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40화 (340/365)

340화. 복원 (4)

아침부터 베르융을 찾았다.

“베르융 경 계십니까?”

수십의 집사부를 대동한 채 나타난 덕에 저택 안에선 급히 인기척이 일어났고,

그렇게 내 갑작스러운 방문에 나타난 베르융은 맨발인 채로 뛰쳐나왔다.

“공, 연락을 주셨다면 제가 직접 찾아뵈었을 텐데요.”

헐렁한 셔츠, 버릇인지 면바지의 허벅지 부분은 잉크로 얼룩덜룩 더럽혀져 있다.

직전까지 문서를 작성하고 검토하고 있었던 걸까.

그보다 그가 이렇게 놀란 표정도 지을 수 있었구나.

“도리어 말없이 이렇게 찾아와 미안합니다.”

“그럴 리가요, 안으로 드시지요.”

곧장 베르융은 자신의 집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투박한 향기.

그리고 곳곳에 묻어있는 따듯함.

그의 집 안은 그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화려한 그림이나 항아리, 윤택한 가구나 사치품 대신 가족의 그림, 오르테 가문의 탄생부터 함께한 듯 보이는 항아리와 가구들이 내 눈에 속속 들어온다.

건실한 가족의 울타리가 바로 이런 것일까.

비슷한 감성을 시몬 바스티유 안에서 느껴본 적은 있었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짜 가족이란 울타린 듯싶다.

괜한 동경심이 일어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와중, 넓은 거실로 들어서기 무섭게 저 너머에서 바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두 손에 물을 묻힌 채 급히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아네즈였다.

대충 묶은 머리, 대충 걷어 올린 소매.

하지만 짙은 속눈썹에서 흘러나오는 기품만큼은 대단했던 그녀는 치맛자락에 물기를 닦아내며 대뜸 내게 물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간단하게 해결했습니다.”

내 말에 아네즈는 눈썹을 찌푸렸다.

“간단함은 하루를 쉽게 무너트리기 마련이지요, 마침 늦은 점심을 하려는데 같이 하시지 않겠습니까?”

붙임성이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붙어버렸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를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녀는 쾌활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물론이지요, 거기다 공께서 이리 오신 것을 보면…,”

그러다가도 조금은 걱정 어린 눈짓으로 내 뒤쪽 베르융을 살펴보던 그녀는,

“저이와 길게 나눌 이야기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일련의 감정을 봉합하듯 말끔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인 뒤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뒤이어 아네즈의 눈치를 계속해서 살피고 있던 베르융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공, 조촐하지만 구석구석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좋지요.”

그의 안내를 받아 작지만 거대한 세상을 품은 서재부터 갖출 것은 모두 갖춘 손님 방까지 기웃거려볼 수 있었다.

“참, 베르융 경. 베르긴은 안 보입니다?”

“녀석은 지금 숲에 가 있습니다, 명목상 나무를 해오기 위해 들어간 것이지만 그걸 빌미로 검술 수련을 하러 간 것이겠지요.”

베르긴,

그와 검을 주고받으며 대련을 했었던 때가 떠오른다.

오르테 가문의 검술은 그 무거운 검을 가지고도 흐트러짐 없는 직각의 궤적을 그려내는, 신기에 가까운 것이었지.

당시는 베르융 경에 비하면 한참이나 미숙했었지만,

지금은 왜인지 모르게 그가 베르융 경에 필적할 만큼 성장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때는 항시 붙어 다니며 돈독해질 줄 알았는데…,

상황이 허락해주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부턴 그 상황이라는 걸 내 입맛대로 만들어 볼 참이다.

그렇다면 지금 느끼는 이 아쉬움도 해소할 길도 마련할 수 있겠지.

“점심이 다가왔으니 녀석도 곧 올 겁니다.”

“그거 다행입니다.”

마침,

얼마 전 조이와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 위 길에 대한 단서도 마련해놓은 참이고 말이야.

그러나 역시 문제는,

베르융 경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것이다.

* * *

“어머니!”

제 몸보다 세 배는 거대한 짐을 짊어진 채 모습을 드러낸 베르긴은 그것을 문간 옆에 내려놓곤 몸에 묻은 땀을 대충 털어내었다.

그러다가 코를 움찔거리기 시작한 그는,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집에선 맡아본 적이 없는 증류된 꽃향기가 났으니까.

그리고 이 향기는 언젠가 베르긴이 한 번 맡아본 기억이 있다.

그래, 분명 베나즈 가문의 저택 구석구석에 배어 있던 향기였다.

순식간에 기억을 더듬은 그는 앞서 제 아비가 지었던 것과 같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큼성큼,

거실로 향하던 그는 그렇게 식탁에 앉아 있는 손님을 눈에 담기 무섭게 절로 기사의 예를 갖춰야만 했다.

한쪽 손을 가슴 위에 얹고,

고개는 살짝 내린 채 두 눈을 감는다.

이는 참으로 정석적인 기사의 예였다.

문제는 그가 아직 정식으로 서임 된 기사가 아니었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러한 예를 갖추는 것 역시 법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베르융이 짧게 기침을 내뱉으며 베르긴에게 말했다.

“베르긴, 너는 아직…,”

하지만 디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런 베르융을 말렸다.

“베르융 경, 괜찮습니다.”

일련의 상황에 당황한 베르긴은 얼얼한 표정으로 식탁에 둘러앉은 세 사람의 눈치를 살피다가,

“베르긴, 손을 닦고 오렴.”

뒤늦은 아네즈의 말에 부랴부랴 부엌으로 향해야만 했다.

그렇게 손을 닦고 돌아온 베르긴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제법 화기애애한 세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에 긴장을 풀 수 있었던 베르긴은 한결 가벼운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공, 여기서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인사에 디안은 미소와 함께 화답했다.

“반갑습니다, 베르긴. 정말 오랜만입니다.”

물 흘러가듯 지나간 한 차례 교류만으로도 베르긴은 두근거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처음, 리케니엔의 치안 대장을 맡았을 때도 지금과 같은 두근거림을 느꼈었던 그였다.

물론 지금은 베르융의 인사가 정해지면서 직위를 내려놔야 했지만,

그마저도 정식 직위가 아닌 임시적 성격이 강한 자리였었다.

그러나 언젠가,

기사로서 서임 받을 거란 꿈을 놓치지 않은 그였기에.

디안과의 이 대화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벅차오를 수 있었다.

아네즈의 힘이 잔뜩 들어간 감자 스튜, 갈빗대 구이는 둘러앉은 네 사람에 의해 얼마 안 가 바닥을 드러냈다.

몸을 쓰는 장정만 셋이나 되는 자리였으니,

애초에 음식이 남을 가능성은 없었다.

“공께선 수련을 따로 하십니까?”

점심을 마치고 각자가 나서서 식기를 정리하는 도중, 틈을 엿본 베르긴이 디안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럼 디안은 아쉬움을 드러내며 토로했다.

“확실한 성취를 얻으려면 수련에 어울려 줄 상대가 필요한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따로 움직일 시간도 요즘은 그리 많지가 않고요.”

다섯 기사란 조직을 만들려는 데엔 저 이유도 분명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중심점에 과중 된 일의 부담을 분산시키긴 해야 할 테니까.

디안의 그 얘기를 듣고서 베르긴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활짝 올렸다.

곧이어 상황이 허락만 된다면,

자신이 그 상대가 되어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혀끝에 걸리기 직전, 막 부엌에서 모습을 드러낸 베르융을 발견하곤 입맛을 다셔야 했다.

그렇게 자리가 정돈되고,

자연스럽게 아네즈는 베르긴을 데리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으나.

“베르긴도 함께 하시죠.”

디안의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아 자리는 오르테 부자와 디안 베나즈 세 사람으로 이뤄지게 되었다.

* * *

베르융은 대략 예상을 하고 있었다.

다섯 기사 가운데 한 자리에 틀림없이 자신이 들어갈 것이라고.

오르테 가문이라는 위치, 그리고 베나즈를 보좌해야 한다는 베르융의 책임감으로부터 기인한 합리적인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에 걸맞게,

디안의 첫 마디는 역시나 다섯 기사와 관련한 것이었다.

“이번 다섯 기사와 관련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베르융 경.”

그러나 이다음에 벌어진 말은,

베르융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직언하겠습니다, 다섯 기사 내 베르융 경의 자리는 없습니다.”

아니,

예상치 못한 말이긴 했으나 베르융은 금세 납득했다.

자리는 상관없다, 어느 자리든 같은 충의를 내비칠 생각이니.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디안의 말에,

베르융은 결국 당황을 드러내야 했다.

“베르융 경께서는 기사의 장으로서 제 오른편에 서 계셨으면 합니다.”

과거 그 자리에 있었던 베나즈였다.

그 베나즈가 지금 오르테에게 이어가길 부탁하고 있다.

참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수미상관이로구나.

지금의 이 자리가 마련되기까지 있었던, 기저에 깔린 모든 일을 되짚던 베르융은 끝내 감개무량을 느꼈는지.

푹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침묵 사이로 디안은,

이번엔 옆에 멀뚱멀뚱 앉아 있던 베르긴을 바라보았다.

“베르긴 오르테, 다섯 기사 내 자리에 대한 기회는 당신에게 있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치기라도 한 듯,

그 말을 듣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베르융의 고개가 퍼뜩 들렸다.

마찬가지로 그 말을 들은 베르긴의 상체는 크게 부풀어 있었다.

“공…! 하지만…,”

베르융이 뭔갈 말하려고 급히 입을 열었지만,

그의 앞을 베르긴이 가로막았다.

“그 기회, 붙잡기 위해 마땅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 베르융마저 위축되게 만들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

그러나 위풍당당한 목소리완 다르게 베르긴은 옆에 있는 아버지 베르융과 눈을 마주칠까 봐 고개를 최대한 빳빳이 세워야만 했다.

잠시 후,

금세 차분함을 되찾은 베르융은 베르긴이 보는 앞에서 작은 목소리로 디안에게 말했다.

“공, 이 아이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디안은 베르융이 아닌 베르긴을 바라보며 묻는다.

“준비되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준비됐습니다.”

베르융이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베르긴을 바라보며 쏘아붙인다.

“언제부터?!”

베르긴은 물러서지 않았다.

“언제나!”

두 부자 사이에 오간 뜨거움.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네즈는 다가와 베르융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이어 아네즈가 디안에게 청한다.

“잠시 이이 좀 데려가겠습니다.”

디안의 끄덕임을 확인한 아네즈는 단호히 베르융을 끌어당겼다.

가녀린 아네즈에게 그 장대한 베르융이 힘으로 끌려갈 리는 없다, 하지만 그녀의 단호함엔 베르융 조차 속수무책이었다.

급히 부엌 뒤편으로 베르융을 끌고 온 아네즈는,

말없이,

그리고 포근한 눈빛으로 베르융을 올려다보며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베르융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축 처진 그의 어깨를 쓸어내린 아네즈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알잖아요, 보를 쌓기 위해 평생을 고군분투하지만 끝내 그것이 무너질 것이란 사실을.”

베르융은 아네즈가 보내는 눈빛에 시선을 맞추었다.

“부모와 자식이란 건 그런 거예요. 왈칵 쏟아진 자식에게 부모는 한 번쯤 무너져 줘야 하죠.”

아네즈의 말에 베르융은 순수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이 그때일까, 나는 잘 모르겠어.”

그의 말에 그녀는 대답했다.

“저도 잘 몰라요, 그냥 믿는 거죠.”

끝내 베르융은 작게 웃었다.

그리곤 아네즈의 뺨을 쓰다듬다가 결심을 굳힌 듯 결연한 얼굴로 뒤돌아 마련된 자리로 걸어갔다.

그렇게 나타난 베르융의 표정을,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디안은 놓치지 않았다.

마이스터에게 두 발 걷는 자를 읽는 법을 배운 그였기에 발휘할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이었다.

때문에 디안은 베르융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작게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공.”

“예, 베르융 경.”

“따르겠습니다.”

참 베르융 경 답다.

그 생각에 디안은 활짝 웃었다.

베르긴은 아직도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는지 어벙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그러다가,

베르융이 핀잔을 담은 눈빛과 함께 그의 등짝을 두들긴다.

“뭐 하고 있어?”

“예?”

베르융이 베르긴에게 디안 쪽으로 턱짓한다.

그제야,

눈치를 챈 베르긴은 천진한 미소를 머금다가도 빠릿빠릿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디안에게 정식으로 고했다.

“따르겠습니다.”

별은 다섯 점의 이음으로 그려낼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용해 만든 베나즈의 다섯 기사, 통칭 ‘스텔라스’에 지금 막 첫 점이 확정되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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