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복원
티히트라 성관 앞,
직전까지 조용했던 그곳은 별안간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마차들로 인해 순식간에 번잡스러워졌다.
그렇게 성관 앞에 일제히 멈춘 마차들,
그것들은 모두 고급스러움을 내뿜고 있었다.
이윽고 약속이라도 한 듯 기수들이 내려와 손수 마차 문을 열어젖히면,
그 안에서 빳빳한 양복을 걸친 자들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다림질의 따듯한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지, 온후한 냄새를 흩뿌리며 바삐 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표정은 그러나,
그 냄새완 걸맞지 않은 불안함으로 가득했다.
이내 마차에서 내린 다섯 장정이 성관으로 진입하려는 그때.
뒤늦게 한 남자가 촐싹거리는 걸음으로 그들 뒤를 부랴부랴 쫓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 남자는 게인,
11인회의 일원이자 조직 내 유일한 귀족 출신.
아직 여미지 못한 양복 단추를 뒤척이며 황급히 앞서 나간 다섯 장정에게 질문을 던져보지만,
같은 11인회 일원들인 다섯 장정은 그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앞서 나갈 뿐이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은 게인에겐 익숙한 것이었는지,
그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조용히 단추를 마저 여민 채 벌써 저만치 떨어져 있는 그들 뒤를 따랐다.
성관 내부,
거대한 회의실로 향하는 복도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렀다.
시종들은 경직된 표정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재상의 서기인 조엘조차 복도 가운데서 어두침침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조엘은 곧 복도로 들어선 다섯, 아니 뒤따라 들어온 게인까지 합쳐 총 여섯을 발견하기 무섭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셨습니까, 재상께선 회의실 안에 계십니다.”
조엘의 그 말에 그들은 한결같이 품에 있는 회중시계나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조엘이 재차 말을 이어갔다.
“미리 들어가 계신 것뿐입니다, 아직 시간 여유는 많습니다.”
그의 말에 숙변이라도 처리한 듯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들 얼굴이 일순간 활짝 피었다.
잠깐의 여유를 확인한 이들 중 셋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성관 복도 외곽 쪽 정원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살피던 게인은 재킷 속주머니를 어루만지다가,
끝내 저 혼자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그의 모습 역시 확인하고 있던 조엘은 조용히 그에게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게인님, 회의실 안에 깁슨님도 와 계십니다.”
“그렇습니까?”
게인은 11인회 내에서 유일하게 조엘에게 존대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렇게나 무지하나 순박한 그의 성정을 조엘은 좋게 보고 있었기에 이렇듯 간간이 챙겨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게인은 조엘에게 꾸벅 인사를 올린 뒤 회의실로 향했다.
그런 게인의 어깨너머 복도 외곽 정원에선,
막 머리를 맞댄 세 명 사이로 화약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 *
“긴급 소집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11인회, 제약회사 로엄의 회장 라운.
중년, 단안경에 왼쪽 뺨에 피어난 검버섯이 인상적인 백발의 남자.
그의 입에서 갈색 연기가 풍성히 피어올랐다.
“얼마 전에 있었던 베나즈 가문의 발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대꾸하는 이는 11인회, 물류운반 회사 캐란의 회장 데버.
30대 중반, 조직 내 젊은 피에 속하는 그의 머리는 이질적인 붉은색을 자랑했다.
그런 그의 입에선 방금 빨아들인 연초의 한 모금인 황색 연기가 흠뻑 튀어나왔다.
“아니지요, 그것 때문은 아닐 겁니다. 소문으로는 승전 기념식이 끝난 직후 공께서 재상과 독대하셨다고 하더군요.”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 또 다른 이야기를 낳는 자.
11인회, 출판 기업 블레브만의 회장 설리엄.
희끗희끗한 머리, 매부리코, 금테 안경.
그의 입에선 잿빛 연기가 피어오른다.
설리암의 말꼬리를 이은 것은 라운이었다.
“11인회를 긴급 소집할 정도라면 보통 내용의 대화는 결코 아니었을 테지요.”
이에 데버가 비릿한 웃음을 지며 자조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곧 알게 되겠지요, 이제 가봅시다.”
직후 셋은 사이좋게 연초를 꺼트린 뒤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회의실 쪽으로 걸음 했다.
* * *
“여러분들을 긴급 소집한 것은 다름 아닌 공께서 직전에 공표하신 다섯 기사와 관련한 문제 때문이오.”
회의실.
상석에 앉아 있던 기지어가 그의 앞, 탁상에 둘러앉은 11인회에게 말했다.
이후 긴 서두를 시작할 줄 알았던 11인회의 예상이 무색하게, 기지어는 독대와 관련한 이 소집의 본론을 대뜸 꺼내 들었다.
“공께서는 다섯 기사 가운데 두 자리를 우리 쪽에서 준비하라고 하셨소.”
그의 그 말에 조용했던 장내는 순식간에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올랐다.
깁슨마저도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신의 오른팔 격으로 삼은 11인회의 일원,
연금 조합 대표인 말라인과 어떤 귓속말을 급히 주고받았다.
일련의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기지어는 태연한 표정으로 웅성거림이 잦아들길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장내가 침묵에 젖어 들었을 즈음.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탁자 위에 던지듯, 툭 하고 질문을 내밀었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설리엄이었다.
“기회이지 않습니까, 공께서는 우리에게도 공평한 장을 열어주신 겁니다.”
그의 의견에 직전, 같이 연초를 피웠던 라운과 데버가 호응했다.
“공께서는 가문의 적극적인 저변 확대를 노리시고 계신 겁니다.”
“맞습니다, 그렇기에 다섯 기사의 활동 확장력을 위해 각 영역에 등용문을 연 것이겠지요.”
확실히 맞는 말이다.
한 점의 권력으로 만들어진 단체는 경직적일 수밖에 없는 특성상, 다섯 기사라는 특수한 성격의 조직에는 유연함이 필수다.
그렇게 봤을 때 재상 쪽에서 두 자리를 맡은 것은 어찌 보면 필수적인 선행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건 표면상의 이야기고.
고개를 끄덕이던 기지어는 그 고갯짓과는 어울리지 않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깁슨 쪽을 바라보았다.
할 말 없냐? 하는 듯이.
깁슨은 당연히 할 말이 있었다.
그것도 기지어의 가려운 부분을 정확히 긁어줄 수 있는.
기지어의 눈빛에 부응하듯 깁슨은 이내 작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 기지어는 적극적으로 팔을 뻗어 깁슨을 지칭했다.
“깁슨님, 말씀하시죠.”
지칭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깁슨,
그는 자리에 앉기 위해 풀었던 단추를 다시 잠그며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께서 주도하신 것인지, 아니면 그 뒤에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위인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섯 기사와 관련한 부분은 공께서 우리에게 던지신 질문이자 압박입니다.”
그제야 기지어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탁상에 둘러앉아 있던 이들은 다시금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리기 바빴다.
11인회, 다목적 기업 레그놀라의 회장 밀러는 이번엔 순수한 궁금증을 드러내며 깁슨에게 물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깁슨은 즉답했다.
“공께선 우리에게 다섯 기사 가운데 두 자리에 대한 임명권을 맡기셨습니다,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두 자리가 아닙니다.”
“두 자리가 아니다?”
의문을 표한 밀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금방 알아챘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그럼에도 아직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있음을 발견한 깁슨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두 자리에 대한 임명권 부여는 바꿔 말하면 재상을 비롯한 11인회에게 누굴 뽑을 거냐 질문하는 거나 다름없지요.”
“그래서요?”
데버가 눈썹을 찌푸리며 갈피를 못 잡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깁슨은 무표정한 얼굴로 설명을 계속했다.
“우리가 직접 선택해야 한단 말입니다.”
“뭘 말입니까?”
이어지는 라운의 질문에 깁슨이 그를 노려보며 짧게 대답했다.
“테티르 경을요.”
직후 찾아온 무거운 침묵.
“베르융 경과 테티르 경이 다섯 기사 가운데 두 자리를 꿰찰 거라는 당연함, 우리는 그 당연함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아까와는 달리 허옇게 질린 라운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테티르 경을 우리가 직접 뽑지 않는다면, 다섯 기사 자리에 오르지 못할 거란 말입니까?”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공께서는 우리에게 질문과 압박을 동시에 하셨다고.”
뒤늦게 깁슨이 말하고자 하는 베나즈 가문의 저의를 확인한 라운은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야만 했다.
“테티르 경은 우리의 손으로 뽑아야 합니다, 고로 우리가 가진 다섯 기사의 임명권은 실질적으로 한 자리뿐이지요.”
깁슨의 그 말을 끝으로,
기지어가 손뼉을 한 번 치며 혼란해진 장내를 환기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깁슨님.”
깁슨은 그에게 예를 갖춘 뒤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보시다시피 우리에게 주어진 임명권은 곧 뒤집어 놓고 있던 패 두 장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남은 하나의 패겠지요.”
방금까지 질문이 오갔던 탁상 위는 이제 어색한 침묵만이 켜켜이 쌓일 뿐이다.
“재상과 11인회는 테티르 경을 보조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 노골적인 패를 깠다면 남은 하나의 패는 어떤 모양새를 갖춰야 할 것 같습니까. 같은 노골적인 모양새의 패여야 할까요?”
몇몇이 답변을 할 낌새를 보였지만,
그것을 일축 시키듯 기지어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두 번째 패는 달라야 합니다. 내부적 관계에 놓여있지 않은 그런 기사를 물망에 올려야겠지요.”
기지어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두 번째 패에 집중해야 합니다, 물망에 올린 기사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뒤집어 깐 두 번째 패의 뒷면에 도리어 그것을 감추어야 하겠지요.”
있지도 않은 카드를 뒤집는 시늉을 하던 기지어는 도리어 뒤집혔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뒷면을 강조했다.
결론은,
기지어 특유의 대범함이었다.
“우리도 예상치 못한 패를 내놓읍시다.”
밀러가 답했다.
“예상치 못한 패라 하시면…?”
뒤이어 설리엄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동쪽, 펠라지스 함대 쪽에 아는 기사들이 여럿 있습니다. 남부 기사 출신의 용병들도 있고 기사 출신의 엔트로피도 원정협회에 문의해보면 걸출한 인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대범하게 거는 도박 수보다는,
안정적인 수를 쓰는 것이 어떻겠냐는 듯이 말이다.
물론 기지어가 그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그딴 안정적인 수를 써 봐야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까.
큰 것을 얻기 위해선,
그만큼 큰 것을 잃기 위한 각오가 필요한 법.
기지어는 약간의 생각 끝에 이미 이전부터 물망에 올렸었던 인물을 거론했다.
“에커즈 기사단, 아리나 경이 어떻겠습니까.”
* * *
깁슨 제리드의 수석 경호원,
제이 팔기어.
그가 회의장 바깥, 대기실에 앉은 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그것은 수첩,
수첩이었다.
항상 품 안에 들고 다니며, 또 언제나 홀로 펼쳐 보았던 그것.
수첩의 재질은 기괴한 느낌이 들 정도로 서늘하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렇게 펼쳐진 갈피 안.
제이는 ‘잉크를 머금지 않은 촉 펜’으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깁슨은 회의를 진행 중입니다.]
잉크를 머금지 않은 촉 펜 끝엔 왜인지 붉은 글씨가 맺혔다.
잠시 후.
제이가 쓴 붉은 글귀 아래.
똑같은 붉은 글귀의 문자가 맺히기 시작했다.
[잘 해내고 있겠지. 그의 이상 회로는 말 그대로 이상적인 것으로 이뤄져 있으니까.]
그 문자에 피식 웃은 제이는 답변하듯 조심스레 수첩 안에 글씨를 새겼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끝으로,
슬슬 회의실 안이 시끄러워지는 걸 확인한 제이는 수첩을 고이 접어 자신의 품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