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42화 (342/365)

342화. 다섯

“엘르길 경, 무슨 일입니까? 이곳을 다 찾아오시고.”

엘르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조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긴다.

“조이, 그게 사실입니까? 가버트에 대한 얘기 말입니다!”

그러나 반가움을 드러내는 조이완 달리 엘르길은 대뜸 높은 언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다섯 기사에 가버트가 내정될 거란 게 정말입니까?!”

재차 이어진 그의 물음에 조이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합니다, 도대체 그 기준이 뭡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답답함을 토로하는 그에게 조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대답해줄 수 없네, 다만 확실한 건 모든 결정엔 그에 따른 숙고가 있었다는 것뿐.”

조이는 차분히 설명했지만,

그 설명이 엘르길을 설득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 대답에 제가 납득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날 선 그의 물음에 조이 역시 날카롭게 치켜뜬 눈으로 대꾸했다.

“자넬 납득시키기 위해 한 말이 아니야.”

조이에게서 드러난 그 날카로움에 엘르길은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억울함을 드러내며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다섯 기사라면 마땅히 그에 걸맞은 구성원들로 이뤄져야 합니다, 켄타나의 얼굴이 누굽니까? 바로 접니다!”

그런 엘르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조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일단 앉게.”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본인의 자리로 걸어갔다.

씩씩거림을 겨우 참고 자리에 앉은 엘르길은 곧 마주 앉은 조이에게 다시금 억울함을 쏟아냈다.

“조이, 영향력입니다. 다섯 기사의 구성원들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덕목 말입니다. 그것이 있어야만 다섯 기사가 표방하는 그 극한의 자율 자치권이 성립됩니다.”

이에 조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즉답했다.

“그건 다섯 기사라는 조직 그 자체가 가지게 될 위상만으로 해결될 문제이지 구성원 각자에게 따지고 들 문제가 아니네.”

“그러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 구성원 각자가 가진 영향력에 의해 다섯 기사 내 세력의 크기 역시 정해지게 될 겁니다. 누구는 막대한 조직을 이룰 것이고 또 누군가는 빈약한 세력 안에서 상대적으로 도태되겠죠.”

“다섯 기사는 구성원 모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마련된 조직이 아니야, 전쟁의 자치를 쥔 채 자유롭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마련된 조직이지.”

“하지만 그 균형으로부터 등을 돌렸다간 다섯 기사 내 파벌이 형성될 겁니다, 고착된 파벌은 이후 문제를 일으키겠지요! 가령 기사왕 때…,”

열렬히 말을 이어가던 엘르길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문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조이는,

그런 엘르길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엘르길 경, 말이란 건 칼보다 위험한 거야. 그 위험한 걸 지금 누구에게 휘두르고 있는 건지도 잘 생각하길 바라네.”

담담하면서도 무거운 조이의 경고.

그제야 엘르길은 자신의 감정에 급히 제동을 걸어야 했다.

“제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엘르길의 그 굽힘을 조이는 다시 유쾌히 받아주었다.

“자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야, 그 심정 나도 충분히 알고 있네.”

1차 원정이 끝났을 무렵,

둘은 서로 유쾌함을 주고받을 정도로 동등한 입장이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어느 순간 베나즈 가문의 서기장이 되어버린 조이는 지금의 엘르길과는 동등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엘르길 역시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어색함을 무릅쓰고 조이에게 깍듯한 예를 갖추고 있는 거다.

“하지만 디안 공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린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네, 엘르길 경. 자네는 물론 훌륭한 기사이지만 발언가로서의 재능과 역량이 그보다 더 뛰어나다는 걸 말일세.”

엘르길의 눈이 일순간 반짝였다.

하지만,

“조이, 전 기사로서 한 점 부끄럼이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최전방에 나가 적들을 휩쓸 파도가 될 자신이 있단 말입니다.”

기사로서의 마음가짐을 부정 받는 듯했는지 다시 눈에 불을 켜고 대꾸했다.

그런 그에 대고 조이는 얼른 손사래를 쳐야 했다.

“알아, 알고말고. 난 절대 기사로서의 자네를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야.”

그의 진심이 전해졌을까.

엘르길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애써 납득했는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엘르길 경, 바꿔 생각해보자고. 엄밀히 말하면 켄타나에서 배출된 기사가 다섯 기사, 스텔라스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닌가? 그 배경에 누가 있었겠느냔 말이야, 바로 엘르길 자네란 말일세.”

“정말입니까?”

“자네로 인해 베나즈 가문 내 켄타나의 입지가 공고해진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나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엘르길의 표정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그리고 전부터 자네는 발언가의 입장으로서 나와 교류하려 했었지.”

조이의 말에 엘르길은 어느샌가 순한 양이 되어있었다.

“맞습니다.”

“보게, 켄타나의 귀족가인 빌로즈 가문의 차녀 가니아님은 지금 베나즈의 집사부 일원이네. 집사부 2인 자인 세라님을 보좌하는 위치까지 올라와 계시지.”

아니 순함을 넘어 이제는 음메 하고 미소 짓는 양이 되어있었다.

“그렇지요.”

“디안 공과 가니아 님 사이의 연결고리는 아직 열려있는 상태네, 이런 상황에서 그곳에 집중해줄 최적의 인재인 자네가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그건 우리 전체에게 손해네.”

엘르길은 대뜸 조이의 손을 붙잡았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이해해주려 노력해 고마울 따름이야.”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람 좋은 미소를 내비친 조이.

이제 엘르길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바쁜 시간 빼앗아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라면 오히려 없는 시간마저 빼앗아와야지.”

엘르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이에게 기서로서의 예를 갖춘 뒤 그렇게 물러났다.

* * *

밖으로 나선 엘르길은 후련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가벼운 발놀림으로 서기실을 빠져나왔다.

“원하는 것은 얻었으니.”

직후 혼잣말로 소감을 내비친 그는,

“이젠 내 할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겠군.”

되새기듯 작게 중얼거리며 기수의 수행을 받아 마차에 올라탔다.

직전,

조이와 나누었던 그 대화들은 사실 모두 엘르길이 예상한 범위 내에 있었다.

그는 애초에 다섯 기사니, 그를 위시한 기사로서 양보할 수 없는 부분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이와 나누었던 일련의 대화들은 모두,

그저 발언가로서 치밀하게 이끈 것들이었던 것.

가버트가 다섯 기사에 내정됨에 있어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져놓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입지를 확장하려는 지극히 발언가적인 행위들이었던 거다.

그가 조이에게 말했던 영향력.

그것을 조이와의 대화를 통해 확보해냈으니, 엘르길 그는 확실히 발언가로서의 자질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였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켄타나로 복귀한 엘르길은,

곧장 가버트를 찾았다.

“엘르길 경?”

평상복으로 엘르길을 맞이한 가버트가 놀란 표정으로 물으면,

엘르길은 대뜸 가버트를 가볍게 포옹한다.

“가버트 경, 자네는 정말 훌륭한 기사야.”

토닥토닥, 등을 두들기는 그의 행위에 가버트는 한참이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 * *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부름을 받고 작은 서재로 찾아온 베르긴의 앞에,

베르융은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베르긴은 보통 일이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앉아라.”

베르융은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말했다.

그 말에 베르긴은 담담히 마주 선 채 똑같이 무릎을 꿇어앉았다.

“이것을 너에게 줄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하다가도 동시에 그날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가 사명을 위해 떠났고, 그렇게 담담히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으니까.”

주어가 생략된 설명이었지만 베르긴은 그 안에 담겨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맥레인,

맥레인 베나즈.

“하지만…, 그는 끝내 남겼다. 그의 이름을, 그의 가족을. 그렇게 베나즈는 다시 아이베리아에 돌아왔고…, 그에 따라 나 역시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켜켜이 쌓인 시간을 헤치고 이것을 꺼내왔다.”

베르융은 그리운 얼굴을 한 채 자신의 옆에 놓여있던 낡은 나무 상자를 마주 앉은 베르긴 쪽으로 밀어 건넸다.

“이게…, 무엇입니까?”

“열어보아라.”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따라 순순히 닫힌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을 보자마자 단단했던 그의 턱이 아래로 쑥 빠지듯 열렸다.

“이건…,”

“14년, 모리비타 벤투스. 한때 최강이라 불렸던 남자의 날씨였고 재해였다.”

자루다.

정확히는 날 부분이 제거된 검의 자루.

빛이 바랬지만 군데군데 찬란한 문양이 새겨진 그 자루 안에는 인챈트로 보이는 빛 망울이 글자 모양으로 희미하게 박혀 있었다.

“이것을 왜 저에게…?”

“약속했으니까.”

베르융은 슬픔을 드러냄과 동시에,

시원섭섭한 웃음을 지었다.

아들로선 그 아비가 보이는 감정의 무게를 헤아릴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맥레인 경과 약속했었다, 나중에 자식이 생기면 서로의 자식을 종자로 거둬 훌륭한 인재로 키우기로. 하지만 맥레인 경은 0의 은닉을 위해 자신을 기사로 만들어준 전신을, 그 날씨를 내게 주고 떠나야만 했지.”

베르긴은 저도 모르게 느낀 경외감에 고개를 숙였다.

“베르긴, 이제 이것이 네 기사의 길을 지탱해줄 것이다. 너를 더욱 장성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맥레인이 내게 한 약속이니 그리될 것이다.”

베르융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상자 안에 담긴 자루를 꺼내,

베르긴에게 내놓았다.

그러자 베르긴은 얼른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일어서 양손으로 겸허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축하한다, 내 아들아. 우리의 기사여.”

* * *

집안일을 마친 아네즈가 물 묻은 손을 닦으며 집안을 기웃거린다.

이 시간대면 항상 베르융이 거실로 나와 집안 먼지를 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융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아네즈는 그 큰 눈을 대굴대굴 굴리며 그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쏘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살짝 열린 서재에서 발길을 멈춘 그녀는,

문틈 너머로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곤.

한참을 조용히 서 있어야만 했다.

베르융,

그 장대한 기사는 책상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아이처럼 흐느끼고 있었다.

“맥레인, 이제야 약속을 지킵니다. 내 아들을 지켜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아들을 지키겠습니다. 당신의 과업을 이어받은 그를 지키겠습니다.”

* * *

다섯 기사,

스텔라스의 윤곽이 드러났다.

베나즈의 집사부로부터 급작스럽게 발표된 성명문은 리케니엔을 비롯해 베나즈의 깃발이 있는 모든 곳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소식은 티히트라에도 막 퍼졌다.

“재상! 재상!”

11인회, 설리엄이 헐레벌떡 재상의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온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깁슨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에 머쓱한 표정을 짓던 설리엄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재상의 눈치를 살피다가,

“설리엄, 무슨 일입니까?”

이어진 기지어의 물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비치며 황급히 말문을 열었다.

“다섯 기사의 윤곽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그의 말에 기지어와 깁슨의 눈이 마주친다.

바로 어제, 그들의 명의로 리케니엔에 두 기사의 이름을 적어 보고를 올렸다.

그 보고가 있은 바로 다음 날 다섯 기사에 내정된 자들을 공식화한 것을 보면…,

“공께선 이미 자리에 올릴 인물들을 생각해두셨던 거군요.”

깁슨의 말에 기지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기지어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설리엄에게 물었다.

“그래서, 다섯 기사가 누구인가?”

설리엄은 곧바로 들고 온 문서를 펼쳐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렸다.

[바람, 기사 베르긴]

[침묵, 기사 가버트]

[강력, 기사 테티르]

[영광, 기사 아리나]

[섬광, 기사 크녹스]

기지어,

그는 그 마지막에 열거된 부분을 듣고서 처음으로 안면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요동쳤다.

그럴 수밖에,

그의 과거를 무너트렸던 자의 이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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