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의외성 (2)
“공, 오늘은 재상과의 정찬이 잡혀있습니다.”
아침부터 접견실을 찾아온 바돈이 내게 말했다.
“티히트라의 11인회와 함께 베나즈 가문의 2차 원정과 관련한 사항으로 면담을 요청했기에 제가 임시로 허락을 해놓은 상태입니다.”
그는 손에 들린 문서를 뒤적거리다가도 은근히 내 표정을 살폈다.
“혹시 내키지 않으시다면 일정을 취소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아직 몸의 회복이…,”
“아뇨, 바돈. 그 일정대로 합시다.”
그 대답에 바돈은 시선을 문서로부터 땐 뒤 조심스레 내 얼굴을 살피기 바빴다.
그런 그와 눈을 마주친 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2차 원정에 관련되었다면 그만큼 중요한 일로 면담을 요청한 거겠지요.”
이어지는 내 말에 바돈은 바짝 마른 입술을 움찔거리며 작게 대답했다.
“그래야 할 겁니다, 그 부분은 제가 그들에게 단단히 일러두도록 하겠습니다.”
내게서 못마땅해함을 간파한 것인지 바돈은 이내 비장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물론 바돈에겐 잘못이 없다.
그는 집사부의 수장이자 시종장으로서 재상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내게 보고를 했을 뿐이니까.
그러나 직전까지 격전을 펼치고 돌아와 2차 원정과 관련된 보고를 속속들이 들으며,
그들이 이룬 약진과 그로 인해 감내해야만 했던 것을 두 눈과 귀로 받아들인 나로서는 저들의 요청이 고깝게 느껴질 뿐이다.
알고 있다.
애석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자리임을.
재상과 그의 주제로 만들어진 11인회는 분명 베나즈라는 깃발을 이루고 있는 굵직한 축 가운데 하나이니까.
그래도 두 간극을 모두 이해하긴 힘들 것 같다.
애초에 바깥이라는 테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자와, 그렇게 만들어진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걸 안전히 건설해 나가는 자들의 공존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간극이라는 저울을 조율해 공동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이끄는 것뿐이다.
하지만 나는 기사이기에,
아이베리아의 기사이기에.
테두리의 편에 있고 싶다.
그래야만 하고.
토르킨 선생께서 말씀하셨지, 저울이라는 건 결국 어디로 얼마나 기울어졌는지 알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기사왕은 그 저울을 통해 수평을 엿보려 했던 걸까?
그 이상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 걸까?
“공…,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바돈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비집고 들어왔다.
덕분에 난 복잡하게 엉켜있던 생각에서 퍼뜩 깨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퍼뜩 깨어난 덕분에 머릿속에 답 한 줄기가 떠올랐다.
나는 아이베리아의 기사다.
동시에 베나즈이기도 하다.
그 두 개의 무게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내가 완성하려는 저울일 것이다.
…,
직전까지 내 저울이 한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었다는 걸 실감하고 나니,
괜히 묘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쉬었다.
* * *
조금은 낯설게까지 느껴진다.
그 정도로 서로 못 본 지 오래되었구나.
리케니엔에 방문한 기지어는 자유분방했던 그전의 모습과는 달리 한층 차분하고 점잖은 모습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기지어.”
막 접견실 안으로 들어온 기지어를 반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면,
“아랫사람을 위해 윗사람이 일어서다니요. 아이베리아에 그런 법도는 없습니다.”
기지어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바삐 절뚝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내가 내민 손을 조심스레 맞잡은 그가 작게 속삭였다.
“공, 지금부터는 계신 자리에 대해 유념하셔야 할 때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막 기지어의 뒤를 따라 접견실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인파들이 눈에 띄었다.
저들이 바로,
재상의 주제로 결성됐다는 11인회겠지.
그리고 기지어의 지금 이 말은 저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사무적인 인상이 강하게 풍겨오는 것이 조금은 서운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기지어는 곧 그 특유의 분방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덕분에,
“그거 아쉽게 됐군요. 사무적인 건 질색인데.”
그의 충고를 통해 가벼움을 내뱉을 수 있었다.
투덜거림에 가까운 내 토로를 들은 기지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꼬리로 웃음을 그렸다.
* * *
“디안 공,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번에 봤었던, 빈틈 하나 없는 그 모습 그대로인 깁슨이 내게 인사를 건넨다.
“베나즈 가문의 대국적인 2차 원정이 무사히 끝나길 저 역시 염원하고 있습니다, 지지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인간적 매력으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그 특유의 사교성은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그의 그 진심 어린 말에 선뜻 손을 내미는 것으로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깁슨씨.”
내 내민 손을, 깁슨은 두 손으로 힘있게 감싼 채 한참을 흔들었다.
뒤이어 기업의 대표와 조합의 장들이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이들이 바로 재상 기지어가 엮은 열 한 페이지짜리 베나즈 장부의 면면들이구나.
형식적인 인사들이 나누어진 뒤 우리는 자연스레 정찬 자리를 나눴다.
조용한 기류 속에 시종들이 음식과 접시들을 날랐고,
그렇게 한참 그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진 직후.
바돈이 내 오른편으로 다가와 비어있는 길쭉한 유리잔을 스푼으로 두들겼다.
탕탕거리는 유리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곧 바돈에게 집중되었다.
“베나즈 가문의 정찬을 공식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자리에 모인 빈들께선 각각 최대 두 번의 발언권을 행사하실 수 있으나 공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발언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요컨대 공식 일정에 의한 자리라 이 말이다.
앞서 내 고까움을 바돈은 품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는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위엄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허리를 숙여 재차 내게 예를 보인 바돈은 이제 손에 쥔 은수저를 내게 건네었다.
그것을 받아든 나는 토르킨 선생에게 지겹게 배웠던 아이베리아의 예절 법도를 떠올리며,
건네받은 은수저로 내 빈 컵을 두들겼다.
* * *
“이 자리를 빌려 공식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아한 품새로 음식을 썰던 백발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11인회 가운데 하나인 설리엄.
블레브만이라는 출판 기업을 이끄는 자였다.
“베나즈 가문의 소유 재산은 현재 가장 높은 신용과 보안이 적용된 제리드 은행에 보관되어 있으며 통용 금화로 대략 1,130만 개입니다.”
확실히,
공식적으로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다.
설리엄의 발언에 깁슨은 잠시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런 깁슨의 주저함을 맞은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중년 남자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는 11인회 가운데 하나인 막스.
“자산의 운용 및 이동은 언제든 집사부를 통해 저희에게 통보해주시면 됩니다. 저희 폐사가 보유한 대형 쾌속선 라페리아를 통해 4개 바다 어디든 자금의 물리적 이동 또한 가능합니다.”
조선 기업의 대표다.
그리고 방금 막 깁슨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은 자임을 확인하였다.
깁슨의 눈치를 살피며 거리낌 없이 자신의 발언권을 쓸 정도로.
“현재 2차 원정이 절반이란 국면을 넘어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뒤이어 입을 연 자는 덥수룩한 갈색 수염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말라인.
연금술을 기반으로 한 조합의 대표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에게 짧게 대답하자,
이내 그의 얼굴이 화색이 돌았다.
내 대답은 곧 그가 가진 발언권의 연장선이었기 때문이다.
“공께서 직접 치르신 기사 베가르트와의 결투로 인해 2차 원정은 분명 절반을 한참이나 넘어서 종장을 향해 치달았을 겁니다.”
“어디서 그런 확신을 얻으셨습니까?”
이어지는 내 반응에,
말라인은 그 돋았던 화색이 어디 갔는지 급격히 창백해졌다.
“이런, 제가 주제를 넘었습니다.”
황급히 고개를 숙인 그에게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확신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자들의 고유한 몫입니다. 고작 결투 하나로 종장에 치달을 원정이었다면, 그 수많은 병사를 이끌고 나가지도 않았겠지요.”
앞선 마음에 범한 실수였을 거다.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것만 같이 질려버린 그에게 나는 나긋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자 막힌 혈관이 뚫린 듯, 그의 혈색도 보기 좋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말라인,
외적인 모습에 한해선 참 알기 쉬운 사람인 것 같다.
그렇게 말라인의 발언 이후 잠시 찾아온 침묵 가운데,
나는 자신의 면면을 보여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자들의 눈빛을 살피며,
덜컥 막힌 목구멍을 뚫기 위해 막 썰은 음식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오늘 정찬은 생각보다 길 것 같다.
* * *
물의 도시 발치아.
위대한 건축가 실로보르에 의해 설계된 하수도 위 건설된 도시.
물의 도시라는 이명에 걸맞게 발치아의 모습은 마치 보석처럼 영롱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도시 곳곳에 엉켜있는 물길은 하수도의 위대한 자정작용을 과시하듯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였고,
그 위를 발치아 내 교통수단인 나룻배가 가로지르기 바빴다.
이 발치아의 외곽에는 2중 성벽이 길게 둘러쳐져 있으며, 이 성벽 바깥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거대한 해자가 파여 있었다.
도시가 가진 아름다움만큼이나,
방어력 역시 출중하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발치아의 진면목은 단연 도시 중앙에 박혀있는 성관이었다.
동서남북으로 난 네 개의 성문과 직결된 거대한 수로의 교차점 위에 건설된 성관은,
마치 분수 가운데 솟아오른 조형물에 버금갈 정도로 미적인 감각이 뛰어났다.
물길 위 깔린, 성관으로 향하는 긴 통로.
그곳엔 막 대녀 엘로랭이 심각한 표정으로 귀족 내외들을 대동한 채 움직이고 있었다.
진한 갈색의 긴 머리카락.
살짝 솟아나 도드라진 광대.
그 아래 기다란 턱에서 느껴지는 진한 완숙미.
전형적인 말상의 미인인 그녀의 머리 위에는 반달 모양의 거대한 왕관이 씌워져 있다.
그녀는 자신의 오른편에 바짝 붙은 귀족에게 물었다.
“그들이 육안으로 포착될 정도로 가까워진 게 확실합니까?”
그러자 귀족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에게 속삭인다.
“예, 막 파수병의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베나즈의 군세가 현재 발치아 외곽에 도달한 직후 트리뷰셋 세 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합니다.”
귀족의 말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이 발치아를 두고 공성 병기라니, 영악하기 짝이 없군요.”
“발치아가 이룩한 미적 감각을 인질 삼아 저희 군사를 꾀어낼 계획인 것 같습니다.”
“베나즈 군의 지휘자가 베르융 오르테라고 했지요?”
“맞습니다.”
“까다롭네요, 정말.”
그녀는 이내 혀를 내두르며 지끈거리는지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렇게 귀족을 대동한 채 거대한 나룻배 위에 올라탄 엘로랭은 직통으로 연결된 물길을 통해,
곧바로 발치아의 서문에 도달했다.
이윽고 미리 마중 나온 파수병의 안내를 받아 성문 위로 올라온 엘로랭은,
그제야 너머에 펼쳐진 광경을 직접 두 눈에 담았다.
까마득하다.
아침이 미처 치우지 못한 땅거미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 것처럼 앞마당에 빽빽이 들어찬 베나즈의 군세는,
막 야영지를 펼침과 동시에 전방에 거대한 투석기를 건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엘로랭은,
서둘러 베나즈의 군세로부터 등을 돌린 채 다시 성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귀족들은 그런 그녀의 뒤를 황급히 쫓아간다.
“서둘러 그분께 연락을 넣도록 하세요.”
직후 뒤따른 귀족에게 명령을 내린 엘로랭은 나룻배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뒤,
허공을 응시했다.
“그분은 발치아가 직면한 이 상황 모두를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