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36화 (336/365)

336화. 양날 (4)

깁슨 제리드는 품에서 금박이 붙은 부싯돌과 연초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직후 연초에 불을 붙인 그는,

조용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베나즈의 저택이었다.

그 저택을 눈에 담은 채 들고 있던 연초를 입에 문 그는,

후.

입안 가득 품고 있던 연기를 한바탕 내뱉은 뒤 옅은 미소를 지어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연초를 크게 빨았을 때.

“깁슨 님, 여기 계셨습니까?!”

막 저택 밖으로 빠져나온 남자가 그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다가왔다.

머릿기름으로 바짝 넘긴 검은 머리,

그 아래 수확을 기다리는 과일 마냥 푸짐한 볼이 인상적인 남자는 11인회의 일원인 게인이었다.

그는 기업이나 조합에 관련된 자가 아닌 티히트라 토박이 출신으로서 과거 영주 가본 내쉬의 외가 쪽 사람, 즉 귀족이었다.

게인의 가문은 석재 광산 소유권 전반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후 모나켈의 사고와 가본의 처형을 거치며 생긴 티히트라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기지어가 그를 11인회로 포섭한 것이었다.

하지만 게인을 11인회에 들인 이유는 이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게인이 11인회로 들어온 것은 오롯이 기지어 그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

이는 바꿔 말하면 11인회라는 단체에 기지어의 권력이 개입되었단 뜻이다.

예컨대, 11인회 너희들은 언제든지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라는 간접적 표현이 내포된 것이다.

이러한 기지어의 속뜻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깁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꼬리를 치며 다가오는 게인에게 친절히 웃어주었다.

은근히 게인을 무시하는 다른 11인회와는 달리,

깁슨은 그 넓은 시야로 미래를 바라본 것이다.

비록 11인회의 성질과 동떨어진 사내이나, 그가 11인회에 소속된 자라는 건 변함없는 그리고 변치 않는 사실.

바꿔 말하면,

이런 상황에서 그를 품는 건 말 그대로 11인회 확정적인 하나의 지지와 하나의 의결권 얻는 것과 다름이 없다.

거기다 게인을 품는다는 건, 재상의 권력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것과 같기에 약간의 친절함을 베푸는 것쯤이야!

요약하자면 재상이 게인에게서 양면적 이득 노렸듯이,

깁슨 역시 게인에게서 양면적 이득을 노렸다 이 말이다.

무엇보다,

“따로 알려주셨다면 제가 연초 시중을 들었을 텐데요!”

깁슨에게 있어 게인은 다루기가 너무나도 쉬운 사람이었다.

게인은 사업적 소양은 없었지만 귀족답게 조직 내 분위기를 읽는 눈치 하나만큼은 수준급이다.

그는 단번에 깁슨이 11인회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인 것을 알아차렸고,

줄곧 이렇게 깁슨에게 어떻게든 접점을 덧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개를 숙인 채 실실 웃는 게인을 내려다보던 깁슨은,

미소를 그린 채 피고 있던 연초를 허리춤에 달린 개인 재떨이에 비벼 꺼 넣었다.

“새로 피면 그만이지요.”

그렇게 깁슨이 새 연초를 꺼내 들자 게인의 얼굴엔 금세 웃음꽃이 피었다.

“이것 참, 영광입니다.”

고개를 팍 숙인 채 재킷 안주머니에서 나무 상자를 꺼낸 게인은 그 안에서 개별로 정성스레 진열되어 있던 성냥 한 개비를 꺼냈다.

현 시세로 한 개비에 금화 여덟 개에 육박하는, 화약을 위시한 사치품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파악!

하는 소리와 함께 성냥 머리가 뜨겁게 찰랑거린다.

서둘러 깁슨의 연초에 불을 붙인 게인은 휘발된 금화 여덟 개짜리, 아니 지금은 검고 작은 불쏘시개가 되어버린 그것을 휘휘 흔들어 껐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깁슨은,

“게인, 다음부터는 부싯돌을 들고 다니는 게 좋겠습니다.”

입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점잖게 얘기했다.

“부싯돌 말입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한 게인의 반응을 깁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11인회 내에서 은근한 무시를 받는 신세인데, 그들 모두가 쓰는 사치품조차 쓰지 않는다면 얼마나 자신을 업신여기겠는가.

그러나 깁슨의 다음 말은 게인의 그러한 논점을 완벽히 파훼해버렸다.

“공께선 부싯돌 사용하길 선호하시니까요.”

“아.”

11인회 내 괄시와 무시는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애초에 비등한 뒷배를 바탕삼아 모인 단체가 바로 11인회다.

서로가 서로에게 견제가 될 수 있는 그런 단체.

그 안에서 알량한 알력 다툼을 위해 소비를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다.

중요한 건,

위에 있는 것.

절대 비등해질 수 없는 그 위의 존재들.

그들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결국 결정적 판가름을 낳는다.

깁슨의 이 말은 게인에게 굉장히 좋은 조언이었지만, 동시에 게인에게 이러한 의문을 낳게 했다.

당신은?

엄밀히 말해 당신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11인회와 비등하지 않는 자잖아?

제리드라는 무지막지한 기반 위에 우뚝 선 사람이잖아.

하지만 거기까지.

단순한 게인의 생각은 여기서 딱 그쳤다.

그가 내놓은 결론은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구나, 였다.

“참, 깁슨 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깐의 생각으로부터 퍼뜩 정신을 차린 게인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깁슨에게 물었다.

“공께서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

자연스레 본론으로 넘어가자 깁슨은 그저 말없이 미소지은 채 연초를 흠뻑 들이켜야 했다.

직전,

복귀한 두 기사를 반겨주었던 디안 베나즈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은 고성 레자스의 향방에 온 귀추를 주목하고 있었던 재상을 비롯한 11인회 모두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기도 했다.

아니, 심지어는 당사자인 두 기사에게도 충격이었을 거다.

아니다, 그래.

어찌 될진 모르겠지만 미래의 아이베리아에게도 거대한 충격을 줄 발언일 지도.

“글쎄요, 그 말에 누가 섣불리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겠습니까?”

확실히 범상치 않구나,

그리고 덕분에 재밌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담은 미소로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던 깁슨은 마지막 한 모금을 끝으로 연초를 꺼트렸다.

* * *

아직 땀내조차 닦아내지 못한 채,

두 기사가 마주 앉아 있다.

베르융 오르테, 그리고 테티르 론바즈.

둘은 속 갑옷인 사슬조차 제대로 벗지 않은 모습으로 묵묵히 술잔을 나누었다.

그렇게 서로 다섯 잔 정도를 나눴을까,

테티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베르융, 오늘 나는 보았네.”

이에 베르융이 테티르의 빈 술잔을 채워주며 답했다.

“무엇을?”

“그 전에.”

베르융이 채워준 술잔을 움켜쥔 테티르는 비장한 얼굴로 되물었다.

“자네에게도 묻고 싶네, 나와 같은 것을 보았는지.”

그 말뜻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을 거라는 듯 말하는 테티르에게 베르융은 부드럽게 돌려 시치미를 뗐다.

“그러니까 무엇을 보았는지 말해주어야 내 대답을 해주지 않겠어.”

픽,

테티르는 두꺼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어서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나는 오늘 에르앵님을 보았어.”

그러자 베르융 역시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 난 디안 베나즈를 보았네.”

그 말에 테티르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장고에 빠졌다.

방금 술로 적신 입술이었건만, 벌써 쩍쩍 갈라져 있다.

그래서 움켜쥔 술잔을 그대로 기울인 테티르는 작은 탄식과 함께 말을 이었다.

“같은 자리에 있었으니 자네도 들어겠지, 오늘 공께서 하신 그 말씀을 말이야.”

테티르의 이번 물음에 베르융은 작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자네와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 못 들었을 리가 없잖는가.”

그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테티르는 술잔을 꽝 내려놓은 뒤 다시 물었다.

“기사왕이셨네.”

“그리 결정하신다면 그리되겠지, 다만 지금은 베나즈 가문의 디안 공이시네.”

베르융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테티르를 노려보았다.

“자네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을 공께 넘기지 말란 말이야.”

그 눈빛에 테티르는 약간 움찔거렸지만,

별안간 다시금 눈을 부릅떴다.

뒤이어 애써 꾸며낸 목소리로 일장 연설을 시작하는 테티르.

“이번 승전을 기점으로 베나즈의 이름 아래 다섯 기사를 지칭할 것이다. 고성 레자스는 그 다섯 기사를 잇는 원탁으로서만 존재할 것이며 나아가 베나즈 가문을 수호하는 방패로서 기능할 것이다.”

그 끝엔 스스로 감격한 듯 울컥한 모습을 보였다.

베르융은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어있는 테티르의 잔에 재차 술을 따라주었다.

“그분의 목소리에 비하면 끔찍하기 짝이 없군.”

“흥 깨지 말게.”

“자네 때문에 깨진 내 흥은 어쩌고?”

테티르가 탁상을 팍 내리치며 활기차게 묻는다.

“맞지? 자네도 신이 나 있었던 게야! 그렇지?”

그의 물음에 베르융은 다시 또 시치미 떼는 표정으로 태연히 자신의 술잔을 기울였다.

“칠기사의 재림에 자네 역시 기뻤던 거야!”

하지만 테티르의 재차 이어진 발언에 베르융은 다시금 날카로운 눈빛을 드러냈다.

“테티르, 말해 보게. 레자스에 대한 야망이 있었지?”

역시 테티르는 감추는 것 없이 당당히 답했다.

“있었지, 마땅히 주어질 것으로 믿었고.”

베르융이 예상한 대로였을까, 테티르의 그 당당함을 지켜보던 베르융은 졌다는 듯 털털히 웃었다.

술 냄새가 조금 올라오기 시작했을까,

곧이어 테티르가 하소연 비슷한 이야기를 내뱉었다.

“나는…, 증명해야 하네. 모든 것이 내 불찰이었어. 그러니 더욱 보여주어야 해. 진 빚을 갚아야 한단 말이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르융이 의표를 찔렀다.

“베나즈의 이름에 진 빚인가, 아니면 칠기사로서 기사왕에 진 빚인가?”

이에 테티르는 처음으로 즉답하지 못했다.

그저 어느새 메말라버린 입술을 적시기 위해 혀를 낼름거릴 뿐.

베르융은 말했다.

“자네나 나나 모두 기사로서 실패했어. 그 실패로 인한 추락이 결과지. 결과에는 진 빚도, 갚아야 하는 빚도 없는 법이야.”

“없다고? 그게 무슨…!”

“남는다면 그건 죄책감일 거다.”

술잔을 쥐고 있던 베르융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테티르 넌 베나즈 가문이 짊어져야 했던 오명이 얼마나 무거운지 아직 몰라. 너는, 우리는 베나즈에 빚을 진 거다. 그러니 기사왕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원동력으로 우린 그 빚을 갚아야 해.”

“그럼 칠기사는? 내가 섬겼던 기사왕은?”

“결코 디안 베나즈가 대신할 수 없어, 하지만.”

“하지만?”

베르융이 빈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디안 베나즈가 될 수는 있지.”

“대체가 아닌, 신생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분께서 공표하신 다섯 기사처럼.”

테티르는 숙연한 얼굴로 이번엔 베르융의 빈 술잔을 채워주었다.

이 자리에서 이 두 기사의 생각이,

하나의 공통으로 맞물릴 거란 생각은.

두 사람 모두 다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한 줄기 공감쯤은,

나누었기에.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테티르는 마저 자신의 술잔에 직접 술을 따른 뒤 잔을 들어 올렸다.

이 역시 알겠다는 듯,

베르융은 깊은 눈빛으로 그가 내민 술잔에 부딪혔다.

* * *

“바돈, 아니 시종장.”

베나즈의 저택, 접견실 앞.

미리 대기하고 있던 바돈의 앞에 한 남자가 다가온다.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온 그 남자의 등장에,

“재상, 공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바돈은 곧바로 닫힌 접견실 문을 두들겼다.

그렇게 열린 접견실 너머로 발을 들인 재상, 기지어는 자신을 반기는 디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공.”

“기지어, 앉으세요.”

기지어는 곧바로 디안이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사실, 오늘 있었던 승전 기념식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 기지어의 예상대로 흘러간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기지어는 아직 뒤통수가 얼얼한 상태였다.

거기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어.

고성 레자스에 초점을 맞추며 일을 진행해 왔었는데, 그것을 기사 공동의 전유물로 돌려버림과 동시에 과거 아이베리아의 굵직한 줄기였던 군사 체제의 부활을 알릴 줄.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

기지어는 이제 경이로움을 느끼며 디안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디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본론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한번 기지어의 뒤통수를 때렸다.

“다섯 기사 가운데 두 자리는 재상 측에서 준비해 주십시오. 세의 몰림보단 균형을 노리는 것이 대국적으로 길게 갈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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