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대립 (2)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재상.”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크녹스 경.”
두 남자의 악수는 그것으로 끝났다.
크녹스는 재상이란 단어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고,
기지어는 그런 그의 행동에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다소 허무하게 끝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둘 사이의 기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이를 어렴풋이나마 간파한 것은,
깁슨 제리드가 유일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기지어가 과거에 크녹스란 남자와 어떤 연결점이 있을 거란 걸 알아차렸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두 발 걷는 자의 범주를 넘어선, 미세한 표정의 변화마저 놓치지 않는 그의 특출난 재주 덕분이었다.
따라서 깁슨은 자연스럽게 크녹스를 직접적인 경계의 대상에 두기로 했다.
기지어와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이상,
그에게 거슬리는 것은 마찬가지로 깁슨에게도 거슬리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깁슨의 마음을,
크녹스가 알아차렸을까.
재상과 짤막한 인사를 나눈 크녹스는 대뜸 깁슨 쪽으로 몸을 틀어 다가왔다.
테티르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큰 크녹스의 그 움직임만으로도 깁슨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껴야만 했다.
이런 깁슨의 반응을 살피고 있던 제이는 부랴부랴 앞으로 나서 다가오는 크녹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크녹스와 마주 선 제이는,
저도 모르게 긴장감에 등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싸움에 잔뼈가 굵은 자들은 얼추 알 것이다.
상대와 마주 섰을 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기운을.
제이는 크녹스와 마주치는 그 순간 그의 기운에 압도당해버린 것이다.
해서 포식자 앞에 긴장으로 굳어진 피식자마냥 온몸이 딱딱히 굳어버린 제이는 순수한 경탄을 느끼며 속으로 감상을 내비쳐야 했다.
‘이런 괴물 같으니…,’
이런 제이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제이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던 크녹스는 슬쩍 고개를 틀어 그 너머에 서 있던 깁슨을 바라보았다.
“실례일까요? 인사를 나누는 게?”
시선은 깁슨을 향해 있지만, 그 말은 분명 제이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제 재량에서 벗어난 일이라서요.”
짤막한 대답을 들은 크녹스는 그제야 시선을 제이에게 고정했다.
“으음, 그렇군요.”
능청스러운 말투와 함께 손으로 턱을 받친 그가 재차 눈알을 굴려 깁슨 쪽을 바라본다.
그제야,
“제이, 물러나게.”
깁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즉시 제이는 뒷걸음질 치며 물러섰다.
“실례했습니다, 그는 제 수석 경호원이지요. 경계심을 드러내는 게 그의 일이니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어지는 깁슨의 말에 제이는 남몰래 식은 웃음을 내뱉으며 속으로 곱씹었다.
‘거, 인사 한번 하는 데 신경전 한번 요란하군.‘
꽤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낸 깁슨의 태도에도 크녹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맞춰주었다.
“과연 그렇군요? 그는 참으로 훌륭한 인재로 보입니다!”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순수한 감상을 내뱉는 그의 모습에 깁슨은 식은 미소로 화답했다.
“이미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베나즈의 11인회에 소속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유연히 대화의 물꼬를 튼 크녹스는 인자한 얼굴로 깁슨에게 손을 내밀었다.
과연 거대한 덩치에 걸맞은 손 크기다.
그대로 깁슨의 머리를 쥔 채 으스러트리는 게 가능할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잠시 뜸을 들인 깁슨은 크녹스의 손을 흔쾌히 잡아주었다.
“놀랍군요, 과거 철강 산업의 전신이자 지금은 제리워드 은행으로서 금융업의 선두를 이끄시는 깁슨님이 베나즈 가문의 깃발과 함께할 줄은.”
“무슨 뜻으로 그런 얘길 하는 겁니까?”
날 선 깁슨의 반응에도 크녹스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궁금해서지요, 제리드 가문이 축적해온 것들을 생각하면 지금 아이베리아 그 어느 곳보다 거대하기 짝이 없잖습니까.”
“거 베나즈 가문분들이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이야기 같습니다만.”
정색하며 반문하는 깁슨의 모습에 크녹스는 갑자기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오해라, 그렇군요. 그렇게 되겠군요.”
크녹스의 맹렬한 눈빛에 잠시 주춤한 깁슨이 차분함을 차린 뒤 되물었다.
“뭐가 그렇게 된다는 겁니까?”
“왜 제리드가 함께하기로 했을까 하는 의문이 처음엔 있었으나 결국 재상의 명의를 통해 넘어가기로 했던 베나즈의 결정이 재고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리드의 눈썹 한쪽이 꿈틀거린다.
“그러니까 베나즈의 스텔라스인 제가, 정식으로 위 의문을 디안 공께 고한다면 그분께선 다시 제리드와 관련해 의문을 품으시겠지요.”
꽤 무시무시한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크녹스는 금방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아직 공께선 저를 신뢰하지 않으시기에 현시점에선 의미가 없는 말이겠습니다만…,”
말끔히 정돈된 금발이 살짝 헝클어지도록 긁적이던 크녹스는 이번엔 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깁슨을 내려다보았다.
“그 신뢰 문제도 결국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말을 하는 저의가 뭡니까, 결국 모든 바탕에 저에 대한 의심이 있다는 소립니까?”
“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는 거지요. 어떤 맹수가 목적 없이 초식동물의 아가리 속에 자기 머리를 집어넣는 행윌 하겠습니까?”
“짐승이 아니라 두 발 걷는 자이기에 할 수 있지, 이상으로서. 그렇기에 그 초식동물로 말미암아 숲이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았다면, 이빨과 발톱을 가졌음에도 도울 수 있는 것이오. 이상을 가진 두 발 걷는 자이니까!”
“냉정히 말하면 두 발 걷는 자 역시 짐승이랍니다.”
“논점을 흐리지 마시오.”
물러섬 없는 깁슨의 그 당당한 행동거지에 크녹스는 처음으로 손바닥을 보이며 살짝 물러섰다.
“나는, 나의 가문은, 나의 기업은 이 아이베리아에서 미래를 보았소. 그리고 그 미래를 위해 쌓아야 할 반석은 이상으로서 정도를 꿈꾸는 깃발을 선택하길 결심했지.”
“그렇다면 잘 고르셨습니다, 0과 베나즈는 말씀하신 것과 아주 잘 어울리는 명목이니까요.”
깁슨의 두 눈이 반짝인다.
그 눈빛은 어떤 숨김 없는,
지극히 순수한 이상이 담겨있다.
“시간문제라고 하셨소? 나 역시 마찬가지요, 베나즈 가문이 제리드라는 이름을 납득하게 될 문제 말이오.”
말을 마친 깁슨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크녹스가,
씩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깁슨의 눈빛에서 뭔가를 읽은 것일까?
그렸던 미소를 순식간에 백지화시킨 크녹스는 겸허한 표정으로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음, 잘 알겠습니다.”
이번엔 깁슨이 감정의 급변을 보인 크녹스의 그 모습에서 뭔가를 발견한 것일까.
깁슨은 그에게 재차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웠소.”
이에 크녹스는 그의 손을 맞잡고 크게 흔들었다.
“또 영광이었소.”
* * *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은 회장,
그 구석.
크녹스의 부관 베커드가 조용히 그의 곁으로 와 속삭였다.
“어떠셨습니까?”
덩치에 비교해 터무니없이 작은 잔을 홀짝홀짝 기울이던 크녹스는 그런 베커드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답했다.
“성찬이었습니다, 베커드 경.”
“성찬이요…?”
“베나즈 가문은 더 커질 겁니다, 그 주인공이 예상한 범주보다 더더욱, 그 예상보다 훨씬 더. 의사와 의중과는 상관없이 폭발적으로.”
크녹스의 말에 아리송함을 느낀 베커드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탈락이 있을 겁니다, 아이베리아엔 그만큼 강적이 수두룩하니까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깁슨 제리드, 그 남자 말입니다.”
“예?”
“그 남자에게선 이상하게 사람 냄새가 안 납니다, 인의를 뛰어넘은 이상을 그려내는 솜씨가 마치 기계 수준이라 이 말입니다.”
저 말은 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말을 통해 크녹스가 전달하려는 것은 또 무엇인지.
베커드는 홀로 알아보려 노력했으나 끝내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 * *
11인회, 설리엄.
그는 티히트라로 복귀하기 무섭게 재상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직전 행사에서 꽤 고가치한 정보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설리엄은 이것을 재상에게 공유해 11인회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질 생각이었다.
물론 이를 해내기 위해선 그만큼 재상이 혹할만한 정보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리엄의 자신감은,
충분했다.
그 정보들 가운데엔 무려 베나즈 가문의 혼례와 관련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미 직전 행사에 모인 대부분의 유력 가문들은 베나즈 가문과의 혼담을 나누길 소원하고 있는 상황.
설리엄은 이 가운데 성사되었을 시 재상과 11인회에 엄청난 이득이 될 가문들까지도 모두 알아본 상태였다.
물론 그 자신감은 설리엄이 앞 전 베나즈 가문의 상황에 대해 무지했기에 가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에 접어든 그는,
굳게 닫힌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곤 더욱더 발걸음을 재촉했다.
“깁슨님…!”
깁슨에게도 정보를 공유하면 그에 따른 콩고물이 떨어지겠지, 그런 기대감에 부푼 설리엄의 부름에.
깁슨은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리엄은 빠르게 움직였던 걸음의 속도를 자연스레 늦추었고,
뒤이어 입술 위에 손가락을 걸치고 있는 깁슨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진 몰랐기에,
어리둥절 속 억울함을 드러내고 있노라면.
깁슨은 되려 그런 설리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직후 설리엄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깁슨.
“때가 안 좋네, 다음에 오게.”
“예에…? 그게 무슨…,”
설리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무실 안에서 들려오는,
쾅!
광음.
상체를 들썩일 정도로 깜짝 놀란 설리엄이 멍한 표정으로 깁슨을 바라보면,
깁슨은 재차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같이 연초나 태우지, 방문은 내일로 하세나.”
설리엄의 어깨를 감싼 채 정원 뒷길로 향하는 깁슨.
그 손길에 순순히 끌려 나오는 설리엄의 귓가엔 막 집무실 안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이런 씨발 ──── !’
* * *
기지어는 책상 위에 놓인 것들을 두 팔로 한바탕 크게 내친 직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헉…헉…!”
한참이나 씩씩거렸다.
모른다,
애초에 모른다는 개념이 성립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크녹스는 기지어를 통해 과거를 들여다봐야겠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기지어는 크녹스에 의해 과거가 철저히 파괴되었는데,
그래서 평생 크녹스에 대해 잊지 않고 살아갔는데.
정작 크녹스는 그저 아무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기지어를 모르는 사람 만나듯 행동했다.
웃기지 않은가?
과거의 크녹스는 신체에 장애가 있는 자들을 거의 도축에 가깝게 학살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그 신위를 굳혔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절름발이인 기지어에게 깍듯이 대하고 있다.
역겹다.
그 남자는 역겨운 사람이다.
하지만 그 역겨움마저 버거울 정도로, 지금의 크녹스는 너무나 장대해져 있었다.
넘어트리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높은 벽이 되어있었다.
꿀꺽.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겨우 삼킨 기지어는 겨우 침착함을 되찾았다.
치기에 겨워 감정을 분출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정도의 감정조차 조절하지 못할 사람이라면.
크녹스라는 벽을 무너트리지 못할 테니까.
기지어는 그 가혹한 기준을 내세워,
“후….”
자신을 몰아세웠다.
그렇게 끝내 온전한 진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운명은 용의 시대 때도 있었다지, 과연 누구의 손에서 만들어진 독인지…,”
뒤늦게 찾아온 허탈함에 혼잣말을 중얼거린 기지어는 그렇게,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품 안에 고이 담아두었던,
이제는 낡아서 헤질 대로 헤져버린 살생부의 지워지지 않은 마지막 목록을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