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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329화 (329/365)

329화. 새 장 (2)

늦은 밤.

성 내 주실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테티르에게 기사 요함비크가 찾아왔다.

“경.”

“요함비크, 자네 왔는가.”

성에서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인 주실임에도 곳곳엔 아직 채 가시지 못한 전투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정돈된 탁상 앞에 앉아 있는 테티르를 본 요함비크가 황급히,

“병사들을 시켜 이곳을 정리시키겠습니다.”

그와 마주 앉으며 말했다.

그러나 테티르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어 거절했다.

“아니, 지금은 부대 정비가 우선일세.”

그 말을 한 직후,

테티르는 착잡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그의 묵직한 두 손엔 건틀릿의 가죽 안감 자국과 얼룩진 핏자국으로 뒤엉켜 있었다.

“어려운 상대였지.”

이어지는 테티르의 말에 요함비크가 식은 웃음을 지었다.

“예, 어려운 상대였습니다.”

“결국 갈로샤를 점령하긴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정비 후 부상병들을 후방 배치하고 리케니엔에서 병력을 보충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 우리에게 당장 직면한 문제는 그 한 줄 적힌 문서 하나로 해결할 수 있지.”

테티르는 이내 미간을 움찔거리며 짧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지. 요함비크. 그런 문제가 아니란 걸 자네도 잘 알잖나.”

탄식하듯 내뱉은 테티르의 말에 요함비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소모되고 충원되길 반복하는 젊음을, 그렇게 사용된 젊음을 우리는 어떻게 갚아야 하는 건가?”

완력 테티르.

과거 기사왕의 칠기사 중 한 명으로써 불린 이름.

그러나 그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테티르는 매우 지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선 타협 불가한 불굴의 전사였지만,

전쟁의 뒷면에선 한없이 고통받는, 한낱 여린 자에 불과했다.

발리르에서부터 함께 했던 요함비크는 그런 테티르의 숨은 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뻔한 정답이나 그렇기에 위로가 되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승리입니다, 경. 그들의 소모를 유의미하게 만드는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유의미한 것을 쫓기 위해 더 많은 젊음을 소모하게 되겠지.”

“그것이 전쟁이니까요.”

“나는 이길 것이네.”

테티르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나침반을 잃은 채 방황했지. 이런 내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쥐어졌어. 그래서 나는 멈출 수가 없네.”

“멈추지 마십시오.”

“힘들지 않겠는가.”

“힘들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항상 유쾌한 모습을 보이던 후덕한 풍채의 요함비크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단호한 전사의 모습으로 충고했다.

“저희도 모두 다 봤습니다, 갈로샤를 함락시키기 직전 저 너머 피어오른 태풍을, 그 태풍이 내리쳐 무너트린 산봉우리를.”

요함비크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베나즈와 함께 하길 결심하셨던 경 덕분에, 우리는 지금 묶인 하나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경을 쫓아 왔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정답이었습니다.”

테티르는 작게 웃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믿음에 내 직접 신뢰를 들이붓고 싶군.”

“경이 바로 그 신뢰입니다.”

“미안하네, 애 같은 모습을 보였군.”

“애 같은 모습으로 살아보지 못한 자, 두 발 걷는 자 가운데 누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삶의 큰 편에 속하는 일면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자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요함비크, 그만 때리게. 슬슬 뒤통수가 쓰라리네.”

“하하, 그렇습니까?”

어느새 유쾌한 기류가 감돌기 시작했다.

기사이기 전에 요함비크는 그런 사람이었다.

“대대적 군사 정비를 마친 뒤엔 이곳을 정비해야 할 걸세, 앞으로 아이베리아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한 교두보로 쓰일 곳이니.”

“명 받들겠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숙인 요함비크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바쁜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베나즈 2군단,

굽이진 성채 갈로샤 함락.

전사자 225명.

* * *

물의 도시 발치아로 향하는 길목.

베르융은 그곳에 발을 들인 채 저 너머 펼쳐진 풍경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뒤편으론 막 시신을 수습하느라 바쁜 병사들로 북적였다.

첫 번째 관문과는 달리 나머지 두 관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앞선 첫 번째 관문의 수문장에 비해,

나머지 두 관문의 수문장들은 패배와 동시에 잃을 것들이 너무 많았고,

해서 더욱 필사적으로 저항에 임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세 번째 관문에서 벌어진 전투는 자칫 잘못하면 군세가 크게 밀릴 뻔한 것을,

베르융이 단신으로 정문을 돌파하면서 전세를 단번에 뒤엎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인챈트의 힘을 사용해야만 했던 그는,

뒤편으로 무지갯빛 후광이 희미하게 비칠 정도로 많이 지친 상태였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베르융의 활약을 코앞에서 목격한 병사들 사이에서,

그를 신성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징조다.

출중한 소수에 편중된 신뢰와 믿음으로 일어난 사기는 전혀 의미가 다른 사기에 가까울 정도로 뜬구름같은 것.

병사들은 이제 전쟁터에서 베르융이란 요행을 바라며 또 그러한 믿음으로 전투에 임할 거다.

그들은 결코 잔뼈가 굵지 않다.

고된 훈련을 거치긴 했지만, 기간으로 따져봤을 때 고작 반년을 채운 신출내기들이다.

그렇기에 굴러들어와 박힌 요행을 빼내는 재주 따위 있을 리가.

베르융은 조용히 몸을 돌려 관문 내부에 차려진 야영지로 향했다.

야영지 한가운데, 그의 등장만으로 각자 개인 정비를 하고 있던 병사들은 하나둘 일어나 예를 갖췄다.

아니, 예라고 하기엔 경배에 가까운 것이었다.

베르융은 곧바로 자신의 천막 안으로 향했다.

신출내기들인 병사들을 한순간에 숙달된 전사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탑이 세상을 순환시키는 이 세상에서도 그건 마법의 영역 그 이상에 해당하는 환상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발치아와의 전투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이 상황을 바꿀 방법은…,

하나뿐.

* * *

검게 그을린 부분을 제외하곤 다시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온 벨리반즈 성.

활짝 열린 거대한 성문에선 때아닌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으로 북적였다.

향신료를 먹여 키운 목재로 건조한 마차.

굴러다닐 때마다 다른 빛깔을 내는 합금 바퀴.

마차 뒤쪽으로 흩날리는 오색 찬연한 드레스 자락.

양식한 괴물 가죽으로 만든 번지르르한 양복.

부 자체를 과시하기 위한 모든 방법의 제시인양.

벨리반즈 성문을 넘어선 행렬은 그야말로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그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자유민들은 이들이 흘리는 사치에 동경 어린 환호를 보내왔다.

이러한 환호를 당연하다는 듯 섭취하며, 그러면서도 무심한 얼굴들로 일관한 채 고고함을 부려가며 성관으로 진입한 그들에겐.

산중에 박힌 바위만큼 선민적인 사상이 짙게 깔려있었다.

그렇게 성관으로 진입해 마차에서 내린 이들은 자연스레 끼리끼리 모여 작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들 표정 관리 잘합시다.”

“그래야지요, 새로운 성주인데요.”

“딱 벨리반즈 공의 절반 정도만 닮아도 좋겠습니다.”

“하하, 종교쟁이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 것 아닙니까?”

보석 박힌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시시덕거리는 여인들, 뒷짐을 진 채 서로의 옷깃에 발린 보석 가루가 어떤 것인지 염탐하는 남자들.

어쩐지 그들의 모습은 대화 중 섞여 있는 본론보다 서로의 외양에 더 집중한 모습이었다.

“앙 실러 데우스를 잘 아시오?”

“기원이야 잘 알지, 남쪽의 성사회로부터 시작된 기사단이 아닙니까?”

하나둘 성내로 진입하는 와중에도 이들은 계속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어쨌든 지금 이 자리는 그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이교도 정화라는 명목으로 그들의 위세가 엄청나게 커졌다지?”

“그러니 이 성마저 함락시킨 것 아니겠소?”

“개종에 대해 심히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군.”

“애초에 믿는 신도 없으셨잖습니까?”

“무슨 소리? 난 돈이란 신을 믿네, 그리고 앙 실러 데우스가 믿는 신도 내가 믿는 신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요한 자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대화는,

제법 유쾌하고 여유로웠다.

그들이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벨리반즈라는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 가운데 중추 역할을 했던 핵심 후원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업의 대표,

조합의 장.

기사단장을 비롯해 대지주까지.

과거 아이베리아에서 일어난 이변 주위에 재빨리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취해 자라난 그들이 벨리반즈라는 과실을 비대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렇기에 벨리반즈는 확실히 대단한 존재였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아이베리아의 중심을 도모하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벨리반즈가 처세를 비롯해 투자적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 지를 엿볼 수 있었으니까.

물론 실각해버린 지금은 다 옛말이 되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벨리반즈 성이 주류로 나아갈 밧줄이었고,

그 밧줄을 쥐고 있는 자는 이제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 크녹스다.

오늘은 그가 쥐고 있는 밧줄을 얼마나 내려줄 것인지, 또 얼마나 꽉 잡고 있을지 엿볼 수 있는 자리다.

그렇게 화려하게 차려진 홀에 들어선 수십의 사람들.

예상치 못한, 자신들의 사치와 걸맞은 장소의 등장에.

이들 얼굴엔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미적 감각은 벨리반즈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것 같소.”

“이거 참 다행이군.”

“크녹스 경과는 오히려 말이 더 잘 통할 것 같군요.”

곧이어 회랑 구석에 자리잡은 악단이 아주 작고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간지러운 깔림 위로,

그들은 익숙한 듯 다시 삼삼오오 모여 작은 소주제를 필두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히야! 그 가죽, 레스폰입니까?!”

“그냥 레스폰 가죽이 아니네, 백색증에 걸린 레스폰의 가죽이지.”

“알비노 말입니까?!”

백색, 유리를 입힌 듯 먹는 빛마다 칠색으로 내뱉는 화려한 옷을 두고 이어지는 두 남자의 이야기.

“레스폰을 양식하신 겁니까?”

“맞네, 좀 힘들었지. 우리 영지 내에 레스폰이 나타날 환경이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

“그래도 기어이 성공하셨습니다?”

“뭐, 괴물인 레스폰보다 두 발 걷는 자가 때로는 더욱 괴물 같은 때가 있지 않겠는가? 돈 몇 푼에 제 가족을 파는 아비라거나.”

만들어진 사치의 결과물을 자랑스레 전시한 남자,

그 전시된 이야기를 겸허히 들으며 존경을 보내는 남자.

그들의 세계는 다른 동급의 사교모임과는 달리 좀 더 은밀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이들의 수다가 계속되어가던 와중.

갑자기 악단 쪽에서 큰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모두가 대화하길 멈추고 시선을 단상 쪽으로 옮겼다.

이윽고 단상 위에 나타난 남자.

누가 기사 출신 아니랄까 봐 전신 갑옷으로 무장한 채 나타난 그는 옆구리에 투구를 낀 채로 모두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곳의 기반이신 여러분.”

알아서 자신을 굽히고 상대를 올려주는 듯한 그 인사에 대부분이 흡족한 표정으로 화답해 주었다.

본인 입으로 자리에 모인 그들을 이곳의 기반으로 지칭한 것을 보면,

크녹스 그 역시 이곳을 다스리기 위한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렇게 이어진 크녹스의 다음 인사.

“기반이라는 건 고착되면 될수록 역겨운 땅이 되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땅의 자생력을 찾기 위해선 한 번쯤 그 위에 깔린 기반을 갈아엎어 줘야 한답니다.”

이에 순식간에 공기가 싸해진다.

이윽고 자리에 모인 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이 굳은 얼굴로 일갈했다.

“이 자리에서 범하는 실수는 자칫 잘못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소, 처신 잘하도록 하시오.”

하지만 크녹스는 그저 피식하고 비웃을 뿐이다.

“지주는 난데, 그 위에 뿌리내리고 솟은 나무가 뭐라 하는 것도 웃기군요.”

특유의 광기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연 그의 모습에,

이제 그들의 얼굴엔 순식간에 두려움이 깔리기 시작했다.

“뭐 됐습니다, 이제 그 나무를 베려던 참이었으니까. 신이시여, 이 미천한 놈이 땅을 갈고 새로이 농사를 지으려고 합니다, 부디 천년의 풍요가 자라게 해주시옵소서.”

곧이어 진심 어린 목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하는 크녹스,

그에 맞춰 악단의 연주가 더욱 극으로 치닫는다.

동시에,

악단이 자리 잡은 무대가 아래로 꺼지기 시작하더니,

감았던 눈을 떤 크녹스로부터.

“라아아 메에에 ─”

빛이 터져 나왔다.

이후 성내에는 마치 광시곡에 가까운,

처절함과 고통으로 얼룩진 음악이 한참이나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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