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하나
“어서 오세요, 아네즈님!”
곱게 차려입은 세라가 막 마차에서 내린 아네즈를 반겼다.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아네즈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오는 손길을 정중히 받아들였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세라님.”
“그러게나 말이에요, 잘 지내셨죠?”
으레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은 둘은 그렇게 나란히 걸으며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들 뒤로는 막 도착한 마차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많은 마차 가운데 유독 하얗고 번지르르한 외관을 자랑하는 마차 안에선,
주위 시선을 한순간에 빼앗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붉은 드레스, 얇은 발목을 강조하는 보석 발찌와 검은 구두.
손목에는 이름난 원정대가 만든 명품 수제 시계를, 목에는 별빛을 빻아 만든 듯한 목걸이를 걸친 그녀는 자신의 짙은 속눈썹을 과시하듯,
천천히 두 눈을 깜빡이며 무심한 표정으로 주위를 훑었다.
주위 몇몇 사람들은 그 여인을 단숨에 알아보곤 삼삼오오 모인 자신의 지인들에게 설명하기 바빴다.
“잘 봐두세요, 베나즈 가문의 창업 후원자니까.”
“허! 저 사람이 바로 그 포개어진 손 조합장 스페라입니까?”
“생각보다 젊은데…, 아니 너무 어린데요?”
이들 속삭임을 반주 삼은 듯,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뒤에 따라붙은 난쟁이를 내려다보았다.
“라자딜르, 왜 이렇게 늦어?”
“마차에 실려 있는 회장님 짐이 도난당할까 점검 중이었습니다.”
“베나즈 가문의 심장 한복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아?”
“그렇다곤 해도 자체적으로 보안을 지키려고 노력해야지요.”
라자딜르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응수했다.
마치 이렇게 하면 곧 스페라가 자신을 칭찬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처럼.
그러나 그녀는 라자딜르의 예상과는 달리 매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의 그 발언은 오늘 행사의 보안 총괄인 베르융 경을 욕보인 거나 다름없어, 만약 방금 했던 말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떠벌렸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어…어….”
“포개어진 손 조합은 베나즈 가문을 업신여기고 있구나, 하고 여기저기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하겠지.”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라자딜르.
“입조심 좀 하자고, 사장아. 알았지? 정신 똑바로 차려.”
“네…엡….”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그녀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저택 입구를 향해 나아간다.
그럼 무안한 마음에 한참 목의 리본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라자딜르는 멀찍이 떨어진 그녀 뒤를 부랴부랴 뒤쫓아갔다.
와중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그런데 회장님, 베르융 경께서 보안 총괄이라고요? 그분은 오늘 행사의 주인공 중 한 분이 아니 십니까?!”
뒤늦게 질문을 쏟았지만 앞서 나간 스페라는 그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 * *
베르긴은 저택 외진 벽 한쪽에 기댄 채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있을 자리를 위해 차려입은 갑옷이 유독 답답하게 느껴졌는지, 사슬로 둘러쳐져 있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연신 마른 침을 삼켜야만 했다.
그러다가 저 멀리 주위 사람들에게 붙잡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베르융이 그를 발견하곤,
곧바로 그에게 다가갔다.
중무장한 베르긴과는 달리 베르융은 헐렁한 서코트 차림이었다.
“베르긴 경, 뭐 하고 있나?”
“곧 있을 행사를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답한 베르긴을 조금은 안쓰럽게 쳐다보던 베르융은 대뜸,
그의 어깨를 강하게 두들겼다.
“유연하게 움직여야지, 유연하게. 밖에 나가서 자네와 나란히 할 나머지 기사들과도 만나보고.”
베르융의 그 말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은 베르긴은 쭈뼛한 몸동작으로 저택 밖으로 나서려 했다.
마치 인형과도 같은 그의 모습을 본 베르융은,
“쯧.”
하고 짧게 혀를 차곤 베르긴의 어깨를 붙잡아 당겨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너도 오늘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아들. 주인공답게 당당하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거라.”
그 말을 마친 뒤 다시 한번 등을 팍하고 두들긴 베르융은,
어느새 곧게 펴진 베르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처음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직전까지 얼얼했던 등의 감각이 무뎌질수록 그 발걸음도 점차 자신감을 되찾은 듯 가벼워졌다.
베르긴은 이제 잔뜩 기합이 들어간 표정으로 저택을 가득 메운 인파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아버지의 말대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마치 자석처럼 자신에게 꽂혀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베르긴 경.”
“조넬리라고 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신다면 개인적으로 꼭 찾아뵙고 제 명함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직후 악수를 청하며 잠깐의 대화를 요청하는 자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온다.
순간 당황한 베르긴이었지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직하게 제 갈 길을 간 베르긴은 끝내 저택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그가 저택 밖으로 딱 빠져나오는 그 무렵,
저택 외곽에서는 막 도착한 마차들로 인해 주위가 떠들썩해진 상태였다.
한 줄기 빛조차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
열대 가까이 되는 검은색 마차 행렬.
그리고 그 선두 마차의 열린 문 너머로 제일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팡이였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땅에 꽂히고 이어 뒤늦게 따라 나온 발.
재상, 기지어 도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났다.
비록 호리호리한 체형이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대단한 그의 등장에 유력한 인사들의 눈엔 하나같이 불이 켜졌다.
베나즈 가문 안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선 바로 저 기지어라는 입구를 필수적으로 지나쳐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던 기지어가 같은 마차에서 뒤이어 내린 자에 의해 일순간 그림자로 뒤덮여버렸다.
그렇게 등장한 남자는 과거 칠기사 중 하나이자,
곧 창설될 새로운 기사단의 일원이 될 남자.
테티르 론바즈.
번지르르한 은빛 갑옷으로 무장한 그의 모습은 단지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과시에 해당했다.
“테티르 경, 가시지요.”
기지어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손짓하자 테티르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그 손짓을 따라 앞서 나갔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미리 마차에서 내려 일렬로 대기하고 있던 11인회 역시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뒤따랐다.
가뜩이나 거대해 보이던 테티르가,
그 뒤를 받치는 열 한 개의 기둥과 하나의 반석으로 더욱 거대해 보이는 순간이었으리라.
이윽고 저택 정원에 발을 들인 테티르는,
막 정문으로 걸어오는 젊은이를 발견하곤 갑자기 황소가 돌진하듯 달려들었다.
“이게 누구야!”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젊은이를 덮친 테티르.
쾅!
하는 갑옷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를 번쩍 안아 든 테티르가 우렁차게 외친다!
“베르긴 겨어엉!”
“어억…!”
몇백 살 먹은 나무뿌리에 관절기가 걸린 것 마냥, 베르긴이 턱 하고 차오른 숨을 토하듯 내뱉는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티르는 베르긴을 마치 인형 다루듯 품에 안은 채 위아래로 동동 흔들어,
아니 휘둘렀다.
“크하하! 이렇게 나와 나란히 설 만큼 장성했다니, 대견하오, 대견해!”
테티르는 한참 뒤에나 베르긴을 놔주었다.
겨우 땅에 발을 디딘 베르긴은 핼쑥해진 표정으로 간신히 미소를 그렸다.
“테티르 경, 오셨습니까…,”
“그래, 내가 왔소! 베르긴 겨어엉!”
한바탕 소란스러운 둘의 인사가 번갈아 오가는 와중.
이번엔 12두가 이끄는 장대한 마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테티르는 그 마차 지붕에 내걸린 깃발을 보곤 잇몸을 시원하게 드러냈다.
“발언가 아니랄까 봐, 아주 확실하게 내세웠군그래.”
이내 거대한 마차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무장한 기사 한 명이 내린다.
그에 맞춰 마차 뒤를 따르던 열두 기병이 양옆으로 칼같이 도열하여 수행을 시작했다.
이들의 수행을 받으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기사의 뒤로는,
화려한 양복을 걸친 기사 엘르길이 환한 미소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엘르길 경, 가버트 경.”
테티르는 주저 없이 나아가 그들을 반겼다.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베르긴은 부랴부랴 그런 테티르를 따라 어색하게 꾸벅거리며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이에 엘르길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채,
“오랜만입니다, 테티르 경. 그리고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베르긴 경.”
간략한 인사를 끝으로 가버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빠르게 퇴장했다.
“테티르 경, 반갑습니다.”
“아, 가버트! 내 인생 중반기 최악의 적!”
“짓궂으십니다.”
“칭찬일세 이 사람아!”
테티르의 우악스러운 악수에도 흔들림 없이 응하던 가버트는 이마 위에 흘러내린 한 줄기 머리를 휘날리며 베르긴을 바라보았다.
“잘 부탁합니다, 이 조직이 늘그막에 녹슬지 않게 같이 노력합시다.”
여유 넘치는 그의 모습을 동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베르긴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런, 늙은이 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꼽을 주나?!”
그 사이에서 투덜거리던 테티르는 뭐가 그렇게 또 좋은지 거대한 양팔을 벌려 장대한 두 기사를 마치 장난감 다루듯 품었다.
“그래 조직에는 이런 새파란 초목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법이지!”
그래도 지금까지 같이 해왔기에.
이들 셋 사이의 기류는 원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직후 나타난 또 하나의 마차.
그리고 마차 뒤를 따르는 여인들로 구성된 미려한 외양의 병사 수십의 등장에 미소가 그려져 있던 세 기사의 표정은 경직되었다.
외부, 자치적 세력을 가진 아이베리아 내 굵직한 대명사에 해당하는 기사는 그들에게 있어서도 어려운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열린 마차 문 너머,
전신을 무장한 채 나타난 아름다운 여기사.
에커즈 기사단장,
아리나 에커즈.
냉기의 결정으로 사람 얼굴을 만든다면 딱 저 모습이 표본이지 않을까 싶은,
냉정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는 눈앞에 모인 세 기사를 바라보며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뚜벅뚜벅 다가와,
“반갑습니다.”
세 남자 사이에 묵직한 건틀릿을 불쑥 내밀었다.
“마음에 들었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티르는 아리나가 낀 건틀릿보다 거대한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이렇게 뵈니 감회가 남다르오, 아리나 경! 아이베리아의 본 장을 주도하는 화재의 인물이라니.”
“본 장이 있다는 건 그것을 받쳐주는 밑 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사의 수많은 바탕 가운데 하나이신 테티르 경을 뵙게 되어 저도 영광입니다.”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기계처럼 따박따박 대꾸하는 그녀의 모습에,
테티르의 입은 어느새 귀에 걸려있었다.
좋은가?
그래, 좋은 건가 보다.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젊은 기사 둘은 그제야 경직된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이 어색한 분위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이번엔 하얀 천을 흩날리는 이상한 마차 한 대가 불쑥 나타난다.
마차 뒤로는 하얀 후드를 뒤집어쓴 자들이 절묘한 화음을 이루며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이내 마차 문이 열리고.
그 테티르와 덩치에선 전혀 밀리지 않는 태산 같은 사내가 걸어 나온다.
걸친 은색 갑옷은 유리 겉에 묻은 윤택을 뽑아 펴 바른 듯 초저녁에 머무른 아침을 붙잡은 채 희번덕거린다.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넘쳐나는 그 남자는 그러나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앞에 있는 네 명의 기사를 내려다보며 두 손을 모은 채 꾸벅 고개를 숙였다.
“형제자매님들, 라아 메에─”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
크녹스.
그렇게 바람, 침묵, 강력, 영광, 섬광이 한자리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