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새 장
“보고드립니다.”
간이로 차려진 천막.
그 안으로 속속들이 찾아온 병사들.
이 중 하나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보고를 잇는다.
“베르융 경께서 세 개의 관문을 모두 격파하시고 현재 발치아 공략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가버트와 엘르길을 비롯해 자리에 있던 병사들에게서 나지막한 감탄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병사의 보고가 끝난 직후 뒤따라 들어온 또 다른 병사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는다.
앞의 병사와는 달리 그는 격전의 흔적이 온몸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보고드립니다. 테티르 경께서 갈로샤를 격파하였습니다.”
직후 이어진 보고에 곳곳에서 커다란 탄성이 흘러나온다.
“벌써…?!”
“그 험준한 숲에 있는 성을?”
“세상에!”
나 역시 마찬가지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예상의 범주를 넘어선 속도다.
어떻게 보면 테티르 경이 휘두르는 그 바람에 걸맞은 것일 수도 있겠다.
“다만 전투로 인한 손실이 매우 커서 정비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껏 더 초췌해진 병사에게 엘르길은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수고했네, 가서 쉬게.”
이내 보고를 마친 병사들이 물러나고, 자연스레 엘리길과 가버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1군과 2군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는 게 좋겠습니다.”
먼저 엘르길이 입을 열면,
그 뒤로 가버트가 꼬리를 물듯 말한다.
“우선 공의 몸 회복이 우선이니 리케니엔으로 복귀하시지요.”
그들의 말을 들은 나는,
“그렇게 합시다.”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
정확히 하루,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아직 베가르트와의 전투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얼룩져 있었다.
익숙하지가 않았다.
단 하루,
그것은 내 몸에 묻어 있는 그 어떤 얼룩도 지워지는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회복이 더딘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다.
인챈트를 무리하게 사용했기 때문이겠지.
예전,
87년 셀레어를 휘둘러 라티아를 휩쓸었을 때.
그 후유증은 내 몸으로도 단시간만에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지금의 인챈트는 셀리어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힘인데도 불구하고 그 후유증이 회복의 더딤으로 그쳤다는 것이고.
그 말인즉.
그만큼 내적이든 외적이든 셀레어를 휘둘렀던 당시보단 성장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역시.
나 자신이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거겠지.
왜 하루 만에 상처가 낫지 않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내 몸에 깃든 이변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것.
일반적으로 정상이라는 것은,
상처에 시달리면서도 회복을 위해 전념하는 지금의 내 모습을 두고 말하는 것일 텐데.
그래서였을까.
지금의 내가 더없이 좋았다.
좋게 느껴졌다.
상처의 후유증으로 의욕을 잃고 멍한 상태에 빠진 이런 내가 사람답고 좋게 느껴졌다.
엘르길 경도,
가버트 경도.
힘없이 대답한 내 모습을 보며 걱정하고 있다.
그들의 그 걱정을 통해,
나 역시 보통의 사람이었구나 하는 그들의 인간적 동정을 얻은 것 같아서 안도 되었다.
그래서 한 번쯤은.
이 안도에 편승해도 되지 않을까.
돌아가는 순간만큼은 말이야.
그리고 밀렸던 고민과 고심은 리케니엔에 도착하고 나서 하자.
“공, 제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가버트가 내 한쪽 팔을 붙잡아 지탱해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가버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르자 엘르길이 손수 차창 위에 묶여 있던 커튼을 풀었다.
그러자 마차 안에 드리워진 암막.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누워 눈을 감았다.
* * *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뭐 말인가, 가버트?”
“저보다 어린 사람입니다. 동네에서 마주쳤다면 절 형으로 불렀을 만큼.”
“그렇지.”
엘르길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를 이해하지 못한 가버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찌 웃으십니까?”
“가버트, 뛰어나다는 건 감옥과도 같은 거야.”
“감옥 말입니까?”
“그래, 뛰어나기 때문에 사회는 그를 가두고 감시하거든. 잘 해내고 있나, 마땅히 뛰어나니 이것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핀잔을 주면서.”
엘르길은 나란히 말을 모는 가버트를 바라보며 넉살을 부렸다.
“자네도 똑같지 않았나? 가문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고, 기사로 임명되고 나선 가문의 기대가 티히트라 전체의 기대로 번졌잖나?”
그제야 가버트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인정했다.
“임명식 후 2년 동안은 술 한 방울조차 엄두 내지 못했죠.”
“그런 사소한 부담마저도 곱절, 아니 곱에 곱절은 더 클 것이야. 공께서 느끼고 계실 그 부담이 말이야.”
“그렇겠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같은 자들은 공께서 뭔가를 더 해내길 바라고 있지.”
엘르길은 고개를 돌려 뒤에 바짝 붙어 있는 마차를 내려다보았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우리가 공의 사회를 더 각박하게 만들고 있다 이 말이야.”
“그런 쪽으론 유독 아이베리아가 더 심하긴 하죠.”
“하하, 맞네. 그러니 한 번쯤 저리 힘드실 때만큼은 최소한 우리가 그 감옥의 빗장이 되지 않도록 해야지 않겠는가?”
끝내 가버트는 유쾌한 미소로 화답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씀입니다. 모쪼록 공께서 빠르게 회복하셨으면 좋겠군요.”
“글쎄, 공께선 지금 순간이 느리게 흐르길 바라고 계실지도.”
“하하.”
그들의 대화가 끝난 뒤 이어진 짧은 침묵.
둘의 얼굴은 다시 사무적으로 굳어졌다.
디안에 대한 걱정을 약간의 가벼움으로 승화시켜보려고 했지만, 그를 따르는 기사로선 도저히 가벼이 치부할 수 없었던 거다.
“엘르길 경, 저는 처음 보았습니다. 칠기사의 진면목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가 예전에 상대했었던 자가 그 칠기사 가운데 하나인 테티르 경이었다니 새삼 놀라울 정도더군.”
엘르길은 하늘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몇이나 더 있을까, 그런 녹슬지 않는 유구한 과거들이.”
그런 엘르길과는 달리 가버트는 기사만이 가지고 있는 뜨거운 것을 내비쳤다.
“글쎄요, 현재를 제대로 겪었을 때 녹슬지 않을 과거가 몇이나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요.”
“역시 자네 피는 뜨겁구먼.”
“뜨겁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는 세상이니까요, 그리고 공께서 제시하신 현재가 과거에 질 것 같진 않거든요.”
엘르길은 가버트의 말에 진심으로 감탄한 듯,
작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말이네, 가버트.”
“그건 그렇고…, 고성 레자스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야말로 빈 성이 되어버렸지, 그러나 정황상 베나즈 가문의 것이라고 볼 수 있네.”
“그렇다면 기사들의 입장에선 그 레자스가 이후 가장 중요한 국면이 되겠군요.”
“…, 그렇네.”
가버트는 서슴없이 엘르길에게 물었다.
“어찌 보십니까, 베르융 경입니까 아니면 테티르 경입니까?”
이에 테티르는 농담과 걱정을 섞어 그를 핀잔했다.
“가버트, 피를 너무 뜨겁게 하다간 모조리 증발해버리는 수가 있네.”
“그렇네요, 얼른 식혀야겠습니다…, 하지만 직전에 공께서 칠기사와 벌이셨던 결투가 계속 눈에 아른거리는 바람에 진정하기가 어렵군요.”
제법 긴 대화를 끝으로 그들은,
이제 리케니엔의 복귀 그 하나에 집중한 채 행렬을 이끌었다.
* * *
벨리반즈 성.
아직 목재를 좀먹는 잔불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그곳에선 단 하나의 깃발만이 휘날리고 있었다.
밝은 살구색 바탕 가운데 기도 올리는 손 모양이 자수 된 그것은,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 크녹스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크녹스는 손상된 성내 시설을 보수하는 데 지역 자유민을 고용하여 빠른 작업을 도모했고, 실제로 굉장한 진척을 이뤘다.
이들 자유민이 이렇게 빠르게 크녹스의 이해와 맞물릴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크녹스가 자유민들에게 제시한 것이 파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벨리반즈가 타 죽으면서,
아니.
앙 실러 데우스의 표현상 벨리반즈가 정화되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재물 역시 정화 대상이 되었는데.
이를 역으로 이용해 크녹스는 자유민들에게 있지도 않은 벨리반즈로부터의 억압을 위한 해방 명분으로,
문자 그대로 분배 후 뿌려 버렸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파격이었다.
그 어떤 자유민들이 거부하겠는가?
많은 재물을 손에 넣을 기회가 주어졌는데 말이다.
그들은 크녹스의 그 파격을 달게 받아들였고, 그것은 즉 벨리반즈의 있지도 않은 억압을 있다고 시인한 셈이었다.
이러한 상호 이해가 오간 거래 끝에,
크녹스는 정말 간단명료하게 성 내 자유민들의 민심을 흡수해버렸다.
그러나 이런 자유민들 가운데 몇 지식인들은 단호한 입장을 고수했다.
갑작스럽게 변동된 재산 규모는 곧 일대 경제에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크녹스는 개똥으로도 듣지 않았다.
분배된 부는 다시 자연히 하나의 점으로 모일 것을, 그리고 그 점이 본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크녹스 본인의 압도적 자신감 하나만으로 밀어붙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크녹스 경. 마녀는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병사들에게 복구와 관련한 지시를 내리고 막 다가온 베커드가 난간에 기대어 성내를 내려다보고 있던 크녹스에게 물었다.
마녀는 앙 실러 데우스가 점성술사를 표현하는 단어였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복구되어가는 성내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고 있다가,
끝내 파충류의 그것처럼 돌연 눈동자를 굴려 성 후미 쪽에 높이 솟은 첨탑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가둡시다.”
“마녀는 이교도의 선봉입니다, 이를 정화하지 않는다고요?”
“베커드 경, 적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적을 통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바꿔 말하면 마녀를 하나의 명분 적 객체로 삼겠단 소리였다.
예컨대,
자유민들은 벨리반즈의 억압에 시달려 있었고, 이런 벨리반즈의 옆에는 마녀라는 존재가 있었다.
이 억압이란 단어와 마녀를 하나로 묶어 전시하면,
해방을 주도한 앙 실러 데우스의 교리가 더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파는,
앞서 말했듯 분배된 부를 한 점으로 모이게 만들어 줄 거다.
부관 베커드는 이를 모두 이해한 듯,
금세 통찰로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 그럼 마녀를 바로 가두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후 베나즈와 관련한 행보를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신의 뜻대로, 라아 메에 ─”
“신의 뜻대로, 라메.”
그렇게 뒤돌아 사라진 베커드의 뒷모습을 크녹스는 은은한 미소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알을 굴려 저 멀리 봉우리가 무너진 산 쪽을 쳐다보았다.
* * *
“…, 다시 말해봐.”
가헨 레바르도.
그의 눈 주위에 검은 핏대가 솟구쳤다.
동시에 그의 등 뒤편엔 살벌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열원 그 자체인 듯한 그 앞에,
보고를 올리던 병사는 뜨거움을 못 이겨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를 얼른 벗어야 했다.
“다시 말 해보라고 했다.”
“베… 벨리반즈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누구에게?”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 크녹스입니다.”
곧 있으면 발리르다.
그 발리르를 함락시키고 곧바로 서쪽 티히트라를 점령하면, 리케니엔을 손에 넣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시기적절하게도 전혀 예상치도 못한, 그러나 절대적으로 치명적인 이야기가 그의 귀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에 대한 그의 감상은,
“이런 씨발! 씨발! 씨이이이바아알!”
단순하나 격정적으로는 짙기 그지없었다.
“이 광신도 새끼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슨 짓거리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가헨은 자연히 오른편에 앉아있던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에 노인은,
침착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왜 안됩니까?! 그냥 이대로 밀어버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가헨은 노인에게 따지듯 말했지만,
노인은 말없이 재차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우리의 성으로 돌아가지, 좋게좋게 보자고. 벨리반즈의 마수에서 벗어난 샘이 되었으니 다른 새로운 깃발들과 한 덩어리가 될 수 있잖나.”
가헨은 이제 전신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그 정도로 분함을 느끼고 있었던 그는,
끝내 등 뒤에 피어오르던 아지랑이를 거둔 채.
“물러간다.”
가득 씹은 이 사이로 짧게 말한 뒤 천막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