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34화 (334/365)

334화. 양날 (2)

“고성 레자스의 처분에 대해서 말해 봅시다.”

기지어가 절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나온다.

그 뒤 책상 위에 대충 걸터앉은 그는,

“11인회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군요.”

앞에 마련되어 있는 자리를 내려다보며 질문했다.

길게 뻗은 탁자, 그 주위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열 한 명의 대표들.

그들 사이사이엔 비싼 화약 냄새가 섞인 연초 연기가 형형색색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어 기지어의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답한 것은,

그와 가장 가까운 우측 자리에 앉아 있던 깁슨이었다.

“아무래도 테티르 경께서 담당하는 쪽이 좋겠지요.”

깁슨의 그 말에 11인회에 소속된 기업 ‘레그놀란’의 회장,

밀러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결국엔 모든 건 디안 공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머릿기름으로 매끈하게 넘긴 갈색 머리,

유리로 빚은 듯 반짝이는 백색 피부와 가끔 입을 벌릴 때마다 반짝이는 보석 박힌 송곳니.

기업의 덩치를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11인회 내 이인자에 해당하는 거물이자,

동시에 뜨거워 손대기 꺼려지는 혈기왕성한 젊은이.

그의 발언에 기지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밀러, 그런 말을 할 거면 재상인 나는 왜 있는 겁니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왜 자리를 마련하고 한자리에 모인 겁니까?”

기지어는 곧 순수한 의문을 내비치며 물었지만,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압박감을 뿜어냈다.

“이 위치에서, 이 위치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하는 일을 외면한 채 위의 결정만을 기다릴 거였으면 자네는 왜 이곳에 왔냐 이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기지어가 존대를 버린 채 힐난하듯 묻자 밀러는 곧장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런 그를 마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한참을 바라보던 기지어는,

다시 경직된 어깨를 푼 채 태연히 말을 이었다.

“깁슨의 말대로 테티르 경이 레자스 성을 담당하는 게 우리에게 있어선 최선입니다. 레자스는 곧 베나즈 내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가 될 것이고 그곳에 고이게 될 물은 얼마 안 가 바다 만큼의 권력을 쥐게 되겠지요.”

그의 말에 출판 기업 블레브만의 회장 설리엄이 작게 손을 든 채 입을 열었다.

“테티르 경께서 우리와 함께하기로 하신 겁니까?”

그럼 깁슨이 기지어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그의 눈짓을 확인하고 대신 대답했다.

“함께 하지 않는다 한들 테티르 경께서 담당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좋습니다.”

그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기지어가 책상에서 내려와 11인회가 있는 탁자 쪽으로 다가왔다.

불편한 다리를 이끌며 절뚝이는 그였지만,

이 자리에서 그보다 위풍당당한 기세를 가진 이는 없었다.

이후 기지어는 깁슨의 그 말을 이어받듯,

“왜냐면 테티르 경은 친 베나즈가 아니기 때문이오.”

11인회를 둘러보며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테티르 경은 맥레인 베나즈의 최측근이자 충신으로서 끝까지 함께 했었던 베르융 경과는 다르지.”

좌중의 시선을 휘어잡은 기지어는 다시 새침하게 뒤를 돌아 절뚝거리며 책상으로 향했다.

돌아가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그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테티르 경은 현 발리르이자 과거 발기지르라 불렸던 깃발 아래 기사였소, 지금의 베나즈와 대척점에 있었던 자였다 이 말이오. 이것만 들어봐도 다 느껴지셨을 테지, 베르융 경은 테티르 경과 비교하면 성골에 가깝다는 걸.”

기지어는 다시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표정으로 말하듯 11인회를 한 번 더 둘러 보았다.

그것은 마치,

지금 베나즈 가문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생각하라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내 그들이 피는 독한 연초 대신 책상 위 막대 사탕을 집어 입에 문 기지어가 재차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보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티르 경은 칠기사라 불렸던 인재답게 출중한 능력으로 지금 2차 원정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소.”

사전 설명 위로 현재의 설명이 탑처럼 쌓이니 깁슨을 제외한 열 그루의 거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이베리아의 또 다른 이름이 무엇인진 그대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되겠지요.”

기지어의 그 말에 모두가 속으로 한 단어를 떠올렸다.

‘기사의 땅.’

“결국에 그대들 같은 양복쟁이나 나 같은 자들은 이 땅에서 잘 쳐줘 봐야 외척이라 이 말이지.”

설리엄이 눈을 번뜩였다.

“그래서 테티르 경을 점찍으신 것이군요.”

기지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티르 경은 베나즈 가문에게 죄에 가까운 빚을 지고 있소, 그리고 그것을 없애줄 날개가 필요하지. 우린 이 아이베리아의 든든한 지지 기반이 되어줄 출중한 기사가 필요하고.”

건설조합 알레프스의 대표, 우레베즈가 휑한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외쳤다.

“상부상조로군요.”

이에 기지어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부상조지.”

이 일련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깁슨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조금은 답답한 얼굴로 기지어를 올려다보았다.

* * *

모두가 떠나 휑해진 티히트라의 접견실.

그곳에 남은 깁슨은 자연스레 기지어와 독대하고 있었다.

“재상, 어찌 그러십니까.”

“뭘 말이오?”

“아까 외척이라 말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갈라치기를 하면서까지 저들을 꽉 묶으려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순수하고도 열정적인 깁슨의 질문에,

기지어는 저도 모르게 탄성과 한숨을 번갈아 내쉬다가 픽 하고 웃었다.

“깁슨, 당신은 정말 신기한 사람이야. 이상과 순수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그런 사람.”

이에 깁슨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베나즈 가문을 선택하셨소?”

그런 깁슨에게 질문을 던지는 기지어,

이어진 그의 답은.

“모름지기 명분이 있는 투자야말로 진정한 투자라 불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기지어를 실소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내 양복쟁이는 아니지만 그리 거창한 이유 때문은 아니란 건 확신하지.”

“그럼 뭡니까?”

“0과 베나즈, 측정할 수 없는 폭발적 이익을 낳는 투자대상 아니오? 막대한 이익을 보기 위해 모인 것이지.”

깁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지어는 그런 깁슨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 다 당신 같진 않소, 그리고 나는 지금도 당신이 그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오.”

“꽤 섭섭한 말이로군요.”

“당신의 이상적임이 내 경계를 깨웠을 뿐이야.”

“가면을 벗기려다 얼굴 가죽까지 뜯길 판이겠군요.”

깁슨의 냉소적인 농담이 기지어는 마음에 들었는지 크게 웃었다.

“어쨌든 당신을 비롯한 11인회는 봉사단이 아니란 말이지, 나는 당신들의 배출구고. 그러니 그쪽의 불만과 불신이 팽배해져 터지지 않게 적절히 해소해 배출하는 게 내 역할이오.”

“테티르 경이 끝까지 함께 할 거라 보십니까.”

“그는 주어진 날개를 더욱 강하게 쥘 것이오, 그 역시 나와 당신들을 잔뜩 경계할 테니.”

직후 기지어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이내 얼버무리듯 입술을 다셨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깁슨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뭐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단것을 먹었더니 입안이 말라서 그런 것이오.”

기지어는 이에 깁슨이 말꼬리를 물어 뭔가를 유추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 예상과는 달리 그는 알겠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깁슨이 접견실 밖으로 나서자,

기지어는 조용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울인 채 책상 위에 놓인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테티르 론바즈.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수 없느냐, 그런 의향을 먼저 내비친 쪽은 바로 그였다.

결정적으로.

기업 모나켈을 치기 위해 티히트라로 향했던 때.

자처해 내 옆을 보좌했던 이가 테티르였다.

그게,

왜였겠어?

마이스터 토르킨 선생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지만, 한 가지 배우지 못한 채 그 영역에 대한 주의만을 들어야 했던 것이 있다.

본능, 육감 따위의 초월한 인지적 능력.

직감이라고 뭉뚱그려 정의할 수 있는 그 능력.

테티르,

그자는 그것에 타고난 자다.

근래부터 그에 관한 청사진을 그렸던 나와는 달리, 그는 이미 그때부터 나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도 체계적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게 아닌,

직감적 즉흥 하나만으로.

여러모로 쉬운 상대가 하나도 없구나.

그래서,

더 재밌다.

결국엔 디안 베나즈라는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 아래서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니까.

* * *

이틀이 지나고 찾아온 새벽.

이른 시간부터 바깥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덕분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안락한 의자에 앉아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복도 위 총총거리는 발걸음 소리,

그리고 작게 속삭이는 듯 대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외부인이 급작스레 방문이라도 한 건가?

바로 문을 열어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들을 더욱 바쁘게 만들 것이 분명했기에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책상 앞에 앉은 나는,

곧 밝아질 날을 기다리며 조심스레 서랍에 보관 중이던 문서와 작은 함을 꺼냈다.

잠깐,

생각보다 아직 주위가 어둑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살금살금, 침대 옆에 놓인 탁상에서 호롱 하나를 들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간다.

그다음 책상 한구석에 있는,

맥레인이 썼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부싯돌을 집어 들어.

탁, 탁.

불을 붙여 주위를 밝혔다.

밝히고 보니 호롱 겉에 도드라진 문양 하나가 보인다.

포개어진 손 조합의 것이로구나.

특이한 모양을 한 호롱은 머금은 불을 자랑이라도 하듯,

지글지글,

하고 질겅거리며 작은 소리를 내뿜었다.

별 특이한 것이 다 있네,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

지글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저 호롱 속 불꽃을 보고 있노라면 최소 몇 시간쯤은 멍하니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이윽고 호롱으로부터 시선을 뗀 나는 서랍에서 꺼낸 것을 앞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하나는 재상 기지어가 내게 올린 티히트라의 모나켈 건과 관련된 서류였고,

다른 하나는 매트로폴리아의 기업 중 하나였던 매킨토의 유일한 사원으로부터 받은 인장이었다.

지금 당장 이것들을 주제로 움직일 수는 없지만,

이것들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상상할 순 있다.

다시 내게 바깥을 향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렇게 주어졌을 때 이것들을 주제로 나는 어떻게 움직였을까?

전자라면 간만에 벤투스를 타고 티히트라를 방문했을 거야, 다만 비공식적으로 은밀하게.

바깥 숲에 벤투스를 둔 채 도보로 티히트라에 들어가,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수단과 방법으로 론과 접촉하겠어.

그리고 탐정인 그의 도움을 받아 모나켈과 관련된 사항을 좀 더 자세히 조사했겠지.

후자는…,

바다를 건너야 한다면,

지금쯤 걸걸한 선장이 되었을 갤리걸을 만나러 갔겠지.

그 폭력적인 파도를 처절하게 부숴가면서, 욕지거리와 함께 붙잡은 타를 휘저어가면서.

가만,

갤리걸을 만나러 가기 전에 한 번 들려도 괜찮을 거야.

그곳에 그대로 있을진 모르겠지만,

테리아.

잠깐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순 있겠지.

딱 ─

호롱불 안에서 튀긴 불똥 소리에 퍼뜩 잠긴 생각으로부터 뛰쳐나온 나는 반사적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날은 밝아져 오고 있었다.

이야, 시간 진짜 잘 가네.

얼마 안 가.

똑똑 ─

바돈만이 하는 특유의 리듬을 담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바돈, 들어오세요.”

“일어나 계셨습니까?”

공손한 자태로 모습을 드러낸 바돈은 급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엔 봉인으로 닫힌 두 개의 작은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그 봉인의 모양은,

볼록하게 튀어나온 베나즈 가문의 인장이다.

그 말인즉,

두 기사가 보낸 것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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