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안개 속에서
한 여인이 적나라한 교성을 내지르고 있다.
그녀 아래엔 젊은 사내 두 명이 나체로 뒤엉켜 있었다.
그들 위에서 온갖 외설적 행위들을 이어가던 그녀는 끝내 만족했는지 후련한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이윽고 온갖 것으로 흥건히 젖은 침대 위에서 내려온 여인은 대충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실크를 집어 걸쳤다.
다부진 신체,
빼곡히 들어찬 문신 그리고 흉터.
그것들은 분명 거친 삶을 살았다는 증거였겠지만, 유독 표독해 보이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야말로 결정적 증거였으리라.
땀 때문에 걸친 실크가 몸에 착 달라붙는다.
덕분에 몸의 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와 술이 담긴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두상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
왼쪽 광대에서부터 입꼬리를 걸쳐 수직으로 떨어지는 선명한 흉터.
들고 있던 잔을 기울이자 거기에 맞춰 그녀의 그 흉터가 실룩였다.
그렇게 술잔을 비운 그녀가 다음에 집은 것은 연초.
두툼하면서도 가느다란 입술로 연초를 꼬나문 그녀는 옆에 있는 횃불에 고개를 내밀어 불을 붙였다.
직후 하얀 연기를 거나하게 내뱉은 그녀가 저 멀리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대기하고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
“무슨 말 하려고 온 거야?”
그녀의 물음에 남자는 낮추고 있던 고개를 들어 답했다.
“베나즈와 관련한 이야깁니다.”
그러자 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반쯤 태운 연초를 횃불에 던지며 말했다.
“그건 이미 나도 들은 이야기야, 직전까지 우린 꽤 많이 바빴잖아? 그따위 것에 쏟을 신경이 없었지.”
남자는 재차 입을 열었다.
“새로운 베나즈가 다섯 기사를 서임했습니다, 칠기사의 그것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단체를 만들어낸 겁니다.”
“그래서?”
“독자적 군사권을 지닌 다섯 기사가 움직인다면 필시 그들 중 하나는 우리의 영역에까지 닿게 될 테지요.”
여인은 말없이 눈썹을 치켜세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꽤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결정적으로,
“그렇겠지, 벨리반즈 그 돼지 새끼가 실각하는 바람에 놈과 우리 사이의 거름망이 사라진 꼴이 되버렸으니까.”
벨리반즈의 몰락으로 인해 베나즈의 다섯 기사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이쪽 영역에 발을 들이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제 남자는 감청색 눈을 치켜뜬 채 정식으로 예를 갖춰 여인에게 물었다.
“엠프리오 경,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그들을 소집시켜.”
엠프리오 다르가.
그녀의 말에 남자는 말 없이 뒤돌아 그림자와 한 몸이 되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엠프리오는 대형 거울 앞에 서서 걸치고 있던 실크를 벗었다.
스르륵 떨어지는 실크 너머로 드러나기 시작한 그녀의 구릿빛 피부, 문신 그리고 흉터.
그녀는 그것에 깃든 기억들을 한 번씩 떠올리려는 듯 드러난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렇게 처음 그녀가 손을 얹은 곳은 왼쪽, 날카로운 것에 찔린 흉터.
21년 전, 전율이라 불렸던 기사 이베라와의 결투에서 얻은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왼쪽 옆구리의 베인 상처.
이것은 23년 전, 견습 기사이자 폴레논의 깃발 아래 희대의 천재라고 불렸던 데비즈와의 결투에서 얻은 것.
오른편 하복부의 패인 흉터는 과거 남동부 전역에 용맹을 떨쳤던 마가논에게, 왼쪽 허벅지의 십자 흉터는 천인장 르망에게…,
상처들을 하나하나 훑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짚은 곳은,
왼쪽 뺨이었다.
이것은 기사왕의 오른팔, 맥레인 베나즈에게서 얻은 흉터.
옛날, 그와의 결투에서 패배와 함께 얻은 것.
하지만 그와의 결투를 호각으로 이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에르엥의 깃발 아래 들어갈 수 있었고,
끝내 칠기사 중 하나의 자리까지 올랐다.
무색 엠프리오.
그 이름을 갖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이름을 벗고 새로운 이름을 얻는 데까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
대공 엠프리오.
지금 그녀에게 붙은 이름은 바로 그것이었다.
에르앵의 깃발을 무너트리고, 베나즈를 부러트리며 도달한 더 높은 곳.
칠기사 가운데 유일하게 베나즈 찬탈 누명에 직접 개입했던 그녀였기에,
사건 이후 누구보다 확실하게 윗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이제,
좀 더 높은 곳에 발을 들이미는 것뿐.
휙.
그녀의 휘파람 소리에 곧 젊은 사내 시종 둘이 들어왔다.
그들은 곧장 그녀에게 가벼운 드레스를 입혀주었고 다시 나타났던 그 모습 그대로 물러났다.
이윽고 거울에서 물러난 그녀가 방 밖을 나섰다.
벌써 시끌시끌한 회의실을 향해.
* * *
사람들은 그들을 네 개의 기둥들이라 부른다.
대공 엠프리오를 지지하는 네 개의 세력, 네 명의 기사인 그들에게 참으로 적절한 이름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은 엠프리오의 부름을 받고 한참 전에 집결한 상태였다.
둥근 원탁에 둘러앉은 네 명 중 둘은 탁상 위에 다리를 올린 채였고,
하나는 파이프를 피며 흥얼거렸으며 또 다른 하나는 쓴 안경을 재차 고쳐 끼며 까탈스러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이내 탁상 위에 다리를 올리고 있던 덩치 큰 남자가 소리쳤다.
“그거 들었수? 레바르도 가문이 제대로 발렸다던데?”
그의 말에 파이프를 물고 있던 난쟁이가 연기와 함께 거친 목소리로 답했다.
“발리긴, 아예 꽁무니를 빼고 도망쳤다던데.”
곧이어 유일한 여인이자 마찬가지로 탁상에 발을 올리고 있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이 움직였다죠?”
꽤 관심을 보이며 묻는 그녀에게 난쟁이는 질투를 느꼈는지 툴툴거렸다.
“흥, 그 광신도 놈.”
그러자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조용히 있던 남자가 재차 안경을 고쳐 쓰며 차가운 말투로 말한다.
“섬광 크녹스의 예상 수치는 32, 반면 당신의 수치는 27.”
그의 말에 난쟁이가 발끈하며 벌떡 일어섰다.
“수치는 얼어 죽을 수치! 직접 싸워보면 다르다 이 말이야!”
그러나 안경을 쓴 남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대꾸한다.
“내 계산은 빗나가지 않음, 그리고 당신은 전투 시 수치에 변동이 생길 만큼 변칙적 재능도 떨어짐.”
“저 개 같은 말투…!”
“지극히 차분한 감정으로부터 기인한 이지적 말투일 뿐임.”
“야!”
난쟁이의 외침에도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재차 안경을 고쳐 썼다.
이에 탁상 위에 올려놓았던 다리를 막 빼낸 남자가 난쟁이를 제지하고 나섰다.
“자네가 이해해, 마이스터 제자들이란 게 하나같이 나사 빠진 놈들뿐이잖아?”
물론 안경을 쓴 남자는 이조차도 놓치지 않았다.
“마이스터의 협의로 정립된 계산법은 완벽함을 자랑함, 고로 매겨진 점수는 그 대상의 잠재력 총량이라고 자신할 수 있음.”
이윽고 안경 쓴 남자가 고개를 틀어 남자를 바라본다.
“당신의 수치는 31, 잠재 능력이 극한까지 치달을 가능성이 있어 수치의 변화에 있어선 긍정적임.”
후한 평가를 받은 남자는 난쟁이의 눈치를 살피다가도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난쟁이는,
“이런 씨발…, 하나 같이….”
분개하여 잔뜩 씩씩거린다.
이윽고 여인이 궁금한 표정으로 안경 낀 남자에게 물었다.
“그럼 베나즈는? 그에 대한 수치도 얼추 계산이 가능한가?”
그러자 다시 안경을 고쳐 쓴 남자는 묵묵히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을 훑다가,
“공개된 행적들로만 추산했을 시 38점에 육박함.”
냉정하게 평가내렸다.
그러자 그 얘기를 들은 남자는 다시 탁상 위에 다리를 올린 채 휘파람을 불렀다.
“히야, 역시 베나즈의 후손이라 이건가? 하긴 그 람비를 재해 전개 하나만으로 함락시켰다지?”
그의 말에 또 난쟁이가 분개한다.
“뭐야, 베나즈에 감탄이라도 하는 거야?! 람비 건은 엄밀히 말해 0이 가진 순전한 힘만으로 이룬 거잖아!”
그러나 오히려 남자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기대되잖아? 그래도 대공님의 수치와 같은 자니까!”
그는 다시 탁상 위에서 다리를 내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 열변을 토해냈다.
“이미 베나즈를 한 번 부러트렸던 분이야, 그리고 그 베나즈를 직접 부러트린 다섯 가운데 가장 많은 실리를 챙기신 분이기도 하지. 레바르도를 봐, 가장 실리를 챙기지 못하고 아직도 남의 밑에서 골골대고 있잖아? 어쨌든! 지금 상황을 보면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그때의 일이 반복되려 하고 있어!”
그의 말에 안경을 쓴 남자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우리 측의 낙승이 확실함.”
그렇게 그들 사이에서 여러 이야기가 주고받아지길 한참.
굳게 닫혀 있던 회의실의 문이 발칵 열렸다.
그러자 원탁에 둘러앉은 네 기사는 직전의 모습과는 다른 엄숙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일관하였다.
이들은 칼같이 맞춘 제식으로서 막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여인에게 예를 갖췄다.
그것을 가벼운 끄덕임으로 받아낸 여인은 비어있는 상석에 앉았고, 그런 그녀의 착석에 맞춰 네 기사 역시 자리에 앉았다.
대공 엠프리오.
이제 그녀가 원탁 위에 툭 던져 놓듯 입을 연다.
“이렇게 소집에 응해 주어 고맙습니다.”
그녀의 말에 네 명의 기사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우선 직전에 있었던 살레와의 전투와 관련해 가벼운 치하를 해볼까 합니다.”
엠프리오는 곧 네 명의 기사 가운데 남성에게 시선을 주었다.
“베실 경, 이번 전투에서 정말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춘다.
그 남자는 엠프리오를 지지하는 네 개의 기둥 중 하나.
11년, 이자스.
베실 라모.
이어 엠프리오가 고개를 틀어 네 기사 중 유일한 여성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케린 경, 공성전에서 보인 그대의 탁월한 능력은 역시 대단했습니다.”
이에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엠프리오에게 예를 갖춘다.
13년, 페리막스
케린 맥힐
뒤이어 엠프리오의 시선이 머문 곳은 난쟁이 쪽.
“살레의 두 기사를 동시에 제압한 그대의 용맹은 물론 명불허전이었습니다, 이투.”
그녀의 말에 난쟁이가 벌떡 일어나 가슴을 뻥뻥 친다.
“저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9년, 레마크세
이투 가르크
“마지막으로, 이란. 그대의 청사진은 그야말로 명품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엠프리오의 말에 마지막으로 안경 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려한 자세로 예를 보였다.
10년, 가벨살리스
이란 벨카
그렇게 엠프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 앞에서 짧게 손뼉을 세 번 쳤다.
그 뒤,
그녀는 일어선 네 개의 기둥을 한차례 훑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은 서쪽, 베나즈와 관련해 운을 떼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