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35화 (335/365)

335화. 양날 (3)

두 기사.

두 과정.

그리고 두 개의 승전.

그들이 올린 보고를 통해 모든 것을 확인한 나는 직후 바돈을 불러 해당 사실을 알렸다.

곧이어 바돈은 베나즈 가문의 명의로 두 기사의 승전을 대중에게 공식 발표했다.

리케니엔의 거리는 벌써 들썩였고,

수많은 마차가 온 골목을 들쑤시듯 오갔으며.

점심이 지날 무렵, 저택 뒤편에 있는 새장은 속속들이 날아드는 전서구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붐비기 시작했다.

승전 소식을 들은 기업과 조합은 축하를 꾸미기 위해 수많은 인력을 수혈하듯 리케니엔에 쏟아냈다.

그렇게 각종 날씨 파편과 유리와 황동, 은으로 된 공예품 따위가 전시되었고 길거리 악단들은 악기를 켜며 온 거리를 쏘다녔다.

얼마 안 가,

이 저택 안에서도 찌르는 듯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집사부를 비롯한 시종들 역시 들뜬 모습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가 갑자기 빠르게 가기로 합의한 시계 속 톱니처럼 요란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나만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인가?

모르겠다.

나도 그들 사이에 맞물린 채 치열하게 움직였으면 좋겠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 난간에 기댄 채 아래 펼쳐진 리케니엔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기업의 고품질 풍선이 군데군데 두둥실 떠 있고,

부모의 손을 잡고 일찍부터 거리에 나온 아이들은 남은 한 손에 약속이라도 한 듯 솜사탕이 쥐어져 있다.

미세한 붓으로 그려낸 바탕 위로,

형형색색 묽은 수채가 덧칠된 듯한 풍경이었다.

이쯤 되니 알겠다.

승리라 하는 건 결국 저들의 것이라는 걸.

저들이야말로 쟁취한 승리를 제대로 향유 할 수 있다는 걸.

나는 기대었던 난간으로부터 뒤돌아 다시 방 안으로 향했다.

후에 따라오는 고민은 나의 몫이었기에,

지금부터 고민해도 늦었다.

자리에 되돌아와 딱 앉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방문이 두들겨졌다.

“바돈, 들어오세요.”

내 말에 벌컥 열린 문 너머로 바돈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묻어 있었다.

“공, 오늘의 일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예를 갖춘 뒤 품 안에서 유독 긴 두루마리 속 나열된 일정들을 차근차근 열거하기 시작했다.

“우선 각 영주를 비롯해 기사들의 방문이 있을 예정입니다, 다음은 베나즈 가문이 주최하는 만찬인데, 공께서 괜찮으시다면 이 부분은 과장 없이 적정선을 지키면서 진행할 계획입니다.”

이에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통보 비슷한 단호함을 내비쳐야 했다.

“오늘 일정은 모두 취솝니다. 원정군이 복귀하는 대로 그들끼리 각자 여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십시오.”

바돈은 당황한 눈치였지만,

곧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집사부가 주제를 넘어 속단한 것 같군요. 송구합니다.”

“지금의 승리가 이번 원정의 대단원인지도 불분명한 상태이니까요.”

바돈의 고개가 아까보다 더욱 내려갔다.

집사부는 어떻게 보면 베나즈 가문에게 있어 일종의 외향적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들뜸은 곧 베나즈 가문의 들뜸이 되는 거다.

하지만 반대로 저렇게 축 처진 바돈의 모습을 보니 또 이건 아닌 것 같아서.

“그러나 이번 승리가 결코 작은 것임은 아니니, 그에 따른 분위기만큼은 베나즈 가문이 주도하도록 합시다.”

작게 미소를 지은 채 말하자 바돈은 금세 고개를 살짝 들어 은은한 미소로 화답했다.

“베나즈의 이름에 걸맞게 차분하고 가볍지 않은 분위기로, 바깥 거리 자유민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게끔 조성하겠습니다.”

집사부는 집사부가 해야 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것을 두고 빡빡하게 제동을 걸기 시작하면 결국 톱니는 멈춰버릴 것이다.

* * *

9일이 흘렀다.

이날은 떠났던 원정군들이 뒷일 수습을 모두 마치고 복귀를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동시에 이쯤 티히트라 내의 분위기는 한참 고조된 상태였다.

어제 새벽 출판 기업 블레브만이 기습적으로 출간한 책 때문이었다.

[갈로샤, 그 숲을 뚫고]

그것은 기사 테티르 론바즈의 용맹했던 전투, 그리고 끝내 굽이진 성채 갈로샤를 점령하기까지의 이야기로 만든 소설이었다.

블레브만이 운용하는 최정예 작가 수십을 동원해 완성한 이 소설은 그야말로 티히트라 내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하루 만에 뜨거운 열기로서 그 결과를 내놓았다.

베르융과는 다르게 처절한 전투를 거듭해가며 승리를 향해 나아갔던 테티르의 모습은 자유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야말로 테티르는 티히트라에서 일약 최고의 기사로 주가가 껑충 상승한 것이다.

그뿐만인가,

악사들로 이뤄진 조합인 ‘이방인들’에서는 테티르를 주제로 한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술집 곳곳에선 바드들의 악기가 쉬지 않고 뜯기는 상황이다.

이러한 티히트라 내 각종 문화는 이어서 발리르에 넘어갔고, 그곳에서는 테티르와 함께했던 발리르의 기사들을 좀 더 띄워주는 식의 내용 변화가 이뤄졌다.

요함비크, 가르웨, 가르렝.

이 세 기사의 각 가문이 발리르의 주축인 걸 알고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반응은 당연하게도 굉장했다.

본디 발리르는 티히트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영지였다.

그러나 베나즈 가문이 일어서면서 두 영지의 입장은 완전 반대가 되어버렸다.

현재 티히트라는 재상의 도시로서 경제특구라는 굉장한 위상을 가진 채 끝없이 발전하는 데에 비해,

발리르는 상대적으로 묻혀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발리르가 그들의 위상을 올려줄 소식을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티히트라가 경제특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업이 일으킨 대형 사고였다.

이 아이러니함에 분해하던 자들이 발리르 내 몇이나 될까를 생각한다면,

지금의 승전은 참으로 기다려왔던 것일 거다.

* * *

“딱 봐도 알겠군요, 공께서 지금 저울 하나를 품고 있다는 걸.”

부름을 받고 찾아온 조이는 마지막으로 봤던 것보다 더 퀭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 퀭함을 뚫고 나오는 통찰력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리고 난 그의 그 날카로움을 막 그리워하던 참이었다.

“조이, 그 눈꺼풀 지금 내려가면 사흘 뒤에나 열릴 것 같은데요.”

가볍게 농담을 건네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로 내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는 공께선 꿈속에서도 지금 하는 고민을 들고 가실 것 같습니다만.”

넹.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기 일은 어떠십니까?”

“원정군의 복귀가 끝나면 지금의 두 배는 더 일이 늘어날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엄밀히 말해 할만하다고 할 수 있겠죠.”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던 그가 이번엔 진심 어린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공께서는 어떠십니까.”

“보다시피 도저히 멈추질 않는 저울을 껴안은 채 그것이 멈추길 바라고 있을 뿐이죠.”

“그래서 절 부르신 이유가 그 저울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입니까?”

“조이,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항복하듯 등받이에 상체를 있는 힘껏 쏟은 내 말에,

조이 역시 등받이에 몸을 쏟은 채 양손을 맞잡았다.

“아마도 그 저울의 좌우엔 베르융과 테티르가 있겠죠.”

“그렇습니다.”

“저도 집사부의 공식 발표 직후 건너온 관련 문건으로 알았습니다. 각 군에 벌어졌던 과정들 말입니다.”

조이는 자신이 봤던 문서를 기억해내곤 끝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그렇게 어려워하시는지 알 것도 같더군요.”

곧이어 조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지금 공께서 고민하시는 그 부분은 아이베리아의 깃발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야 하는 고민이기도 합니다. 상벌의 가늠 말입니다.”

이어 그가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그리곤 한쪽 주먹을 꽉 쥐며 말한다.

“전장을 호령한 지혜냐, 아니면.”

이어 반대편 주먹까지 꽉 쥔 그가 나를 보며 말을 잇는다.

“전장을 돌파한 용기냐. 이 둘을 저울질해 높고 낮음을 골라야 하는 건 이렇듯 골치 아픈 일입니다.”

조이의 그 말에 나는 서슴없이 토로했다.

“지혜에 무게를 둔다면, 용기로서 희생한 자들을 저버리는 것이고.”

“그렇다고 용기에 무게를 둔다면 윤택한 지혜를 빛바래게 만들겠지요.”

“조이, 맥레인이었다면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요?”

내 예상과 달리 조이는 별 고민하지 않고 즉답했다.

“용기를 선택했을 겁니다, 그는 뼛속까지 무인이니까요. 하지만 공께선 다르시지요. 0을 쥐고 계신 이상.”

“그 말은 마치 지혜를 선택하는 게 정답처럼 들리는데요.”

내 하소연에 그는 그저 웃을 뿐이다.

“그건 단지 공께서 그렇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해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조이, 기사왕이었다면 어느 쪽을 선택했을 것 같습니까?”

그러자 조이는 금세 진지한 얼굴로 날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았다.

* * *

“공께서는 두 기사 가운데 고성의 주인을 누구로 결정하실까요?”

깁슨의 물음에 기지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프실 거요. 가뜩이나 우리 쪽에서 티히트라와 발리르를 뒤흔들어 놓은 터라 더더욱.”

“공께서 이 일로 화를 내실까요?”

기지어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는 것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그저 기사가 세운 공을 기린 것뿐인데 그런 걸로 따로 화를 내실만큼 공께선 낭비적인 분은 아니오.”

그러다가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기지어가 이내 입을 연다.

“관건은 베르융 경이 지혜를 부린 그 바탕이나 수단이 되겠지. 집사부의 공식 발표 후에 전달받은 문건에서 오직 그 부분만이 누락 되어 있었잖소.”

만약 베르융의 오롯한 지혜만으로 물의 도시 발치아를 점령한 것이라면 테티르가 선택될 확률은 더욱 낮아질 거다.

그러나 외부의 힘을 빌려 만들어낸 점령이라면,

테티르 쪽에 승산이 있다.

문건에 해당 부분이 누락 되어 있었다는 것은 베르융이 직접 보고를 올리겠단 뜻.

그렇다고 고지식하고 솔직한 베르융이 거짓을 고할 리도 없다.

이 고성 레자스는 정말 중요한 지점이다.

이곳에 발을 들인 기사가,

베나즈의 후손을 성지로 안내하는 주역이 되기 때문이다.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던 기지어의 입엔 어느새 엄지손톱이 물려 있었다.

* * *

리케니엔의 거리에 수많은 환영 인파가 가득 차 있다.

슬슬 얇은 외투라도 입고 나가지 않으면 감기 걸릴 계절임에도 인파의 손에서 떠나간 꽃잎이 여느 만개한 봄철 부럽지 않게 흩뿌려졌다.

그러한 꽃잎 사이로,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온 두 기사.

그리고 그 기사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

이들은 곧장 길을 따라 깃발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이어 베나즈의 저택 담벼락을 넘어,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집사부에게 고삐를 넘겨준 두 기사가 말에서 내려 나란히 저택 정문을 향해 발을 내밀었다.

둘 사이엔 그 어떤 팽팽한 기류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명령에 따라 전투를 마치고 복귀한,

두 명의 기사만이 나란히 서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저택 홀에 당도한 두 기사가 한 남자 앞에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기사 베르융, 한시적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기사 테티르, 한시적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성공이나 승리 따위의 단어는 담지 않는다.

굳이 입에 담지 않아도 대중이 알고 깃발이 알고 있으니까.

이런 둘의 보고를 들은,

디안 베나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기사 사이로 걸어 들어가 그들의 어깨 위에 손을 얹어 주었다.

그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재상과 11인회,

바돈과 집사부 일원들.

서기관 조이, 켄타나의 엘르길.

휘하 기사들까지.

순간 기류가 멈춘 듯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디안 베나즈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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