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의외성 (3)
이것과 똑같은 상황을 베르융은 이미 겪어본 적이 있다.
아니, 이보다 더 심한 양상을 베르융은 겪어보았다.
승리라는 게 당연해진, 당연해지기 시작한 군세에 대하여 말이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그야말로 전쟁의 화신과 같은 무적의 군세를 말하는 것 같겠지만 위 표현엔 또 다른 전제 조건이 붙어 있다.
바로 ‘전투 없이’라는,
그야말로 당착적인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꽤 중요하다.
이렇다 할 전투 없이 승리를 겪게 된 군세는 승리를 위해 거쳐야만 하는 중간 과정의 경험을 체득하지 못한 채,
단지 정신적 고취만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심해지면,
군세는 정신적으론 승리를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그 정신이 깃든 육체는 패배가 당연할 정도로 해이해졌음에도 말이다.
이러한 모순을 겪고 있는 군세가 진짜 전투를 제대로 맞닥뜨렸을 때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지는지를,
베르융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기까지 했다.
그는 과거,
한때 최강이라 불렸던 기사 맥레인의 부관으로서 그가 이끌던 군세와 한 몸이었던 자였다.
이런 맥레인이 이끄는 군세는 당시,
무적이란 이름으로 위세를 떨쳤다.
그들이 그토록 잘 싸워서 그런 위세를 떨칠 수 있었을까?
아니,
그 위세는 온전히 맥레인이란 기사 하나로 쓰인 것이다.
결투를 거듭하며 무패 신화를 써 내려갔던 맥레인, 그 혼자서 써 내려간 승리였던 거다.
군세는 맥레인이 벌어다 준 이 승리를 먹고 당연함이라는 오만함을 배설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맥레인이 이끄는 군세는 명실상부 무적의 군세이면서 동시에 가장 형편없는 군세가 된 것이다.
이런 군세에,
투지가 있을 리 없다.
승리를 향한 갈증 또한 느꼈을 리 없다.
병사들은 앞둔 전투를 위해 개인적으로 치밀함을 부리는 대신 자신을 이끄는 맥레인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쏟았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의 신앙으로 보일 정도로 맹목적인!
적극적으로 작전을 짜야만 했던 각 소대의 장과 부관들은 맥레인을 향한 기도와 찬양을 하기 바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맥레인은 군세 내에서 신성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불가침의 영역이 되어서 침범할 수 없는,
그렇기에 바라고 바라서 당연한 승리를 얻어내야 하는 우상.
병사들에게 맥레인은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거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피치 못할 전투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병사들의 우상이었던 맥레인이 처음으로 결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그 고전을 선사한 위대한 창술사는 길어진 결투 양상을 자연스레 군세 단위 전투로 번지게끔 유도한 것이다.
결과는,
역시 맥레인은 끝내 승리를 쟁취하였지만.
그가 이끄는 군세는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해버리고 말았다.
병사들은 간직하고 있던 모순을 정면으로 마주했고,
이에 죄인처럼 시인하듯 패배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를 두고 맥레인은 베르융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일한 처방전이 철저한 패배뿐인 군세가 겪게 될 처참함이 이 정도였구나 라고.
그 역시 알고 있었던 거다.
아니 누구보다 잘 알았을 거다.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승리를 얻어낸 그로 인해,
자신을 따르는 군세가 껴안게 된 모순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거다.
하지만 그는 병사들이 생각하는 신성한 존재도, 누군가의 염원을 수리해 줄 우상도 아니었다.
그 역시 한낱 사람이었기에 알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묵묵히 전진해나갔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공허해 보일 정도로 슬픔에 빠졌다.
군세를 방치했다는 죄책감에,
철저한 패배만이 유일한 처방전이 되도록 무심했던 자신 때문에.
그러면서도 다행이라는 듯 안도했다.
결과적으로 군세는 죽지 않았고,
그저 죽지 않을 만큼의 선에서 처방을 받고 이내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에.
* * *
바로 지금 군세가 그렇다.
물의 도시 발치아 공략을 앞둔 이들 말이다.
맥레인을 통해 군세 내 당연함이란 위험을 배운 베르융은 그것을 조기에 바로 잡길 결심했다.
어쨌든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로 패배를 겪는 것.
다만 과거 맥레인이 이끌었던 그 당시와는 달리 지금은 아주 사소한 패배만으로도 군세 내 팽배해지려는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발치아를 두들기다 보면 그들은 끝내 성문을 박차고 나와 공격을 감행할 테고,
베르융은 그렇게 벌어진 교전 양상 곳곳에서 꽤 아픈 패배들을 얻어낼 생각이었다.
궁극적으로 이 패배를 통해 베르융의 군세는 정신적, 육체적 약진에 이르러 발치아 공략에 적극적인 박차를 가할 것이다.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베르융의 이 책략은 이제 곧,
해가 떨어지는 저녁부터 시작된다.
* * *
발치아의 영주,
대녀 엘로랭은 반쯤 헐벗은 몸으로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곧 다가온 하녀 둘에게 매끈한 다리를 드러내며 요염한 자세를 취해 보였다.
이윽고 두 하녀가 엘로랭의 다리에 달라붙어 향신료를 섞은 기름을 정성스레 바르기 시작했다.
성벽 바깥에 펼쳐진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움.
그 속에서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휴식하고 있던 그녀는 곧,
똑똑 ─
문을 두들기며 찾아온 누군가에 의해 퍼뜩 여유로부터 깨어나야만 했다.
“영주님, 그분께서 답신을 보내오셨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종의 목소리에 엘로랭은 매끈한 다리를 감추듯 뒤로 물렸다.
그러자 두 하녀가 서둘러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을 친다.
“저녁에 다시 부르마, 밤 봉사는 어떻게 이뤄지는진 잘 알고 있겠지?”
막간을 이용해 엘로렝은 훤히 드러난 팔로 턱을 괸 채 두 하녀에게 은근히 물었다.
그러자 두 하녀는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아라.”
그녀의 말을 끝으로 물러난 두 하녀.
이제 걸치고 있던 헐렁한 가운을 고쳐 입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문으로 다가간다.
그 발소리에 반응하여 열린 문밖엔 등이 굽은 중년의 시종이 서 있었다.
그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황금 봉인이 찍힌 적색 봉투.
엘로랭이 넌지시 손을 뻗자 시종은 고개를 숙인 채 쥐고 있던 봉투를 그녀에게 건네었다.
직후 그 자리에서 황금 봉인을 뜯은 그녀는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내용이 없구나, 봉인만을 찍어 보내신 걸 보면 전서구의 주체는 앵무새였을 테지?”
그녀의 말에 시종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주신 전달 말이 무엇이냐?”
“내일 새벽, 그분께서 직접 발치아로 오신다고 하십니다.”
시종의 말에 엘로랭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뭐…?!”
“베르융 경과의 의견 조율에 직접 나서실 생각이십니다.”
“그 말은 노선을 베나즈 쪽으로 변경하실 생각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엘로랭은 손에 있던 황금 봉인을 어루만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에게 말했다.
“잘 들었다, 이만 물러가거라.”
“그럼, 소신 물러가겠나이다.”
이윽고 물러난 시종,
동시에 닫힌 문.
그 앞에 말없이 한참이나 서 있던 그녀는 곧 몸을 돌려 흥미로운 표정과 함께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재밌어지겠어.”
* * *
이건 절대로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누가 와도 지금의 일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른 새벽.
급하게 일어난 베르융은 너머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을 느껴야만 했다.
저 멀리 보이는 발치아의 성벽 곳곳에,
흰 깃발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일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잠깐의 현기증에 시달린 듯, 찌푸려진 미간 아래 콧대를 주무르던 베르융은 곧.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를 한점 삼아 바라보고 있던 건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감격한 또는 경이로운 표정으로 베르융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러한 시선들 속에서 베르융은 뭔가가 철저하게 어긋났음을 느껴야만 했다.
“베르융 경! 보이십니까?! 저들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세 개 관문을 돌파한 그 저력에 저들이 고개를 숙인 것입니다!”
순수하기까지 한 이들의 열성적인 환호에 베르융은 마지못해 비장한 표정으로 받아주었다.
이내 야영지 최전방으로부터 초병 하나가 황급히 달려왔다.
“베르융 경! 방금 막 발치아에서 한 무리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보고를 받은 베르융은 천막 안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던 종자들의 도움을 받아 갑옷으로 무장했다.
이어 투구를 옆구리에 낀 채 말에 오른 그가 부관들을 이끌고 야영지 전방 쪽으로 고삐를 당겼다.
그렇게 도달한 야영지 전방.
베르융의 등장과 동시에 길을 터준 초병들 너머로.
하얀 깃발을 드높인 채 말을 타고 이곳으로 다가오는 다섯 사람이 보였다.
이를 확인한 베르융은 그 즉시 부관 둘만을 데리고 야영지 밖으로 나가 중간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워, 워.”
베르융이 다가오자 황급히 말을 멈춰 세운 다섯 장정.
곧 그들 중 하나가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가 베르융에게 예를 갖췄다.
“베르융 경, 이른 새벽임에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야만 했던 발치아의 의결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터무니없이 내놓은 그의 공손함에 베르융은 절로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이렇듯 갑작스러운 발치아의 결정에 놀란 것은 사실이오, 그 의결이란 게 뭡니까.”
베르융의 물음에 발치아의 사신이자 귀족인 듯 보이는 그는 다시 예를 갖춘 채 답했다.
“보다시피 발치아에겐 전투 의지가 없습니다, 이를 경께 천명하기 위해 새벽부터 의결이 지어졌고 이렇게 저희가 나선 것입니다.”
“전투 의지가 없다?”
“경께서 발치아의 정복을 완벽히 하고자 건축하신 트리뷰셋은 저희에게 아주 큰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로 인해 입게 될 피해 역시 명백하게 보였기에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린 결정입니다.”
그의 말에 덧붙여 뒤에 있던 다른 남자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발치아는 물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잔잔함 속 자유민들의 평화로 융성해진 곳입니다, 그곳에 파문을 넘어선 파도가 일어난다면 그 피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겁니다.”
간곡하기까지 한 그들의 입장에 베르융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계획이 어긋난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발치아의 이 뜻밖의 항복은 분명 위의 어긋남과는 비할 수 없는 좋은 소식이다.
“발치아의 영주이신 대녀 엘로랭님의 후원자가 직접 발치아의 항복을 공식화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습니다.”
곧이어 사신 중 하나가 본론을 꺼내었다.
“원하는 위치를 말씀해주신다면 저희가 거기에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협의 장소를 야영지 중심으로 결정한다면,
저들이 보인 예를 욕보이는 짓이다.
그렇다고 곧바로 도시에 진입하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일이니,
베르융은 턱짓으로 아래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지금 서 있는 이곳으로 합시다.”
그러다 다섯 사신은 동시에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 시간 뒤에 이곳에서 뵙겠습니다.”
“발치아의 의결을 존중해주신 베르융 경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들의 인사를 끝으로,
베르융은 약간의 허탈함과 그를 상회하는 안도감.
그리고 미래에 있을 약간의 불안감을 느낀 채 복귀했다.
* * *
플레이트 메일이 아닌 서코트로 무장한 채 자리에 나선 베르융은 미리 발치아 측에서 쳐놓은 천막을 향해 홀로 말을 몰았다.
차려진 천막 안에는 이미 도착한 한 남자가 홀로 서 있었다.
그렇게 천막에 이른 베르융이 말에서 내려 천막 아래로 발을 들이기 무섭게,
미리 도착한 남자는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을 번뜩이며 베르융에게 손을 내밀어왔다.
“반갑습니다.”
정력적인 그의 인사에 베르융 역시 밀리지 않고 응수했다.
“발치아의 영주 엘로랭 공의 대부되십니까.”
이에 남자는 활짝 웃으며,
“그렇습니다.”
뜨거울 정도의 온화함을 내비쳤다.
“이 악수를 시작으로 신께서도 유감없는 축복을 내려주실 겁니다, 라아 메에.”
직후 이어지는 남자의 말.
그것은 베르융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뒤에 붙는 기도문은 아이베리아에서 가장 흔한 것이었으니까.
앙 실러 데우스였군.
베르융은 그에게 종교적 존중을 표했다.
“라메.”
그렇게 꽤 길었던 서막을 시작으로.
“앙 실러 데우스의 기사, 크녹스라고 합니다.”
“베나즈의 기사 베르융 오르테입니다.”
대화는 본론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