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33화 (333/365)

333화. 양날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베르융이 간이로 차려진 작은 탁자 위에 한쪽 팔을 올린 채 말했다.

“어디서부터 연결고리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크녹스는 말했다.

“잘 모르시는 게 당연하지요, 그 낯선 공백의 부분을 채우기 위해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

부리부리한 두 눈에서 흐르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불같은 열정.

베르융은 그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는지 살짝 크녹스의 시선을 회피했다.

“앙 실러 데우스는 오래전부터 세 개의 분파로 갈라져 지금까지도 내부적으로 엉망인 조직입니다.”

크녹스는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해 서슴없는 설명을 이어갔다.

“좀 더 자세히 듣고 싶군요.”

베르융의 말에 크녹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도 뒤쪽을 향해 손을 들어 흔들자,

그로부터 한참 뒤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무리 중 하나가 다가왔다.

갑작스럽게 기사를 불러들인 크녹스의 행동 덕분에,

마찬가지로 베르융의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베나즈 측 병사들은 잔뜩 긴장을 한 채 슬슬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살피던 베르융은 조용히 주먹을 쥔 손을 들어 올렸고,

그 신호를 보기 무섭게 병사들은 고삐를 당겨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그저 태연하게 지켜보고 있던 크녹스는,

“마르산 커피로 하시겠습니까? 과일 차도 있습니다만.”

그저 해맑게 웃으며 베르융에게 마실 것을 권하였다.

물론 베르융은 그 어떤 심경의 변화는커녕 내색조차 없는 표정으로,

“커피로 하지요.”

응수했다.

이런 그의 모습에 크녹스는 대놓고 호감을 표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올 상반기 마르에서 생산된 커피가 아주 걸작이거든요.”

직후,

“부르셨습니까, 경.”

크녹스의 부관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바로 뒤쪽으로 조심스레 접근했다.

“베커드 경, 마실 것 좀 부탁하겠네.”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어떤 것으로 드실 생각이신지?”

“베르융 경께선 마르산 커피를 선택하셨지.”

“경께서는요?”

“똑같은 것으로 하지, 같은 길을 함께 걷길 염원하는 마음으로.”

온갖 방법으로 호감을 드러내고 있다.

대놓고 속 보이는 그의 행동들에 베르융은 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또 그렇기에 자연히 크녹스가 들려줄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궁금증이 더해져 갔으니까.

“잠시 실례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두 깃발 간의 회담인데 사이에 향긋한 연기 하나 없으면 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베르융은 말없이 미소로 화답했다.

크녹스는 그런 베르융의 침착함으로 일관된 모습에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베나즈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베르융에게 궁금증을 유발해 이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올 생각이었으나,

살짝 어려워지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먼저 입을 연 쪽은 결국 크녹스였다.

“저 때문에 끊어진 이야기니 얼른 이어 붙여야겠지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앙 실러 데우스는 세 개의 분파로 나눠진 상태입니다.”

베르융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지막이 답했다.

“세 분파라면 분명 급파와 온건 그리고 수도로 기억하고 있는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앙 실러 데우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군요!? 그럼 궁금하군요, 저는 어느 분파에 속해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크녹스는 저도 모르게 베르융에게 살짝 휘말렸다.

그만큼 베르융의 대답은 그에게 있어서 호기심을 당기는 것이었다.

크녹스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베르융은,

“경, 말씀하신 것을 준비해왔습니다.”

막 뒤에서 다가온 기사 베커드의 등장에 눈썹을 치켜뜬 채 여유롭게 양손을 맞잡았다.

직전과 같이 다시 한번 이야기가 끊어져 버렸지만,

그 끊김에 아쉬움을 느낀 대상은 반대였다.

거기서 크녹스는 흐름이 베르융 쪽으로 넘어갔다는 걸 인지하곤 뒤늦게 고개를 휘휘 가로저었다.

“역시 복잡한 수 싸움은 역시 저랑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어진 그의 심심한 고백에 그제야 베르융도 자세를 고쳐 앉은 채 화답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보다 단순하거든요.”

이미 흐름이 넘어온 상태에서 주도권을 휘두르지 않고,

그 흐름을 다시 정도에 가져다 놓은 베르융의 포부에 크녹스는 입꼬리를 활짝 올렸다.

이제 이 두 남자 사이엔 그 어떤 수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이에 향긋한 향을 품은 채 피어오른 두 줄기 연기 말고는.

베르융은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커피에 대한 간단 하면서도 확실한 감상을 전한 후 베르융은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제가 보기에 크녹스 경은 급파 쪽의 사람인 것 같습니다만.”

“예, 맞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정말 쉬운 문제였겠군요. 다만 덧붙이자면 은혜롭게도 저는 지금 그 급파의 선두에 서 있습니다.”

베르융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한 분파의 대표자라면 장관하고 있는 세의 범위 역시 거대하겠지요.”

이어 상체를 기울인 베르융이 크녹스의 어깨너머로 펼쳐진 발치아를 바라보며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세의 범위는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할 것 같군요.”

“경의 생각이 어디에까지 미쳐있는지 모르니 섣불리 대답해드릴 순 없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예상을 쉽게 넘어설 만큼 몸집이 큰 것은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해서, 급파의 선두이신 크녹스 경께서 이 베나즈에 시선을 돌린 이유가 뭡니까?”

“이유가 필요합니까?”

“대부분의 일엔 이유가 필요하지요, 이유가 없는 일은 대부분 필요에서 거리가 머니까요.”

크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베르융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있다가, 끝내 말없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계시를 해석했을 당신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베나즈의 깃발과 함께하는 거야말로 급파의 번짐으로 이어질 것이다, 라고 해석했습니다.”

“무례한 말처럼 느껴지겠지만, 이 자리에선 서로 마주 본 사람끼리의 이해만으로 맞물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예, 베나즈라면 제 분파의 보존에 큰 힘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시원시원하구먼.

베르융은 막 떠오른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이 합세를 통하여 베나즈 역시 숙원을 이루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베나즈의 숙원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크녹스 경?”

크녹스는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진실의 전파, 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전파를 통한 믿음의 확고겠지요.”

그의 예리한 통찰에 베르융은 다시 한번 자세를 고쳐 앉아야 했다.

그가 아이베리아에서 광신도라 불리는 것쯤 베르융은 이미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별칭은 전투라는 무대 위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에 기인한 것일 뿐.

한 분파의 수장답게 말하는 솜씨나 부리는 통찰이 혀를 내두를 정도다.

직전의 대화에서 그것을 꿰뚫어 본 베르융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자신의 선에서 감당할 상대가 아니라고.

베르융은 기사이기 전에,

객관화에 통달한 사람이다.

아니 엄연히 말하면 기사라는 길을 걸었기 때문에 철저한 객관화가 버릇처럼 들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지고 있다.

“발치아의 항복을 통해 베나즈 가문과 접점을 만든 당신의 의도와 그 깊은 뜻은 제게 잘 전달되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베르융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말끔하게 비워진 잔을 살짝 살펴보던 크녹스는 전보다 더 유순한 표정이 되었다.

애써 성의를 들여 설명했던 커피를 다 비웠다는 건,

그만큼의 예의를 표할 정도라는 뜻이겠지.

더 나아가 이 자리가 불편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통보이기도 하다.

“경께서 보이신 성의와 뜻은 제가 직접 공께 전달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크녹스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숙여 체형에 걸맞지 않은 여린 모습으로 예를 갖췄다.

“감사합니다, 베르융 경.”

애초에 갑작스럽게 마련된 이 자리에서,

크녹스는 어떤 담론적 결론이 나올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이 자리를 통해, 발치아의 항복이란 수단을 통해 얻어내려 했던 것은 바로 이것.

베나즈와의 직접적인 접점.

최고는 단연 그 0의 주인인 디안과의 만남이겠지만,

사실 디안에게 자신의 존재가 열거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찌 되었든 생성된 접점의 진전을 위한 패는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까.

가헨의 부재를 통해 얻어낸 벨리반즈의 목.

그것은 분명 언제가 되었든 베나즈와의 맞물림을 유도할 결정적인 패가 될 테니까.

* * *

“아침에 말릴 찻잎을 손수 널었습니다만.”

접견실에 들어온 바돈이 작게 한숨 쉬며 말을 이었다.

“미처 널지 못한 찻잎이 남은 줄 알았습니다, 지금 공의 모습이 딱 그렇군요.”

미지근한 그의 농담에 말 그대로 의자 위에 널려 있던 내 입가에 픽 하고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왜인지,

바돈이 말한 그 줄에 널려 있는 게 더 편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가서 찻잎 옆에 나란히 저를 널 생각입니까?”

“사실 지금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그의 온건한 잔소리에 나는 책상 위에 쏟아져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워야 했다.

그제야,

“음, 제가 착각했나 보군요. 녹초가 아니라 공이셨다니.”

능청스럽게 농담을 건넨 바돈이 따듯한 미소와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오찬과 만찬을 아우르는 정찬이었지요.”

그의 말대로 종일 식탁 위에서 재상을 비롯한 11인회와 끊임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뿐만이 아니다,

내방 한 뷰글즈의 현장 취재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잘 전시된 밀랍인형 행세까지 해야 했다.

두 번 정도 우려낸 차가 그렇게 맛있다지.

그 맛있음을 위해 두 번의 진을 빼낸 찻잎의 마음을 이제 조금 알 것도 같아.

사실 위의 것들만으론 날 그렇게 힘들게 하진 않았다.

역시나 그렇듯,

괴리 때문이겠지.

전투에 나선 전사들을 뒤로한 채, 이 안에서 다른 방식의 고군분투에 빠진 내게서 우러나온,

그런 괴리.

이건 정말 힘든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론 머릿속이 명확해져 개운한 느낌이야.

재상 기지어와 그가 이끄는 11인회.

그들이 고민을 거듭하며 내놓은 결론과 그 결론을 치밀하게 압축해 올린 보고들은 베나즈 가문의 영역에 대한 시선을 보다 확실하게 재고할 수 있었으니까.

아직 해야 할 일들은 많지만,

체계가 갖춰졌으니 계단을 오르듯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면 되겠지.

그러는 과정에서 분명 여유가 생길 것이고…,

그 여유의 틈 속에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도 착실히 해놔야겠어.

가령,

티히트라의 모나켈 사건이라거나.

메트로폴리아에서 얻은 기업 메킨토의 인장과 그 인장과 연결되어 있을 은행의 비밀 금고 같은…,

아니, 사실 그것들은 개인적으로 후 순위의 일들이다.

내게 향유 할 여유가 주어진다면,

그래,

보고싶다.

그들은 살아있는지,

살아있다면 잘 지내고 있는지.

중립 지역, 내 울타리.

내 가족이었던 자들.

그리고 함께 별을 떨어트렸던 여인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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