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46화 (346/365)

346화. 어느 유희

두 광대 위에 짙게 박힌 기미.

층층이 그림자 질 정도로 주름진 목덜미.

딱 보아도 지긋한 나이를 가지고 있을 노인은 그러나 웬만한 젊은이 안 부러운 올곧은 허리를 갖고 있었다.

나귀를 이끌고 가는 그의 걸음걸이 역시 정력이 가득했다.

그는 귀 큰 자들의 제사 복으로나 쓰일 것 같은 하늘하늘한 천 하나만을 걸친 채였고,

또 맨발이었다.

그렇게 험준한 산 바닥을 지그시 밟아가며 한참을 이동한 끝에야 노인은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잡아끌던 나귀의 고삐를 손에서 놓았다.

감춰놓은 듯 산 중턱에 지어진 작은 오두막집.

그 앞마당에 놓인 낡은 의자에 벌러덩 걸터앉은 노인은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여독을 풀기 위해 한껏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잠시 후,

“죽었나?”

노인은 대뜸 우렁찬 목소리로 오두막집을 향해 소리쳤다.

“아니면 살아있는데 두 귀가 먹은 건가?!”

약간의 신경질적인 느낌이 다분한 그 목소리에 얼마 안 가,

드르륵, 덜컥.

오두막집 안에서 커다란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인기척을 듣자마자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은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등받이에 미처 쏟지 못한 신체를 전부 쏟았다.

이내 활짝 열린 오두막집 문.

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장신의 노인.

“난 또 망령의 목소린 줄 알았지.”

그의 답변에 앉아 있던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악수를 청한다.

“얼마 만이지?”

그러면서 이어지는 그의 물음에,

“나도 모르지, 지금까지 갈아입은 옷이 몇 벌인지 기억하지 못할 이 산처럼.”

장신의 노인은 그의 손을 맞잡으며 화답했다.

“그러나 자네는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군! 토르킨!”

“그러는 벨라프 자네 역시도 그 얼굴에 박힌 기미 하나까지 변한 게 없군.”

장신의 노인,

마이스터 토르킨 루에르는 느닷없이 찾아온 방문자이자 마찬가지로 마이스터인 벨라프 쿠세를 진심으로 반겼다.

* * *

“토르킨, 자네도 이젠 제자를 받을 생각이 없는 건가?”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온 벨라프는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온갖 것을 어루만지고 살폈다.

그 모습을 뒤편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토르킨은 잠깐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뒤늦게 벨라프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네, 이젠 좀 쉬고 싶군.”

토르킨의 대답에 벨라프는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 천하의 토르킨이 쉬고 싶다고?”

그의 호탕한 웃음에 토르킨은 비웃음으로 응수했다.

“그래, 천하의 벨라프가 쉬길 결정한 것처럼.”

그게 잘 먹혀들었는지 벨라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입맛을 다셨다.

그런 벨라프의 반응을 즐기듯 관람하던 토르킨은 낡은 찻주전자를 가져와 미리 차려놓은 빈 잔에 따랐다.

“그만 들쑤시고 여기 와서 얌전히 차나 받아먹게.”

토르킨의 잔소리에도 벨라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기어이 찬장에 켜켜이 쌓인 문서를 발견하곤 한 뭉치 꺼내 펼쳐 읽기 시작했다.

“오호라, 자네가 배출한 마지막 제자인가? 디안…, 베나즈?”

문서에 적힌 내용을 읽던 벨라프의 고개가 자연히 기울어졌다.

앞의 이름은 마지막 제자답게 생소한 것인데, 그 뒤에 붙은 이름은 그에게도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 그 베나즈가 맞나?”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묻는 펠라프에게,

토르킨은 찻잔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베나즈의 대가 이어졌단 말인가?”

“그렇지.”

“이야…, 하기야 그 남자의 씨라면 어떤 척박에 뿌리를 내렸어도 이해가 가지.”

“정확히 말하면 그의 씨가 아니네.”

“뭐?”

“그의 의지를 이어받은 거지.”

벨라프는 은근히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근래 들어선 보기 드문 현상이지, 의지가 의지를 낳는다는 것 말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벨라프는 이제 관심이 떨어졌는지 들고 있던 문서를 구석에 던져 놓고 잽싸게 토르킨이 건넨 찻잔을 받아 들었다.

지금부터는 토르킨의 입안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제일 재밌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그 베나즈에 비견될 만한 인재인가?”

“냉정히 말하면 그 이상이지.”

“그 이상? 전대 베나즈의 무력을 뛰어넘었다 이 말인가?”

“그 말이 아니야.”

토르킨의 말에 벨라프의 한쪽 눈썹이 일그러진다.

“그럼?”

이어지는 벨라프의 반문에 토르킨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자네, 지금 아이베리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구먼.”

“그럴 수밖에, 애초에 난 아이베리아 쪽이랑은 인연이 없을뿐더러 그마저도 방랑 생활을 한 지 어언 십 년 하고도 육 년이나 됐잖은가!”

“두 번째 베나즈의 손엔 0이 쥐어져 있네.”

“뭣…!”

벨라프의 상체가 크게 움찔거린다.

“무력을 말한 게 아니야, 제왕에 대해 한 말이지.”

“그래서…, 제왕학을 가르쳤단 말인가?!”

토르킨은 찻잔을 기울인 뒤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스터,

다르게는 현자의 제자들이라 불리는 그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두 발 걷는 자를 다듬고 깎아 하나의 완벽함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

이들에게서 계산법을 배운 자는 세상에 나아가 장사의 이치를 깨달은 거부가 되고,

주위를 휘어잡는 매력을 배운 자는 세상에 나아가 감정을 훔치는 배우가 된다.

그런 마이스터가 거둔 제자에게 제왕학을 가르쳤다면,

마땅히 그 제자는 세상에 나아가 어느 한 지점의 꼭대기에 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배우고 싶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이스터의 가르침은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교육은 절대로 공평하지 않고, 그렇기에 편협하기 그지없다.

돌멩이를 제아무리 깎아낸다 한들 그것이 보석이 될 수 없듯이,

해당 보석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원석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기에 마이스터의 교육은 선별적이고, 차별적이며, 지극히 은밀한 것이다.

토르킨의 말에 벨라프가 놀란 것은,

디안 베나즈라는 인물이 제왕학이라는 세공에 어울리는 원석이란 것이었으리라.

“왜 자네가 이제 쉬려고 마음먹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군.”

벨라프는 온몸에 힘이 빠졌는지 축 처진 모습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살펴보던 토르킨은 담담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벨라프, 자네의 열두 번째 제자는 아주 대단하더군.”

이어 찻잔을 내려놓은 토르킨이 화제를 돌렸다.

“자네에게도 소식통이 있나 봐?”

그 화제에 흔쾌히 발을 들인 벨라프의 물음에 토르킨은 너털웃음을 지며 대답했다.

“내 제자들 가운데 몇몇은 날 부모 대하듯 하네, 간간이 여러 소식을 전해주곤 하지.”

그러나 끝에 가선 날카로운 눈빛으로 벨라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에 더해 자네가 배출해낸 그는 아이베리아 동부의 판을 뒤흔든 장본인이지 않은가. 아이베리아에 사는 나로서는 안들을 레야 안들을 수가 없는 인물이기도 하고.”

“나도 가장 선명히 기억하는 제자 중 하나일세, 유일하게 아이베리아 출신이기도 했으니까…,”

벨라프는 잠시 그리움에 젖은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끝내 머금고 있던 이름 하나를 작게 내뱉었다.

“사막의 진주, 율리저. 동부에선 그를 그렇게 부른다지.”

그 이름을 들은 토르킨은 존경의 마음을 담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혼란했던 동부의 의회를 휘어잡고 뜻을 하나로 일치시킨 전설의 책략가.”

토르킨의 말에 벨라프는 괜히 본인이 쑥스러웠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석이기에 마땅히 빛나는 것이지.”

“그 원석을 다듬어 빛을 발하게 도움을 준 건 벨라프 자네일세.”

직후 벨라프의 기미 낀 광대가 장난스레 솟는다.

“디안 베나즈는 어떤가?”

그러나 토르킨은 벨라프가 기대했던 반응과는 달리, 상당히 침착하면서도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이미 빛나고 있었네, 내 이전에 어떤…, 그러니까 운명 같은 것에 한 차례 가혹히 세공된 것처럼.”

벨라프 역시 저 말에 담겨있는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

토르킨과 똑같은 표정을 지은 채 은은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렇게 차분해진 분위기 속 마주 앉은 두 늙은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유쾌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벨라프, 오랜만에 어떤가?”

갑자기 활기를 띠며 묻는 토르킨의 물음에 벨라프는 역시 기대된다는 듯 같은 활기를 드러내며 큰 목소리로 답했다.

“해야지, 얼른 가져오게!”

* * *

오두막 밖으로 나온 두 늙은이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다.

둘 사이엔 그루터기로 만든 작은 탁상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손수 정교하게 만들어낸 놀이판이 펼쳐져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군, 신 노름 말이야.”

설렘 가득한 말투로 직접 깎은 말들을 놀이판 위에 늘어놓기 시작한 토르킨.

그 늘어놓은 말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벨라프 역시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딱 보니까 이번 무대는 아이베리아군?!”

토르킨을 부추겼다.

“그럼, 당연하지.”

“어디 보자, 말들이 하나같이 살벌하구먼? 아이베리아의 굵직한 것들이 다 있네. 가만? 이 말은 왜 있는가? 설마 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넣은 건가?”

늘어놓은 말들을 하나씩 들어보고 살펴보던 벨라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토르킨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든 것이 적이 될 수도 아군이 될 수도 있지. 제왕이라는 길을 걸으면 말이야.”

“음음, 그만하고 이제 유희를 즐겨보세!”

벨라프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나눠 가진 말들을 지형이 그려진 놀이판 위 곳곳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배치된 말의 뒤편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적힌 이름들은…,

디안 베나즈

베르융 오르테

테티르 론바즈

조이 크레비디

….,

아리나 에커즈를 비롯한 크녹스 마셀이란 이름이 각인된 말까지 있는 것을 보면 그만큼 토르킨이 아이베리아 중앙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꿰뚫어 보고 있단 증거였다.

그 반대편,

벨라프 역시 나눠 가진 말들을 배치했는데 그중 가장 전방에 배치된 말의 이름은…,

가헨 레바르도.

그렇게 한창 정해진 위치에 말을 놓던 벨라프가 옆에 끼고 있던 설명서를 찬찬히 읽더니 놀란 눈으로 토르킨에게 묻는다.

“크녹스 마셀…, 크녹스 마셀…,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아무튼, 토르킨! 이게 뭔가? 토르킨에 적힌 숫자가 이게 맞는 건가?!”

그럼 토르킨은 마땅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마이스터 녹셀의 인물 계산법을 적용했을 뿐이네.”

“그도 그렇지, 인물 능력 점수가 총합 30점인 베르융보다 2점이나 더 높잖나?”

그의 말에 토르킨은 살짝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벨라프가 쥐고 있는 설명서를 말없이 턱으로 가리켰다.

“크녹스 마셀 항목을 계속 읽어 보게.”

“음…! 이 말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 주위 아군 말이 공격당하면 3차례 간 침묵을 유지함…, 뭐야 이게?!”

“내세워 배치하기엔 한없이 좋은 말이지만 동시에 두 개의 말 이상의 연계와 관련해선 사용하기가 꺼려지는 말이지.”

그제야 크녹스라는 말에 적용된 점수를 이해한 벨라프는 조용히 놀이를 시작했다.

말 그대로 신 노름.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 안에 새겨진 대명사들을 마음대로 주물러 놀아보는 그것은,

그저 제자를 보내기만 할 뿐인 마이스터들에겐 그 마음을 달래줄 유일한 유희였고,

동시에 제자의 건승을 비는 스승의 조용한 응원이었다.

벨라프가 말 하나를 앞으로 내세웠다.

그 말 뒤편에 새겨진 이름은,

‘엠프리오 다르가’

“토르킨, 적의 말들이 하나같이 괴물들뿐인데 자신 있나?!”

자신의 말에 적용된 능력들과 점수들을 모두 살핀 벨라프가 걱정 반, 자신만만함 반으로 이뤄진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토르킨은 씩 웃으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말 하나를 앞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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