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48화 (348/365)

348화. 안개 속에서 (2)

벨리반즈 성.

정확히 말하면 벨리반즈 없는 벨리반즈 성.

그 정문은 지금 막 리케니엔에서 복귀한 크녹스를 보기 위해 모인 자유민들로 북적거렸다.

벨리반즈를 무너트리고 그 거점을 장악한 크녹스가 벌인 파격 정책은 이렇듯 자유민들의 관심과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을 노린 크녹스는 보란 듯이 자신을 보러 온 자유민들에게 연신 손을 흔들며 자신을 선전했다.

덕분에 성문에서 성관에 도달하는 데까지 무려 한 시간이나 소요됐고,

이로 인해 그와 함께한 부관 베커드는 그 사이에 녹초가 되어 쓰러져버렸다.

“크녹스 경, 자애로움이 하늘을 찌르시는군요.”

성관 입구에 드러누운 채 갑옷의 옆구리 매듭을 풀며 하소연하듯 말하는 베커드.

그런 베커드 앞에 쭈그려 앉은 크녹스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미소로 화답했다.

“대가 없는 지불은 있을지언정 지불 없는 대가는 없는 법이지요. 저들은 내게 열렬을 지불했고 난 그 대가를 치렀을 뿐입니다.”

말을 마친 크녹스는 손수 베커드의 갑옷 매듭 푸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내 갑옷이 느슨해지자 그제야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온 베커드가 두 어깨를 짚는 성호를 그으며 되물었다.

“하지만 신께서는 대가 없는 지불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럼 크녹스가 활짝 웃으며 베커드가 그렸던 것과 동일한 성호를 그으며 답했다.

“그렇기에 신이라 불리는 겁니다, 라메.”

“라메.”

자리에서 일어난 크녹스는 베커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은 베커드는 곧장 번쩍 들어 올려지듯 이끌려 섰다.

그렇게 벌떡 일어선 베커드를 뒤로한 채 긴 복도를 걷기 시작한 크녹스가 말한다.

“푹 쉬시고 저녁에 만납시다,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나눠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니까요.”

이에 베커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그럼 크녹스는 가던 걸음을 멈춘 채 어느 한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했듯, 할 이야기가 산더미라서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크녹스의 뒷모습을,

베커드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 *

벨리반즈 성 뒤편,

구석진 곳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첨탑.

그 안으로 향하는 문은 중무장한 정예 보병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다.

그런 그곳에 크녹스가 나타났음에도 이들은 별다른 예를 갖추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에게 부여된 첨탑의 경비 임무가 특수하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병사들은 크녹스와 눈이라도 마주치고 싶은 마음에 투구 속에서 눈알을 굴리기 바빴다.

그들에게 있어서 크녹스는 신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자이자 자신들을 이끌고 나아갈 선지자였으니까.

물론 크녹스는 병사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독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대들의 봉사에 감사합니다, 라메.”

다가와 어깨를 부여잡은 채 악수를 청하는 그에게,

몇몇 병사들은 감격에 벌벌 떨기까지 했다.

“어떻습니까, 첨탑 꼭대기의 이단은?”

이후 이어지는 크녹스의 질문에 병사 하나가 차렷 자세를 유지한 채 즉답했다.

“매일매일 배급한 식판이 비워지는 것을 보면 음식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관리인들의 평은 어떻지요?”

“노파는 그녀의 목욕 시중을 들면서 어떤 불편함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배급 관리관도 별말 없었고요.”

병사의 보고를 들은 크녹스는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을 있다가,

“으음…, 그렇군요.”

고개를 들어 까마득하게 높은 첨탑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이단과 만나봐야겠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병사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 저 마녀는 이단 중의 이단입니다, 어떤 사특한 저주를 품고 있을지 모릅니다.”

불경한 것을 입에 담았다는 듯 말을 마친 병사는 투구 속에서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러자 크녹스는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제가 고작 사특한 저주에 당할 자로 보입니까? 우리의 곁엔 언제나 신이 함께하십니다.”

이에 병사는 답한다.

“라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감동에 젖어서.

곧바로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선 크녹스는 길게 이어진 나선형 계단을 올랐다.

첨탑 내부 하층은 퀴퀴하고 습한 냄새로 가득 채워져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햇빛에 잘 건조된 상층부는 산뜻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렇게 도달한 첨탑의 최상층.

경첩이 녹슨 쇠문을 삐걱거리며 열어젖힌 그는 그 안에서 이미 찾아올 걸 알고 기다렸다는 듯 두 손을 모은 채 앉아 있는 한 여인과 마주했다.

검은 안대로 두 눈을 가린 채, 빛깔 없는 입술 꼬리를 미적지근히 올린 그녀는 뾰족한 턱을 내리깐 채 말했다.

“앉으시지요.”

크녹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 그녀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하여 두 사람이 조촐하기 짝이 없는 작은 탁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게 되었다.

“내가 찾아올 걸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찾아올 거라는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지.”

“두 발 걷는 자들은 시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요. 영겁을 약속받은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아!”

크녹스가 말을 잠시 멈추고 손뼉을 친다.

“당신같이 제 발로 탑 밖을 걸어 나간 이에겐 해당하지 않는 말이겠군요. 그러면 더 이상합니다? 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당신이.”

나긋하면서도 마치 주먹으로 때리는 듯한 그의 말투에도,

여인은 그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차분함을 유지했다.

“시기를 고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조만간에 나타날 결과였으니까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크녹스는,

“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다르군요?”

이번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여인 쪽이었다.

“앙 실러 데우스는 이단에 대해 매우 엄격하다죠. 특히나 저와 같은 점성술사들에겐 더더욱.”

“그렇습니다.”

크녹스는 순순히 인정하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더 이상합니다? 앙 실러 데우스의 한 축인 당신이 이단인 저와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것이, 거기다 존대까지 더해가면서 말입니다.”

이전의 말을 되받아치듯 묻는 그녀에게 크녹스는 짧은 웃음과 함께 말했다.

“어차피 다 아는 얘기잖습니까?”

여인은 시치미를 뗐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오랜 시간 벨리반즈에게 묶여 그의 미래를 들여다봤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크녹스는 감정을 드러내긴커녕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지극히 차분한 모습으로 말했다.

“앙 실러 데우스라는 불에게 있어 당신들 같은 족속들은 최고의 장작이니까.”

“솔직하시네요.”

여인의 입술이 꿈틀거린다.

아마도 크녹스의 반응이 그녀가 예상한 것과 전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앙 실러 데우스가 정의롭지 않다는 것도 인정하시는 겁니까?”

여인은 좀 더 자극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크녹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오, 앙 실러 데우스는 두 발 걷는 자들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버리는 죄책감의 배출구요. 그것만으로도 정의라 할 수 있지.”

아직까진 차분함을 잘 유지하고 있지만, 어느새 크녹스의 말투는 한층 더 날이 세워져 있었다.

“특정 집단을 이단으로 몰아 학살을 자행하는데도?”

“정의라는 건 거창한 것이 아니오, 그들이 두려워하고 배척하길 바랐던 집단이 무너졌다면 그건 그들 입장에서 정의이기 때문이지.”

크녹스가 고개를 바짝 든 채 말을 이었다.

“대중의 믿음으로 다져진 신, 그 신을 나서서 유지하는 앙 실러 데우스는 분명 정의롭다 할 수 있소.”

“그렇다면 날 살려두는 이유가 뭡니까?”

“사실 앙 실러 데우스는 내부적으로 매우 낡은 상태요. 종교는 고이게 되면 원색적으로 변하기 마련이지.”

“그래서 새것으로 바꾸겠다?”

“내가!”

크녹스의 눈이 번뜩인다.

“하여 날 살려두는 것도…,”

“그 과정에서 한 번쯤 미약해질 불길을 살리기 위한 대비를 해둬야 할 테니까.”

종래에 크녹스는 광신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여인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런 크녹스의 본색을 봤음에도,

그녀는 오히려 초연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초탈하군?”

“비슷한 취급을 항상 받아왔었으니까.”

이제 크녹스는 여인에게 천진하면서도 순수한 호기심을 느꼈는지 경직된 자세를 풀고 한결 편한 모습으로 질문했다.

“뭣 때문이오?”

“뭐가 말이죠?”

“당신네 족속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스스로 탑 밖을 나온 것이오?”

크녹스의 순수한 질문에 그녀는 어깨가 들썩이도록 웃었다.

“답을 찾기 위해서.”

“답?”

“탑 밖을 나갈 답을 찾기 위해서.”

“그래서 지금 밖으로 나왔잖아?”

“나왔지, 마법사로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야.”

그녀의 입가엔 짙은 허무가 묻어 있었다.

“용의 시대 때처럼 되길 바라는 건가?”

크녹스의 물음에 그녀는 간직했던 오랜 꿈을 내비치듯 빛바랜 미소를 지었다.

“새 시대를 연 현자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훨씬 치밀한 자예요. 탑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마법사들을 속박했으니까요.”

“그들이 반발할지도 모르는 도박수 아닌가?”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만에, 마법사들은 반발하지 않았어요. 탑 내에서 마법사는 전지전능한 신에 가까웠으니까. 당신 앙 실러 데우스가 떠받드는 그런 신에 가까운 존재.”

“전지전능함에 도취해 반발의 의지를 상실했다?”

“네, 마법사들은 분명 강하지만 그 강함에 걸맞은 오만함 역시 대단했지요. 한때 저도 그랬고. 현자는 탑이라는 감옥이면서 동시에 마법사들의 오만한 성역을 만든 거예요.”

“그리고 그 전지전능에 도취한 마법사들 가운데 소수는 근본적인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건가? 그게 바로 그대들 같은 족속들이고.”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녹스는 냉철한 표정으로 보다 근원적인 물음을 던졌다.

“어떤 확신이 있었나? 그것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작정 탑 밖으로 걸어 나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들이 말해줘요, 속삭이고 외치며 중얼거리면서.”

“별들?”

“그들.”

여인은 쓰고 있던 안대를 벗었다.

그녀의 눈은 뜨거운 뭔가에 지져진 듯 눈두덩이째로 뭉개져 있었다.

“탑 밖으로 나오면서 마법 능력을 잃었지만, 단 하나 잃지 않은 것이 있죠. 바로 감각이에요. 마법으로 단련된 초월적인 감각.”

“눈을 짓뭉갠 것은 청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기 위함인가.”

“눈치가 빠르네요.”

여인은 웃었다.

크녹스는 이제 그 여인에게서 소름이 끼쳤는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접하나 봐요? 수많은 점성술사를 붙잡아 죽였을 당신이?”

“말했잖소, 종교는 고이면 원색이 된다고. 그 말인즉슨 이단과 말을 섞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파문이란 얘기요.”

“하지만 지금 당신은 내게 묻고 있네요.”

“이젠 그래도 될만한 위치에 있으니까, 그리고 궁금했으니까.”

여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록 첨탑의 어두운 벽돌 천장이었지만, 그녀는 마치 별을 바라보는 듯 뭉개진 눈두덩이를 움찔거렸다.

“당신들은 우리와 많이 닮았어.”

“닮았다?”

“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과 비슷한 존재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크녹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질문할 뿐.

“그래서, 저 하늘에 있는 것들은 무엇을 원하지?”

여인은 말했다.

“운명.”

* * *

크녹스는 첨탑 밖으로 나왔다.

그는,

그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여인의 마지막 말에 그 어떤 말도 보태지 않았다.

신이란,

수단일 뿐이다.

지금까지 그가 겪어왔던 신은 그런 것이었다.

크녹스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챈 크녹스는 다시 고개를 내려 주위를 살폈다.

“병사!”

그의 다급한 외침에 첨탑 주위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가 부랴부랴 달려왔다.

“경! 무슨 일이십니까?!”

“뭡니까? 이 안개는?”

일대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다.

탑의 예상 날씨를 적어 출간하는 소식지에 따르면 지금 시점의 안개는 어불성설에 가까운 현상.

이 아이베리아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다면 답은 하나다.

기사라는 재해가 근방에 나타났다는 뜻.

병사는 말을 더듬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경께서 첨탑에 들어가시고 난지 몇 분 후에 갑자기 안개가 끼기 시작했습니다.”

크녹스는 곧바로 벨리반즈 성관으로 향했다.

특수 임무를 띠고 있는 병사에게 단호한 명령을 내린 채.

“지금 당장 앙 실러 데우스의 기사들에게 소집령을 내리십시오.”

이에 병사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내팽개치고 곧바로 소집령을 위해 빠르게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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