에 가까웠던 기사왕의 자리를 이어가려 하는 것이거나.

전자는 모르겠다.

제아무리 설파한다 해도 베가르트 같은 인물이 설득될 리가 없지만,

2대 베나즈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만인을 이끌 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무리없이 절반 정도는 설파해 설득해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후자는 확실히 정의 내릴 수 있다.

절대로 도달하지 못한다고.

“맥레인, 도대체 너는 무엇을 한 것이냐.”

비틀거리며 저 멀리 보이는 고성을 향해 고삐를 잡아당긴 베가르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2대 베나즈는 마그나베노스와 관련된 역사, 그에 따른 기억조차 없이 태풍의 눈에 걸려 있는 바람 그 자체를 담아 검을 휘둘렀다.

무식하고 괴팍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지만,

그 천부적 재능을 자랑이라도 하듯 진정 태풍에 걸려 있던 바람 한 줄기를 담아 휘둘러 내었다.

그런데 직전,

이상한 것이 있었어.

베가르트는 분명 보았다.

재해를 실은 검을 휘두르기 직전,

그의 발 지척엔 검은 잉걸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잉걸불이 나타난 순간부터,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인력이 작용하는 게 느껴졌다.

어찌나 강한 인력인지 베가르트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두 발을 땅에 박아넣어야 했다.

2대 베나즈.

디안.

그에게 또 다른 인챈트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조차 모르게 내재 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본능 충실한 테티르 론바즈가 봤다면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어찌 되었든 그렇기에.

“실망스러운 미완성품이다, 맥레인.”

베가르트는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 떠도는 넋이 되었을 맥레인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 하소연은 그치지 않고,

“나도 참 실망스럽군.”

자신에게까지 향했다.

디안의 그 무지막지한 공격은 당연하겠지만 너무나 정확히 베가르트를 빗겨 나갔다.

물론 그 후폭풍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끝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사용한 뒤 전투 불능에 빠진 그를 베가르트는 확실히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자신이 가진 최강의 수로.

자아낸 환상의 결과물로 빚어낸 실체로서.

아니,

아니다.

베가르트는 그를 마무리하지 않았다.

그 정도 되는 실력자가 곧 디안이 쓰러질 걸 몰랐을까?

곧 쓰러질 걸 알았기에, 그래서 최후의 일격이 빗나갈 것조차 당연히 예상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최후의 일격이 빗나간 후에도 이어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을,

베가르트는 하지 않았다.

“에르앵, 당신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중얼거림이 이야기하듯,

디안이 쓰러짐과 동시에 과거 기사왕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때로는 운명을 흐르게 두는 것도 나쁘진 않네, 누군가가 애써 가로막지 않아도 가로막힐 운명은 무슨 수를 쓰든 가로막히는 결과에 도달할 테니까.’

그 이야기 직후 베가르트가 가로막히지 않을 운명이라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 대답이 참 묘하다.

‘그럼 가로막으려 애쓰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겠는가? 가로막히지 않고 끝내 범람할 운명이라면 말이야.’

…,

베가르트는 어느새 고성 앞에 도착해 있었다.

디안이라는 운명을 왜 흐르게 두었는가.

그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얼추 비슷한 결론을 내놓을 수는 있었다.

베가르트는 칠기사 내 무신이라 불릴 만큼 뼛속까지 무인이었지만,

여느 책사 못지않게 자신에게 냉철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내놓은 결론은,

그래, 이것 같다.

“내게 애증이란 게 남아있었나.”

퍽 하니 입꼬리를 올리며 웃던 베가르트는 다시 잿빛 어두운 안색으로 돌아와 열린 성문 너머로 말을 몰았다.

* * *

엘르길 마스.

티히트라의 발언가이자 베나즈의 기사.

그가 병사 스물과 함께 고성 레자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이동 내내 저 멀리 떨어진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러면서 간간이 황홀함과 기대감이 뒤섞인 미소를 짓길 반복했다.

그런 그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은,

저 멀리 봉우리가 무너진 산 쪽이었다.

아이베리아의 역사에서나 볼 법한 한 줄짜리 기록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역사에 버금가는 사실을 새긴 자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자다.

거기에 더해.

베나즈 가문의 집사부 일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빌로즈 가문의 가니아 님이다.

이 일련의 일들이 엘르길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묶여 흐르게 된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창대하겠는가?

그것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엘르길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를 따르는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람비에서도 그랬듯,

이번에도 자신이 섬기고 있는 베나즈 가문의 장자가 이 아이베리아에 자신을 증명했다.

섬김받는 자의 증명은 섬기는 자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명분이요 사기의 발판이다.

그리고 이렇게 올라간 사기는 곧 자부심이 된다.

해서 엘르길을 따르는 병사 모두가 2차 원정에 대해 주도적인 관심을 두고 있었다.

베르융 경께선 전투를 잘 하고 계실까,

테티르 경께선 적의 9부 능선을 지나셨을까.

하는 그런 관심으로써.

물론 이들 모두에게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직전, 의식을 잃은 상태로 귀환한 디안 베나즈를 목격했었으니까.

다행인 것은 기사 가버트가 디안 베나즈의 신변엔 이상이 없는 것 같다 장담했다는 거다.

이렇듯 병사들은 사건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엘르길은 이와는 반대다.

가버트의 그 장담이 떨어지기 무섭게 디안에 대한 걱정을 덜고 향후 펼쳐질 일에만 집중했으니까.

이윽고 그들 모두가 고성 레자스 앞에 도달했을 때.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하고 있던 다른 생각들을 모두 다 접은 뒤 하나의 목적의식으로 대동단결했다.

그리고 그 단결된 목적의식을 이끄는 것은 엘르길이었다.

직전까지 지었던 미소는 어디가고.

단호하면서도 냉철한 매력이 가득한 얼굴을 한 엘르길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고성 쪽으로 진입했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고성은 그야말로 이물에 가까웠다.

보기에 중구난방으로 건설된 성벽들은 사이사이가 미로처럼 얽혀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나부끼는 바람의 세기가 웬걸, 한 해 가운데 맞을 수 있는 가장 강한 바람을 가볍게 상회한다.

“경…, 왜 이렇게 조용할까요?”

병사의 물음에 엘르길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엘르길이 불안감을 드러낸다면 그 두려움이 병사들에게 번지게 될 테니까.

애초에 처세술에 능통한 엘르길이 그런 실수를 범할 리도 없다.

“고성이라 그런지 침묵도 무겁게 느껴지는구나, 어찌 되었든 저들이 항복 의사를 밝힌 이상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다.”

그의 독려에 병사들은 묵묵히 따랐다.

이내 켜켜이 쌓인 성벽을 지나 마주친 거대한 성문.

그 성문은 아주 좁은 틈새를 드러낸 채 열려 있었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성문 앞에 누군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존재를 확인한 순간,

엘르길을 따르던 병사들은 심적으로 와르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었다.

“… 베가르트 경.”

마찬가지로 당황한 엘르길이 성벽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의 부름에,

갑옷조차 입지 않은 채 피칠갑이 되어있는 베가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응했다.

“누구냐?”

윤기 가득한 검은색 장발.

창백한 얼굴에 깊게 파인 눈두덩이까지.

그야말로 사신의 인상에 가까운 그의 말에 엘르길은 마른침을 삼킨 직후 가슴에 손을 얹고 기사의 예를 갖췄다.

“베나즈의 엘르길 마스입니다.”

“레자스의 항복을 확언받기 위해 왔군?”

“그렇습니다.”

엘르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가르트는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엘르길 쪽으로 던졌다.

툭.

하고 묵직하게 떨어진 그것은,

“히… 히이…!”

“우… 왁!”

“웩!”

대충 서로의 머리카락으로 엮은 다섯 구의 머리였다.

“아쉽게도 말로 듣진 못하게 되었군,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항복의 의사는 전달되었겠지.”

베가르트,

그가 성에 돌아오자마자 레자스의 귀족 일파 모두를 몰살시킨 것인가?

이젠 당황을 숨기지 못한 엘르길이 급히 물었다.

“어찌…?”

이에 베가르트는 심드렁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진작에 처분되었어야 할 놈들이다, 기사왕의 등에 비수를 꽂는 대가로 이곳에 둥지를 친 뻐꾸기 새끼들이니.”

곧이어 베가르트가 특유의 갸웃거림과 함께 되묻는다.

“이편이 그쪽에도 더 쉽지 않나?”

“… 경께서는 어찌할 생각이신지요.”

“나는 떠난다.”

베가르트는 히죽 웃었다.

“그 어떤 깃발이 내 이름을 거부하겠는가? 나는 어딜 가도 그곳의 전신이 될 수 있다.”

그야말로 당찬 전사의 표본.

기세에 짓눌린 엘르길의 이마엔 어느새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다시 만나게 되겠지. 직전처럼.”

그 말을 끝으로,

베가르트는 말머리를 돌려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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