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39화 (339/365)

339화. 복원 (3)

아리나는 검은색 정복 차림으로 자리에 나타났다.

자리에 앉아 있던 기지어는 그녀의 등장에 맞춰 부랴부랴 일어나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아리나 경, 이리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인사에 여유롭게 손을 내밀어 자리를 권한 그녀는,

“반갑습니다.”

퉁명한 듯하면서도 그녀 특유의 무뚝뚝한 성격이 잘 드러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게 아리나가 자리에 앉자 뒤따라 기지어와 동행한 11인회 모두가 착석했다.

이들이 둘러앉은 탁상 뒤편엔 에커즈 기사단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도열해 있었기에,

11인회 중 몇몇은 그런 그들의 경직된 모습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아리나가 작게 손을 들어 젓자,

기사단은 기다렸다는 듯 차례로 열을 맞춰 회장을 빠져나갔다.

일련의 행위로 이곳의 권위가 어디를 점 삼아 세워졌는지를 확인시켜줄 요량이었을까?

아니, 아리나의 성격상 그것은 아닐 것이다.

기지어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깁슨을 포함한 다섯 정도를 제외하곤 나머지 11인회가 그녀에게 압도당했다는 건 사실이다.

“오늘 새벽, 전서구를 통해 소식을 접했습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리나였다.

“그렇다면 제가 이곳에 온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계시겠군요.”

이를 맞받아치듯 기지어가 묻자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듯 탁상 위엔 한참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윽고 아리나는 턱을 괸 채 한층 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 칠기사에겐 아주 많은 적이 있었지요. 숙적이라 물릴만한 불세출의 기사들 말입니다.”

기지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섯 기사가 칠기사의 답습이라면, 그에 따른 난적의 등장 또한 예정된 일이겠죠.”

아리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지어를 찔렀다.

“재상, 당신은 지금 이 땅에서 손꼽을 만한 부담과 그에 따른 감당의 전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기지어가 이곳에 온 근원적인 목적,

그 의표를 찌르는 아리나의 말에 옆에 있던 깁슨조차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단순히 정치적 목적의 파벌 같은 가벼운 것이 아니란 소립니다. 그 다섯 기사라는 것은 말입니다.”

아리나는 괴고 있던 턱에서 손을 뗀 뒤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기지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아리나와 마찬가지로 편하게 자세를 고쳐 잡은 뒤 정면으로 맞섰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릅니다. 가볍지 않단 말입니다.”

기지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편한 한쪽 다리 탓에 그 모양새는 엉거주춤했지만,

아리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표정으로 기지어를 올려다보았다.

“경께서는 제가 가벼워 보이십니까, 이 자리에 찾아와 이 상황을 논하고 있는 제가 진정 가벼워 보이느냔 말입니다.”

비꼬는 것이 아니다.

기지어는 오롯한 순수함으로 물은 것이다.

이에 아리나는,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애써 숨긴채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상, 당신은 가벼워 보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기지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기지어는 마치 의회를 이끄는 발언가처럼 설파하기 시작했다.

“두 발 걷는 자들 가운데 유독 우매한 자들이 많은 이유는 특정 단어에 대한 선입견에 매몰되기 때문입니다. 파벌, 정치, 그런 단어에 느낀 부정에만 매몰되어 그것들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리나는 그의 말을 경청했다.

“파벌은 견제를 낳습니다, 견제는 경쟁을 만들고 만들어진 경쟁은 개선을 내놓습니다. 정치는 이해를 만들고 이해는 엉킴을 만들어 조직 내부를 촘촘히 메꾸지요. 결과적으로 개선과 이해관계로 이루어진 조직은 누구 하나의 독단만으론 와해시킬 수 없는 견고함을 마련하게 됩니다.”

기지어는 탁상 위에 손을 얹었다.

“저는 그걸 만들고자 왔습니다, 다만 경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아니, 설파가 아니다.

기지어는 자신이 가진 이해를 당당히 내놓은 것이다.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기지어에게 아리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 견고함은 당신과 당신 단체가 믿고 휘두를 수 있는 수단을 생성하겠지요.”

물러섬이 없다.

애초에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보이는 그녀의 말에 기지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저 자리에 붙은 이름만을 생각하면,

한낱 기사단장이 재상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다.

지금 그녀의 행위는 엄밀히 말해 도를 넘은 것이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둘이 가진 입지를 생각하면 위 말은 또 달라진다.

아리나는 베나즈 가문의 우호 세력일 뿐, 내부 체계에 발을 들여놓은 인사가 아니다.

냉정히 말해 에커즈 기사단은 베나즈에게 있어 외부 세력인 것이다.

그것도 자치를 가진 세력.

지금의 베나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덩치 큰 세력.

그렇기에 그녀 역시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 거대한 세력의 수장이 우호 세력이 만든 기구에 소속된다면 자연히 해당 세력의 집중은 수장이 소속된 기구로 향할 테니까.

하지만 또 아리나는 기사이기에,

기사였기에.

해서 과거 태풍의 눈을 아울렀던 일곱 재해가 어떤 명예와 영광을 가졌었는지를 누구보다 동경해왔었기 때문에.

베나즈의 공표를 듣는 순간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기지어와 아리나의 날 선 신경전을 끝으로 둘은 그저 눈빛만을 나누었다.

한마디 말조차 필요 없다는 듯,

그들은 무언의 눈빛을 몇 차례 주고받은 뒤에야.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리나.

“추후 사람을 보내 연락 드리겠습니다.”

건조한 웃음을 머금은 채 악수를 청하는 아리나에게,

“오늘 자리, 감사했습니다.”

기지어는 절뚝거리며 다가와 그녀가 내민 손을 굳게 잡았다.

그렇게 기지어와 11인회는 회장을 빠져나갔다.

* * *

“바돈, 언제 한 번 리케니엔에 극단을 초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 물음에 바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슬슬 그런 다양한 문화들을 들여놓을 참이었는데 잘 됐군요.”

내 코트 앞주머니에 꽂힌 손수건을 매만지던 바돈은 직후 나와 눈을 마주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이면 됐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매무새를 다듬은 뒤 거울 앞에 섰다.

이런 내 뒤로 바돈이 따라붙었다.

“극단들의 공연은 문화적 접근 면에선 끝판왕이지요, 그만큼 자유민들의 참여도가 높고 그에 따른 베나즈 가문의 인식 상향에도 매우 도움이 될 겁니다.”

기웃기웃,

내 양어깨 너머로 고개를 불쑥불쑥 내밀며 거울에 비친 나를 한참 살펴보던 그는.

이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이쯤이면 바로 회담장으로 향하셔도 될 것 같군요.”

“그렇습니까.”

바돈의 말대로 곧,

리케니엔에 거물급 인사가 방문한다.

그 아리나 에커즈와 동급에 해당하는, 이번 2차 원정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수.

“그런데 점찍어두신 극단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이에 알겠다는 듯 바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극단과 관련한 정보는 집사부를 통해 따로 자료를 만들어 올려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돈.”

“제가 할 일이니까요.”

이윽고 바돈이 거울 밖으로 빠져 나가 닫혀 있던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럼, 출발하실까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린 방문 너머 복도를 향해 발을 옮겼다.

* * *

막 1층으로 내려가는 도중.

밖에서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땡, 땡.

은은하게 들려오던 종소리는 점점 선명해졌고, 그 소리가 선명해짐에 따라 저택 내부 역시 점점 분주해져 갔다.

그렇게 자리에 미리 착석한 나는,

곧 저택 코앞까지 다가온 종소리에 자세를 고쳐잡아야 했다.

곧이어 바깥에서 기어들어오기 시작한 소란스러움.

여러 사람의 북적임.

그 사이에서 뒤늦게 들려오는 우직한 발소리.

이내,

그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앙 실러 데우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 크녹스입니다.”

한없이 인자한 얼굴.

그러나 저 미소가 거둬지면 한없이 매서운 인상일 것 같다.

높이 솟은 콧대 양옆으로 푹 꺼진 눈두덩이, 그 사이에서 맹렬히 빛나는 푸른 빛 눈동자.

강인한 턱 얇고 긴 입술.

그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악수라도 청하려는 것인가?

“언제나 신과 함께 하길, 라아 메에─”

아니, 조금 미묘한 리듬을 가진 기도와 함께 그는 대뜸 두 팔을 벌려…,

“어…?”

나를 불쑥 껴안았다.

순간 주위에 있던 집사부에게서 살벌함이 뛰쳐나왔지만,

“참으로 뵙고 싶었답니다, 기다림에 물의 도시 발치아의 빛깔조차 색바래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이내 집사부는 덩치에 걸맞지 않은 부드러운 말투를 내뱉는 크녹스의 모습을 보곤 살벌함을 거둬야만 했다.

종잡을 순 없으나 일단 드러낸 의도는 확고한,

크녹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는 뒤늦게 나를 풀어주었다.

그런데도 아직 내 양어깨 위엔 그의 거대한 손이 얹어져 있었다.

살벌하게 크다.

마음만 먹는다면 저 두 손으로 내 상체를 으스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도대체 체격이 얼마나 큰 거야?

그 테티르 경보다 반절은 더 큰 것 같아.

“디안 베나즈입니다.”

“음!”

내 소개를 듣기 무섭게 크녹스는 흡족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저어는 앙 실러 데우스의 기사, 크녹스입니다.”

이어 재차 자기를 소개한 그는 다시 흡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내 양쪽 어깨를 붙잡은 채로.

뭘까.

토르킨 선생으로부터 두 발 걷는 자 보는 법을 얄팍하게나마 배웠지만,

저 크녹스라는 남자는 진짜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자리에 앉으시지요.”

크녹스는 내 말에도,

“음…!”

흡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크녹스 경.”

“으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는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한 그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나는 지금 당신의 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바라보고자 한다면 나는 그 바라본 주위를 초토화할 재해가 될 준비도 되어있습니다.”

그야말로 열광.

푸른 안광이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눈빛을 내뿜은 채 그는 내게 말했다.

“동맹! 아 부르기에 이렇게 좋은 울림을 주는 단어도 몇 없지요! 그리고 그 울림에 어울리는 답변 역시 몇 없답니다.”

대체 뭐야,

방금까지 보였던 위풍과 열광은 어디 가고 또 저리 절실한 표정으로 내게 말하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고옹!”

내 두 어깨를 감싼 그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그대로 나를 번쩍 들어 올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마치 인형을 들듯이 말이다.

“동맹을!”

“크녹스 경, 그에 대한 답은 추후 드리겠습니다.”

“음! 고민 또한 동맹과 어울리는 울림을 가지고 있지요!”

“2차 원정에서 해주신 일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잊지도 않을 겁니다.”

“하하하하하하하!”

저택이 울린다.

벼락을 머금은 채 헛구역질하는 구름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만남을 통해 좋은 협주가 완성되겠군요!”

휙.

드디어 크녹스가 내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소신 가보겠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 뿐일 테니까!”

벌써?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 있던 집사부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하다.

무슨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크녹스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럼에도 그의 머리가 내 상체 전반에 머무른 상태로.

그는 손가락에 걸친 베나즈 가문의 인장에 짧게 입맞춤을 한 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성큼성큼 저택 밖을 빠져나갔다.

잠시 뒤,

“허.”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남은 숨이 픽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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