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44화 (344/365)

344화. 대립

확실한 의중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적어도 우호적인 입장이라는 것만큼은 명확히 내비친 에커즈 기사단,

순식간에 확장 시킨 세력을 위시해 자연스럽게 우리와 접촉해왔으나 그 외 모든 부분이 불투명한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

하나씩 모호한 부분을 가진 두 거대 외부 세력을 하나로 묶어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이름표가 필요하다.

그 이름표가 바로 다섯 기사, 스텔라스다.

만일 이들을 방관한다면 종래엔 거대한 적으로서 대립할 가능성이 있기에.

하나로 규합시켜 거두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다섯 기사 가운데 과반수에 달하는 세 자리가 베나즈 가문의 세력이니 효과적인 견제 및 조율에도 어려움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

토르킨 선생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었지.

전쟁이란 단어 앞에 조용함을 붙이면 그게 바로 동맹이라고.

나는 그 조용함이 깨지지 않도록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서 있어야 한다.

그것이 베나즈의 자리이고, 그 자리에 주어진 역할이니까.

“공,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내 옆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바돈이 회중시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에 자리에서 일어서자 바돈은 턱짓으로 주위에 대기 중이던 시중들을 통솔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몇 시종들은 채취한 산맥에 얽혀 있던 안개를 바닥에 흩뿌렸고,

나머지는 채취한 석양빛을 내 뒤편에 한 데 쏟아 번지르르한 조명을 만들어냈다.

이런 자리를 그래도 꽤 많이 겪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긴장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 순간만 되면 가슴이 아플 정도로 떨린다.

세련된 양복, 그 안에 금줄을 비롯한 장식에 가까운 벨트와 그곳에 엮인 채 검집에 잠들어 있는 새비안.

나는 그 새비안의 자루 끝, 폼멜을 만지작거리며 긴장감을 달랬다.

그렇게 문이 열리고,

시종들이 미리 뿌려놓았던 안개와 석양빛이 열린 문밖으로 먼저 빠져나가길 기다린 나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장내에 모인 수많은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진다.

우호, 경계, 적의, 호감.

업신여김, 계산적인, 무관심한.

각기 다른 뜻을 가진 시선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자체가 얼룩덜룩한 실로 만들어진 타래 같이 느껴진다.

장내 주도적 성격을 띤 자리는 총 여섯 개.

그 가운데 유일하게 다섯 자리와 마주 놓여 있는 의자 앞에 다가간 나는 어느새 경직되어 있던 어깨를 풀고 다시 한번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뒤따라 온 바돈이 들고 있던 유리 컵과 수정으로 세공한 작은 스푼을 내 앞에 올려놓았다.

곧바로 스푼을 집어 든 나는 그것으로 가볍게 유리컵을 두들겼고,

그렇게 청명하게 울려 퍼진 소리와 함께 주위 여기저기에 엉겨 있던 웅성거림이 일축되었다.

찰나, 마른 목을 침으로 바삐 축이고.

작게 들이쉰 한숨과 함께 내뱉는다.

“여러분들의 방문으로 이 자리가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환영하고 감사합니다.”

내 말에 직전까지 여러 시선을 보내온 좌중은 의외로 한결같은 호응을 내비치며 열렬히 반응해 주었다.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호응에도 어느새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동시에 바돈은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다섯 기사는 나오시오.”

그의 말에 여기저기가 부산스러워졌다.

그러나 곧 길을 비킨 좌중 사이로 어렵지 않게 다섯 기사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철컹, 철컹.

척, 척.

턱, 턱.

묵직한 갑주 소리와 함께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온 다섯 기사는 그저 나란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좌중에 모인 사람들 역시 같은 것을 느꼈는지 긴장감 넘치는 침묵으로 화답했다.

용의 시대 이후의 기사라 하는 것은 전 시대 기사와는 그 단어에 들어간 격 자체가 다르다.

이들 개개인이 곧 하나의 재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위 침묵은 이곳에 모인 모두가 그 위력을 알고 공감했기에 나올 수 있는 경의이자 두려움이었다.

이어 바돈이 각 자리 앞에 선 다섯 기사에게 말했다.

“오늘, 그대들은 베나즈라는 이름의 원탁 아래 하나로 묶이게 될 것이니 우리는 이 원탁을 하늘에 영원이란 명목으로 박힌 별과 같이 칭송하기 위해 ‘스텔라스’란 이름으로 부를 것이리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보인 다섯 기사.

그리고 그에 맞춰 내게 일어서라 작게 신호를 보내는 바돈.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새비안을 검집째로 집어 든 나는 내 기준 가장 왼편에 서 있는 자 앞으로 다가갔다.

이어지는 바돈의 목소리.

“베르긴 오르테 경은 고개를 드시오.”

바돈의 말을 따라 묵묵히 고개를 든 젊은 기사 베르긴,

나는 그런 그의 머리 위로 새비안의 자루를 가져다 대었다.

검 끝이 아닌 자루로서 서임식을 한다는 건 베나즈 가문의 품 안에 스텔라스란 조직이 있다는 뜻이다.

베르긴은 머리 위에 새비안의 자루가 닿자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그 자루를 포개듯 잡았다.

이에 맞춰 베르긴의 옆으로 작은 함을 든 시종이 다가온다.

나는 남은 손으로 그 함을 열어 안에 담긴 인장을 빼 든 채,

“받드시오.”

어색하지만 그렇기에 딱딱한 경어로 명했다.

그러자 베르긴은 조용히 자루를 포개고 있던 손에서 검지 하나를 치켜세웠다.

그 치켜세워진 검지에 손수 인장을 끼워주고 나서야,

베르긴은 자루로부터 손을 뗀 뒤 인장 낀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얹었다.

곧이어 잔잔하게 들려오는 박수 소리, 그리고 좌측 악단으로부터 연주되는 잔잔하고 조용한 음악.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겨 바로 오른편에 있는 기사 앞에 섰다.

“가버트 로셀란 경은 고개를 드시오.”

마찬가지로 젊은 기사.

그러나 그는 베르긴보다 능숙하게 서임식을 치렀다.

물 흐르듯 자신의 손에 인장이 걸리기 무섭게 가슴에 손을 얹은 그는 기사라는 제목이 적힌 교범 같았다.

다음,

한쪽 무릎을 꿇었음에도 그 머리가 내 상체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기사 앞에 선 나는 그에게 자루를 내밀었다.

“테티르 론바즈 경은 고개를 드시오.”

바돈의 목소리에 이어 그의 머리 위에 자루를 올려놓자, 나무 밑동 같은 두 팔이 불쑥 올라왔다.

과연 자루를 잡은 손의 힘이 남다르다.

검집을 잡은 손을 조금만 당기면 곧바로 뽑힐 정도로 테티르는 그 자루를 꼭 잡고 있었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뜻일까.

그만큼 충성을 하겠단 다짐일까.

그런 것이라면 겸허한 마음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굵은 나뭇가지 같은 그의 검지에 인장을 끼워주자 테티르는 일순간 거대한 어깨를 들썩이곤 고개를 푹 숙였다.

다음은,

“아리나 에커즈 경은 고개를 드시오.”

확실히 전의 기사들과 비교하면 작고 그 선도 여리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진면목을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그녀가 이끄는 기사단은 체계를 갖춘 재해나 다름없었다.

목표로 한 곳을 언제든지 초토화할 수 있는, 그런 부담을 몇 번이고도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의 기사단.

그러나 그렇기에 언제나 왜라는 의문이 붙을 수밖에 없다.

그만한 기사단이 어째서 베나즈와 함께 하려는 것인가? 그 근원적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멀리 두어 모르는 것보단 차라리 가까운 곳에 두어 천천히 알아갈 것이다.

그 불확실성을 나는 품고 감내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모여있다.

자루를 그녀의 머리 위로 올렸다.

그녀는 쥔 듯 만 듯 자루를 잡은 뒤 검지를 올렸고, 나는 그 손가락에 인장을 끼워주었다.

마지막이다.

“크녹스 마셀 경은 고개를 드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미지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가 가진 거대한 세력만큼은 이보다 공고할 수 없을 만큼 명확하다.

베나즈의 2차 원정의 시기에 맞추어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한 그는,

엄밀히 말하면 베나즈 가문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부분에 호감이라도 느꼈을까?

그렇다고 호감 따위에 저 남자가 베나즈의 원탁 안에 들어왔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만약 있다고 하여도 가능성이 있는 쪽은…,

지금 내 손에 쥐어진 0과 더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분명한 건.

적으로 두었을 때를 상정한다면 그만큼 골치 아픈 상대라는 거다.

에커즈 기사단은 이전부터 중립적 자세를 보여왔었고, 그 모습을 지켜본 나로서도 그들이 적으로서 우리 앞을 막을 거란 생각은 쉬이 들지 않지만.

앙 실러 데우스는 그렇지가 않아.

일전에,

시몬 바스티유라는 울타리 안에 있었을 적에.

황금밭 라티아에서 큰 건을 치르고 있던 과정에 저 앙 실러 데우스를 목격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등장한 거대한 배를.

리티아에서 벌어진 철저한 기득권들의 편향에 저 앙 실러 데우스가 껴 있던 것을 보면,

적어도 저 단체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청렴한 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크녹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일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위의 의심을 지속하는 것이 정답이다.

어찌 되었든 위와 같은 의심과 경계만이 그에 대한 결과를 도출해낼 테니까.

여러 교차하는 생각들을 품은 채,

그의 머리 위로 자루를 얹었다.

그러자 테티르와 비슷한 거대한 체격의 테티르는 한없이 웅크린 채,

“라메.”

작은 목소리로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적어도 지금 기도문을 읊는 크녹스의 얼굴엔 진심 어린 신실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 얹어진 자루를 꼭 붙잡은 크녹스의 손가락에 인장을 끼워주는 것과 동시에,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다섯별의 증인이니, 다섯별을 부정하는 자, 우리가 나서서 설득해야 할 것입니다.”

바돈의 엄포와 같은 공표로서 이번 행사의 목적이 완성되었다.

* * *

행사의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그에 맞춰 마음이 맞는 자들끼리 자연히 얽히며 그들만의 친목이 건설되기 시작한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틈틈이 스텔라스에 명명된 다섯 기사와 안면을 트기 위해 눈에 불을 켰고,

이를 통해 상석에 앉아 있는 베나즈 가문과의 직접적인 접점을 만들길 바랐다.

그런 그들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던 기지어는 그 가운데서도 내실이 뚜렷한 자들만을 골라 직접 악수를 청하고 다녔다.

테티르의 뒷배에 재상과 11인회가 있다는 것쯤은 눈이 달린 자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기에,

이런 그의 행동을 반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실 기지어는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에게 달려가 말을 걸고 싶었으니까.

기지어가 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그런 치기에 가까운 분노 따위가 아니다.

자신의 삶 전반을 부정당한, 부정시킨 자에 대한 침착하고 명확한 분노.

기지어는 그를 통해 그것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도중에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기지어는 과도할 만큼 크게 웃기도 했다.

그들과의 대화 내용이 재밌어서?

아니,

운명이란 게 참 기구하구나 싶어서!

저 남자를 이곳에서 이렇게 이런 접점을 통해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짜고 친 듯이, 신이 했다면 그 신이 허술하게 느껴질 만큼 작위적인 마주침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기에 운명이라 부를 수 있는 거겠지.

잠시 생각에 팔려있던 기지어는 정신을 차리고 크녹스가 있었던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그는 없었다.

기지어는 서둘러 그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려 주위를 탐색했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이르러 그의 고개가 멈춘 순간,

그의 바로 눈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처음으로 인사드리는군요, 스텔라스의 크녹스라고 합니다.”

처음?

기지어는 순간 품고 있던 분노의 온도를 드러낼 뻔했지만, 끝끝내 초연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반갑습니다, 베나즈 가문의 재상 기지어입니다.”

그렇게 두 남자가 악수한다.

그러나 그 악수는 왜인지 모르게 화합이 아닌,

대립처럼 보였다.

외부 세력의 수장과 가문 내 재상이라는 위치에서 나오는 대립이 아닌,

두 존재 자체의 순수한 대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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