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복원 (2)
조이의 조언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직면한 상황을 다음 일의 포석으로 삼는 것.
칠기사의 부활을 알리는 다섯 기사의 공표는 지금의 나에게도, 기사들에게도 아주 좋은 명분이자 빌미였다.
말 그대로 직면한 상황을 유연하게 해결함과 동시에,
다섯 기사라는 후일 도모의 대형 포석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재상 쪽 세력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었다.
조이는 이 역시 필요한 일이라고 했지만, 글쎄.
아직 정치적 영역은 잘 모르겠다.
중도만을 편식하고 있는 나에겐 낯선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나도 안다,
이러한 편식이 주위를 괴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어찌 되었든 재상과 재상을 따르는 11인회에 견제가 한 번쯤은 필수적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래도 꽤 유한 방법으로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리케니엔이 참 썰렁하다.
베르융 경과 테티르 경은 리케니엔에 복귀한 지 8일 만에 전선 유지를 위해 다시 군을 이끌고 나갔고,
마찬가지로 엘르길 경과 조이 역시 레자스의 복원을 추진하기 위해 사병과 기술자들을 대동한 채 떠났으며,
바돈은 다음 달까지 저택 내부 구조 개편을 위해 집사부를 대동해 원정 시장에 나섰다.
떠나기 전 베르융 경의 주선으로 기사 크녹스와의 만남까지 나흘의 여유가 있는 지금.
별달리 고민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자유다.
자유의 냄새가 폴폴 난다.
세라가 손수 지어준 후드를 팔에 걸친 채 밖을 나섰다.
그러면 복도에서 근무 중이던 시종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내게 다가온다.
“외출하시는 겁니까? 말을 준비해드릴까요? 행선지는…,”
“괜찮습니다.”
“수행 인원은 몇을…,”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애써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집사부 내 정해진 규정에 따르려는 그의 모습을 보니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이는구나.
“저 혼자서도 괜찮습니다, 아.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몰래 나갈 예정이니 다른 이에겐 비밀로 해주십시오.”
내 부탁에 그의 얼굴이 비장함으로 가득찼다.
저런 감정을 일으키려고 한 소리가 아니었는데.
그는 이제 사명을 부여받은 듯 턱이 갈라지도록 이를 씹은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복도를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각오에 가까운 결심에 나도 모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렇게 그를 뒤로한 채 계단에서 내려와 정문이 아닌 옆쪽 열린 대형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나는,
외진 구석 쪽 담벼락을 넘어 북적임이 느껴지는 길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날씨가 차다.
이 차가움의 서론을 느끼고 있노라면 본론인 올겨울은 유독 추울 것 같다.
후드를 푹 눌러쓴 채 넓은 거리 안으로 발을 들이자 리케니엔의 융성한 길거리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정말 많이 바뀌었네.
마지막에 거닐었었던 그때 리케니엔의 모습조차 남아 있지 않아.
딱딱.
구두 코로 잘 포장된 도로를 두들겨 보았다.
이전까지 이곳은 말랑한 흙길이었는데.
고개를 돌리니 줄지어 늘어선 건물 앞 외벽이 눈에 띄었다.
벽돌색이 참 이쁘다.
시선을 돌릴 때마다 색들이 오묘하게 바뀌는 것이,
꼭 조개 속 껍데기에 묻은 무지개를 관찰하는 것 같다.
길 건너편,
간이로 차려진 가판대에선 정말 온갖 것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그런 가판대 사이,
한 젊은 남자가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는 게 눈에 띄었다.
등에 거대한 가방을 짊어진 그는 신선한 물품만을 취급하는 가판대에만 들렀는데,
알고 보니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추위 파편을 배달하는 자였다.
바쁨 속 피어난 또 다른 바쁨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지만, 어디 가서 이 만큼의 활력을 목격할 수 있을까.
긴 길을 지나 다음 구획으로 넘어가자,
이번엔 제법 차분한 분위기의 거리와 마주쳤다.
색 입힌 벼락 파편을 조명 삼아 차려진 양장점 안엔,
깐깐한 손님과 직원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소녀는 어느 남자의 구두를 닦는 데에 열중했고, 그 뒤의 소년은 다음 손님을 물색하기 위해 바삐 눈알을 굴렸다.
이 거리서부턴 고풍적인 의상을 입은 자유민들이 많이 보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은은한 여유로움을 가지고 있었으며, 개마다 다른 향수를 뿌렸는지 각기 다른 향기를 흘리고 다녔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겪고 있는 세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직전 어느 기사와 검을 나눴었던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처럼 눈에 보이는 수많은 일상은,
내겐 보석처럼 반짝여 보였다.
먹먹한 감정을 뒤로한 채 차분한 거리를 빠져나와 다시 시끄러운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돌연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춘 곳 그 앞엔,
주근깨 가득한 소녀가 가판대 위에 걸터앉은 채 지루함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그러다 나와 눈을 마주친 소녀는 고양이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다가,
후드 속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활짝 웃으며 반겨주었다.
“여덟 방향에서 수입해 온 각종 소식지가 있는데, 사시겠어요?”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능숙한 영업적 말투.
그러고 보니 나, 현금이 있었나?
옷에 달린 주머니를 전부 뒤적거려봤는데 웬걸.
누군가 넣어준 듯한 금화 세 개가 손에 잡혔다.
바돈, 세라.
둘 중 누구든 고마워요.
“한 부씩 다 주렴.”
내 말에 소녀는 걸터앉은 가판대에서 튕겨 나오듯 내려와 두 눈을 반짝였다.
“한 부씩 다요? 오늘 세상을 전부 읽으실 생각이에요?”
재밌는 말이네.
“오늘은 시간이 많거든.”
그녀는 내가 말을 바꿀까 허겁지겁 가판대에 꽂힌 소식지들을 하나하나 뽑아 들었다.
“총 11부에요! 가격은 은화 22개!”
작은 두 팔 안에 한가득 소식지를 안아 든 소녀의 말에 나는 가판대 위 금화 하나를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러자 소녀의 주홍빛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어…, 제가 드릴 잔돈을 마련해 드릴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잔돈은 됐어, 어때. 너도 오늘은 시간이 많을 것 같지 않니?”
내 말에 소녀는 입꼬리를 활짝 올리며 날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그럴 예정일 것 같아요.”
“그거 다행이네.”
소식지를 건네받은 직후 뒤돌아 걸음을 옮기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면.
잔뜩 신이 난 소녀가 가판대를 접고 있다.
* * *
공용 정원 구석, 낡은 의자에 앉아 구매한 소식지들을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특보, 가수 페리앙의 새로운 염문]
[르벨린, 제 2회 아이베리아 순회공연 개시]
[플레시타, 최고의 별이 지다. 화약 장례식으로 최후까지 유별남을 자랑.]
제일 앞장에 있었던 건 연예계통의 소식지였군.
이런 데에 무지할 정도로 관심이 없었지.
지금부터라도 작게나마 관심을 가져야겠어,
자유민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들 세상이 동떨어지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 연결고리로서 문화 체험만큼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나중에 이것과 관련해서 바돈에게 물어봐야겠다.
다음은…,
[미녀 기사 특집, 지지 않는 장미 벨라]
[미녀 기사 특집, 에커즈의 아리나]
[미남 기사 특집, 융단의 블리뵈]
이건 뭐 하는 소식지지?
[아이베리아 기사 열전]
제목만 거창하지 내용은 순 소비하기 딱 좋은 가십거리네.
음…,
그런데 이거 재밌다.
익숙한 이름도 하나 보여서 그런가.
에커즈의 아리나, 냉소적인 미녀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그녀는 고산처럼 무뚝뚝한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려했던 그녀의 성격과는 달리, 우리의 취재 요청에는 흔쾌히 수락해주었는데 알고 봤더니 우리 쪽이 기사단과 관련해 적대적 단체에 공표를 보내주는 대행사인 줄 알았단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백치는 약한 자에겐 약점이지만,
강한 자에겐 매력이니까!
킥킥.
아이베리아에 이런 가십거리가 돌아다닐 줄은 몰랐는데, 신기하다.
다음은 무려 바다 건너 땅에서 온 소식지다.
그야말로 온갖 잡다한 내용이 즐비해 볼거리는 가장 많았는데, 대부분이 광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가령,
[최고의 만병통치약! 아이의 울음까지 고칩니다!]
[최고의 만병통치약! 늙은이의 까먹음까지 고칩니다!]
이런 허무맹랑한 광고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눈여겨봤던 옆집 여자가 자연히 당신 옆에 타 있을 겁니다.
- 엠블레벤 마차 - ]
[말도 고급을 알아봅니다, 말에만 돈 쏟아부으며 자위하던 당신! 여기가 종점입니다,
- 엠블레벤 마차 - ]
이게 광고인지 눈 찌푸리게 만드는 힐난인지도 모를 공격적인 문구들까지 심심치 않게 보였다.
기업 특유의 광기는 메트로폴리아에서 머무른 채 멈춘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 같네.
해당 소식지의 다음 장을 펼치자 그제야 제대로 된 기삿거리들을 읽을 수 있었다.
바다 건너 땅의 소식이라서 그런지,
하나하나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생소하고 재밌었다.
그렇게 눈으로 스쳐 핥듯 기사들을 읽어내려간 뒤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는 그 순간,
수없이 스쳤던 단어 가운데 단 하나만이,
그 하나만이 내 눈에 잔상처럼 남아서.
그래서 나는 넘기려던 손을 퍼뜩 멈춰야만 했다.
심장은 급히 뛰기 시작했고,
내 눈에 잔상을 새긴 그 단어를 찾기 위한 초조함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어디 있었지,
어디서 보았었지.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해당 면을 샅샅이 찾아낸 결과 끝에.
찾아냈다.
잘,
지내고 있었구나.
그리웠던 내 가족.
[로스베 최초 만점 합격, 비질라]
* * *
“히야…, 이곳이 바로 말로만 듣던 13고성 중 하나인 오비스란 말입니까?!”
설리엄이 혀를 내두르며 전방에 펼쳐진 장관을 훑어보았다.
비늘을 두른 듯한 드높은 황색 성벽.
그리고 오비스 최고의 자랑인 4중 성문은 그 건축물의 자태만으로 놓고 봐도 누구든 경이로움을 느낄 정도였다.
이러한 고성 오비스의 성문으로부터,
마중을 나온 기사단의 등장에 설리엄은 연신 감탄해야만 했다.
“이것이 에커즈 기사단…, 이런 보석이 고성 속에 꼭꼭 숨어 있었군요.”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에커즈 기사단을 직접 본 그의 감탄은 그러나 그리 깨끗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기지어가 그를 노려보았다.
“꼭꼭 숨어 있기는, 진즉에 이 일대를 평정한 기사단이오. 그 비릿한 말실수 하나만 잘못해도 머리 가죽이 벗겨질 테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기지어의 엄포에 설리엄의 얼굴은 급격히 창백해졌다.
이후 그는 입에 접착제를 바른 듯,
고개를 숙인 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마중 나온 기사단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기지어의 오른편에 있던 깁슨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떤 국면이 될지 기대되는군요.”
이에 동감하듯, 기지어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게나 말이오.”
곧,
다가온 기사단의 선두가 유려하게 고삐를 놀려 기지어 앞까지 다가온다.
“베나즈의 재상께서 직접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정형 해놓은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한 여기사.
그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기사의 예를 갖춘 약식 인사를 기지어에게 건네며 자신을 소개했다.
“에커즈의 1기사, 마리아라고 합니다. 아리나 경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의 말에 기지어는 아까의 긴장은 어디 갔는지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응답했다.
“이리 환대해주니 고맙소, 모쪼록 진지하게 나눌 이야기가 있어 이렇게 갑작스럽게 걸음 할 수밖에 없었지. 이런 결정에 부랴부랴 제식을 부려야 했던 기사단 내외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건네고 싶소.”
그의 말에 그 조각 같던 마리아의 얼굴에서 제법 싱그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덕분에 겸사겸사 군기도 확립하고 좋지요.”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그녀가 뼛속까지 군인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마리아는 즉시 말머리를 돌렸다.
동시에 뒤따르던 기사단이 양옆으로 갈라졌고, 기지어와 11인회는 그 사이로 발을 들인 채 묵묵히 마리아를 따랐다.
거대한 두 화살표가 이제 곧,
마주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