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베르긴, 경.
‘그렇다면 조이, 기사왕이었다면 어느 쪽을 선택했을 것 같습니까?‘
내 물음에 조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택 자체를 고려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그저 기다렸겠지요.’
내겐 제법 어려운 이야기였다.
이후 흘러간 상황에 맡기는 것.
미리 정하여 그 틀 안에서 만드는 게 아닌, 자연스레 쌓이길 기다리는 것.
어떻게 보면 이상적인 이야기다.
그렇기에 칠기사라는 전대미문의 조직이 만들어졌겠지,
동시에 그 이상을 끝내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던 거겠지.
난 그런 극한의 유연함을 부릴 자신도, 감당할 여유도 없다.
아마 대부분의 두 발 걷는 자가 나와 같을 거라 생각한다.
모두에겐 각자 양보할 수 없는 경직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니까.
나 역시도 그렇다.
그래서 난 조이의 그 조언을 응용하기로 했다.
선택 자체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눈앞에 놓인 양자택일에선 벗어나기로.
베리융이냐 테티르냐가 아닌.
그들을 제외한 부분에 대한 선택의 집중으로 말이다.
거기에 더해 조화로움을 엿보려고 나름의 노력을 덧대었다.
스텔라스로 명명된 베나즈의 다섯 기사는 명색이 기사왕의 칠기사를 답습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따라서 개개인에게 주어질 막강한 자치권은 곧 구성원 각자의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구성원 자체가 틀에 박혀 있어 예상이 가능한 영역에 머물러 있다면.
그런 몰개성한 조직으로 노릴 수 있는 변화의 폭도 적을 것이다.
해서 새로운 얼굴,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필요하다.
베르긴이 바로 그렇다.
내 옆에 둘 수 있는, 오르테 가문의 사람임과 동시에 아직 기사 서임을 받지 못한 자이나 그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
그리고 기사로서의 기질을 이미 갖추고 있는 자로는 베르긴 만한 인사가 없다.
다음으로 생각하고 있는 기사는,
켄타나의 가버트 로셀란.
그 역시 떠오르는 신예 세대 기사 중 하나다.
그의 실력은…,
이미 예전부터 봐 왔기에 마찬가지로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남은 건 마지막 자리뿐인데,
여기엔 울타리 안팎으로 파격을 줄 만한 인물이 필요하다.
마침 딱 한 명.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 * *
“아버지,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베르긴의 물음에도 베르융은 말없이 더욱 깊은 숲속으로 향했다.
그 뒤를 바짝 쫓던 베르긴은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에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부름에도 한참이나 대꾸하지 않던 베르융은,
햇살의 흔적이 얼마 남지 않은 곳에 도달하고 나서야 그 입을 열었다.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라 부르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
그의 단호한 말에 베르긴의 가슴은 철렁하고 주저앉았다.
설마 디안 베나즈 앞에서 주어진 기회를 덜컥 붙잡았던 그 부분이 아직도 불편하셨던 걸까?
하지만 그의 걱정은 베르융의 다음 말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나는 지금 기사 베르융으로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걱정이 생겼지만.
“그러니 그에 맞는 호칭으로 날 불러라, 베르긴.”
“… 잘 알겠습니다, 베르융 경.”
어색한 말투로 대답한 베르긴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곧 자신의 앞에 닥칠 일을 예감한 것처럼.
베르융이 자신을 데리고 깊은 숲속으로 향하려 한다, 거기다 도중에 기사의 경각심까지 거론하면서.
이러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 아니겠는가?
이내 고요한 숲속이 감춰둔 공터에 접어들기 무섭게,
베르융은 뒤돌아서서 베르긴과 마주 섰다.
“베르긴, 엄밀히 말하면 넌 아직 기사가 아니다. 그러니 나는 너에게 기사에 걸맞은 존칭도 존중도 하지 않을 것이다.”
둘 중 장성한 쪽은 분명 베르긴이었으나,
장대한 쪽은 베르융이었다.
그걸 실감한 베르긴은 제 앞에 있는 남자가 벽처럼 느껴졌다.
꼭 넘어야 할,
동시에 최악의 고난이기도 한.
“해서 너는 날 설득할 필요가, 그 이유가 있다. 내가 널 기사로서 존중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사유를 마련하려면 말이다.”
베르긴은 빼긴커녕 오히려 한쪽 발을 앞으로 내민 채 대답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베르긴의 당당함을 확인한 베르융은 건조한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옆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적어도 수백 벌의 계절 옷을 걸쳤을 나무 앞에 멈춰 서서,
쿵!
난데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평소 중검을 바람처럼 휘두르는 그의 완력을 증명하듯, 그 주먹에 나무는 한참을 휘청거렸고 그 반동으로 일대 새들이 놀라 달아나야 했다.
이후 뒤늦게,
우지직.
하는 소리가 들리며 진동에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들이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그중 잘 뻗은 가지 두 개를 엄선해 들고 온 베르융은 이내 하나를 베르긴에게 던져 주었다.
그것을 낚아챈 베르긴은 손에 가득 움켜쥐어 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휘둘러보기도 하면서 그것이 가진 균형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이는 베르융 역시 마찬가지였다.
휙, 휙.
두 부자의 완력에 의해 뭉개진 바람 소리만이 살벌하게 울려퍼진다.
그렇게 그들이 각자의 균형을 되찾고 나서야,
베르융은 베르긴 앞에 마주 섰다.
“준비됐나.”
그의 물음에 베르긴은 대답 대신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것은 말로도 표현해내지 못할 최적의 대답이었다.
이윽고 둘은 두꺼운 나뭇가지를 치켜세운 채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후우욱!
일반적인 휘두름으론 나올 수 없는 우악스러운 바람 소리가 베르융으로부터 터져 나온다.
그에 맞춰,
화아악!
그것과 똑같은 바람 소리가 베르긴에게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둘의 휘두름은 곧 둘 사이 공간에 일그러짐을 낳았고,
끝내 서로가 휘두른 가지가 교차 되었을 때.
펑!
말 그대로 불 먹은 화약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합,
그것을 나눈 둘은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의 나뭇가지 역시 부러지지 않았다.
짧은 순간 그 안에 담긴 균형을 이해하고 안배하여 휘두른 경이로운 결과였다.
이를 통해 베르긴은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한 것일까.
베르융은 베르긴의 부러지지 않은 가지를 보며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으음!”
짧은 기합과 동시에 갑자기 앞으로 치달는 베르융.
잔상이 그를 따라잡지 못하고 물에 풀린 먹처럼 번진다.
후우욱!
후우욱!
연속적으로 불어닥친 바람, 그리고 그것을 정직하고 우직하게 맞받아치는 베르긴.
펑! 펑!
진짜 검이 아닌, 그저 나뭇가지 따위로 나누는 대련이라기엔 그 과정이 지나치게 파괴적이다.
이는 오르테 가문의 검술 특유의 색깔.
사소한 한 획조차 전신의 힘을 다 쏟아붓는 낭비적이며 낭만적인 고집!
“흐읍…!”
짧게 호흡을 들이마신 베르긴이 상체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13개로 나눠진 오르테 검술 중 첫 번째를 발휘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이를 베르융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역시나,
“흡!”
베르융 역시 호흡과 함께 전신을 단단히 만들었다.
그렇게 유려한 곡선만을 그려내던 나뭇가지는 태생적으로 겪지 못할 직각을 그려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전속으로 휘둘려진 나뭇가지가 우뚝 멈춰 서 그 찰나의 순간 직각 방향으로 꺾인다.
그 일련의 과정은 감속이나 증속 따윈 없이 일정할 뿐이다.
직각의 궤적 자체가 마치 하나의 곡선 궤적인 양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두 부자가 밟고 있던 대지는 그들이 만들어낸 바람에 질려 얼굴이 검게 물들었고,
이따금 나뭇가지가 부딪힐 때마다 그 파장이 숲 일대를 간질였다.
어느새,
둘은 오르테 검술의 7번으로까지 넘어가 있었다.
사실 오르테의 13 검술은 그 휘두르는 방식에 걸맞게 구조 역시 매우 단순하다.
예를 들어 제1번은 왼쪽에서 시작한 가로에서 직각으로 떨어지는 휘두르기.
이어지는 2번은 오른쪽에서 시작한 가로에서 직각으로 떨어지는 휘두르기다.
물론 이 직각이 선사하는 물리적 감쇄를 무시하고 하나의 궤적으로 보이게끔 휘두르는 데엔 압도적인 양의 훈련 선행이 필수다.
그러니까 오르테 검술의 숫자는 높은 쪽에 다다를수록,
그만큼의 노력을 퍼부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이는 어떤 천부적 감각과는 그 궤가 다르다.
맥레인이 보여주었던 모든 검술의 기만이나,
디안이 보여주는 모든 검술의 부정 같은 초자연적 영역과는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예 다르단 소리다.
이 오르테 검술은 말 그대로,
수련의 극의.
증명하는 방법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그저 휘둘러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다.
백 번,
천 번,
아니 수만 번, 수십만 번으로서!
“으극!”
베르긴의 어금니가 가득 맞물린다.
그의 손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직각이 그려져 있었다.
그 직각의 모양은 오르테 9번.
이어서 베르긴의 손에서 맺어지는,
하나의 가로에서 위아래로 번갈아 나타나는 세 번의 직각.
오르테 10번.
노력의 고치를 찢고 결실의 날개를 활짝 펼쳤을 때 얻게 될 극악의 변칙.
어느 건물의 설계도에서나 볼 법한 직각들이 죽음의 선으로서 그려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베르긴의 10번을 같은 10번으로 응수한 베르융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와중에도 서로 맞물린 나뭇가지에선,
퍼버벅!
마치 육중한 공성추로 성문을 두들기는 것 같은 굉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아이베리아의 기사들이 왜 그토록 다른 땅에까지 무서운 존재로서 통용되었을까?
그건 비단 인챈트 때문만이 아니다.
태어나 죽기 전까지,
가장 확실한 살인 기술 하나를 극에 다다를 때까지 다듬고 또 다듬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두 부자가 벌이고 있는 경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베르융은 찰나의 순간 의심을 담은 두 눈으로 베르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쥐고 있던 두 손에 가득 힘을 실었다.
으직!
악력을 버티지 못한 나뭇가지의 밑부분이 젖은 휴지처럼 일그러졌다.
그는 이제 눈빛으로 베르긴에게 말한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13번을!
이윽고 베르융의 손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곡선에서 빚어낸 직각.
예술의 경지.
상대가 싣고자 하는 힘의 방향이 어느 쪽인지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검을 든 자들이라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난제.
휘리리릭!
괴이한 바람 소리와 함께 베르융의 나뭇가지가 일순간 흐릿해졌다.
일그러진 난류 속에 그 모습이 뭉개진 것이다.
조금이라도 스침을 허용한다면,
신체 일부가 그대로 날아가 버릴 상황.
그 앞에서 베르긴은 초연한 표정을 지은 채.
되려 호흡을 가다듬고서,
아비가 그려낸 것과 같이.
따라 그린다.
오르테 13번.
…,
한바탕 몰아친 바람이 모두 흩어졌다.
바닥엔 부러진 나뭇가지 두 개가 나뒹굴어 있었다.
두 부자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다.
땀으로 온몸을 적신 그들은 한참을 마주 서 있다가, 이내 베르융쪽이 먼저 상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가온 베르융은 그렇게,
퍽!
갑자기 베르긴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크헉!”
뒤로 나뒹군 베르긴이 뺨을 감싼 채 황당한 표정으로 베르융을 올려다보았는데,
그의 눈에 보인 건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베르융의 모습이었다.
“일어나라, 베르긴 경.”
아비가 아닌 한 기사로서의 부름에,
베르긴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 손을 잡았다.
“방금 그건 신고식이라고 생각해라.”
멋쩍게 말을 건넨 베르융은 그렇게 손을 맞잡은 베르긴을 일으켜 세웠다.
“비로소 기사가 된 것입니까, 저는?”
베르긴의 물음에 베르융은 피식 웃더니 말없이 숲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말씀해 주십시오, 베르융 경!”
베르긴의 재차 이어진 물음에 베르융은 능글스럽게 대꾸했다.
“이 순간부터 난 기사가 아닌 베르긴 너의 아버지다. 그러니까 여기선 기사로서의 존칭은 붙이지 않을 거야.”
아비의 장난에 아들은 피식 웃었다.
이윽고 다시,
아들은 저만치 떨어진 아버지 뒤를 쫓아 바삐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