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안개 속에서 (4)
긴 시간 배를 타느라 피곤함에 절어있던 나는 마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잠들었다.
그렇게 바퀴가 울퉁불퉁한 길을 읽어내리기 시작할 때쯤 깨어난 나는,
유독 뿌연 시야에 아직 잠에서 덜 깬 것 같아 눈을 비벼야만 했다.
이어 버릇처럼 작은 손거울을 꺼내 수염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살폈는데,
음.
뭔가 이상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뿌옇다.
손거울의 뚜껑을 닫고 고개를 들어 흔들거리는 차창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자리에서 펄떡 일어나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야만 했다.
“조이 경! 숲길이라 위험하…!”
“이 안개!”
“예?!”
“이 안개, 언제부터 낀 건가?!”
마차의 속도를 급히 줄인 기수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베나즈령에 진입한 순간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잠이고 피로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네 정도 경력이면 길은 다 외웠겠지?”
내 물음에 기수는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입죠!”
“그럼 빨리 가주게.”
요청이 끝나기 무섭게 기수는 고삐를 휘두르는 것으로 대답했다.
급격히 붙은 속도 덕에 마차 안은 일순간 크게 요동쳤지만, 그 가운데서 중심을 잡은 나는 초연히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서류를 붙잡아 정돈했다.
이틀 전,
베나즈 가문의 재산이 잘 보존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리워드 은행 본점으로 출장을 나갔었다.
과연 기업가들의 땅인 뉴에트라답게 온갖 별천지가 즐비했고 그 사이에서 나는 영락없는 아이베리아 출신 사람답게 종일 얼을 타야만 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잊고 있었던,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유추해낼 수 있을 만큼 당연한 사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뉴에트라에서 제리드는,
제리드 가문은 왕이었다.
아니, 신에 가까운 위상을 자랑했다.
제리드 가문의 뿌리는 셀 수 없을 만큼의 가지를 갖고 있었고, 그 가지는 또 다른 뿌리를 낳을 정도로 대단한 심지를 갖고 있었다.
나 같이 무지한 외지인이라 할지라도 알겠다.
뉴에트라의 7할 정도는 제리드 가문의 수중에 있을 거란 걸.
이렇듯 직접 제리드 가문의 위상을 체감하고 오니 자연스레 심중에 품고 있던 의문이 증폭되었다.
깁슨,
이미 왕이자 신에 가까운 그가 어째서 돌연 아이베리아로 걸음 했는지,
왜 누군가의 아래에 들어가길 자처했는지.
또 하필 그 누군가가 왜 베나즈 가문인지…,
“포웰 제리드.”
서류 정리를 마친 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 이름을 되뇌었다.
뉴에트라에서 지겹게 봤던, 해서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철강왕.
제리드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창업자.
뉴에트라 어디를 가도 걸려 있던 초상화의 주인이자, 기업가들이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왕.
그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소름이 돋았다.
마치 판에 찍어낸 것처럼 깁슨의 얼굴과 정말 똑같았으니까.
과연 기업의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자답게 그 씨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제리워드 은행 본점은 아이베리아의 13고성에 필적할 만큼 거대했다.
그곳에서 나는 최고의 예우를 받았고,
미리 와 있던 다른 최고 등급의 고객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은밀한 지하 금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난쟁이들의 합금으로 떡칠을 한 3중 문을 거쳐 도달한 금고 내부엔,
금화 한 닢의 오차 없이 보고서에 작성된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금액이 질서정연하게 보관된 상태였고 그마저도 은행이 제공하는 최고 이율의 혜택까지 보고 있었다.
그 휘황찬란한 금화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스쳤다.
저 보관된 돈에서 딱 한 아름 만큼만 과거에 있었어도…,
지금쯤 맥레인은 테리라스의 햇볕 아래에서 맥주를 기울이고 있었을 텐데.
물론 치료되지 않는 과거를 품은 탓에 어떤 평안을 누린다 한들 반쪽짜리처럼 느꼈겠지.
그래서 오히려 다행인 건가 싶기도 해.
맥레인, 결국 자네는 눈 감았지만 완벽한 평안 하나를 간직해냈잖나.
그로 인해 한 아름의 금화 대신,
더 가치 있는 것을 남겼으니까.
“조이 경! 곧 리케니엔에 도착합니다!”
기수의 말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동시에 머릿속의 생각들도 모두 저편으로 치워버렸다.
이제 눈앞에 벌어진 현상에 집중을 쏟아야 할 때이니까.
기수가 말을 멈추기 무섭게 나는 마차 문을 박차고 나왔다.
안개는 바로 앞의 바닥조차 쉬이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짙어서 마차에 내려 발을 디디는 그 순간에도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뎌야 했다.
보통의 안개가 아니다.
탑에선 이런 농도의 안개를 조립해낼 수 없어.
게다가,
이 안개는 내게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몇 발자국 앞으로 더 걸어가자 금발의 어린 청년이 불쑥 내게 달려들었다.
“조이 경 맞으십니까?!”
잘 정돈된 차림새를 보아하니 집사부 쪽인가.
“시종장께서 보내셨나?”
내 물음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곤 품 안에 간직하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지금 바로 저택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종이를 건네받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게, 바로 뒤따라 갈 테니.”
“예.”
* * *
저택에 들어서니 그제야 짙은 안개로부터 느꼈던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종 둘이 달라붙어 내 옷가지를 받아주니 더욱 홀가분해졌다.
“시종장께선?”
“접견실에 계십니다.”
디안 공과 같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로군.
바로 계단을 올라 접견실로 향한 나는 굳게 닫힌 문 앞에 서서 짧게 두 번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안에서 성큼성큼 문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안 가.
“왔는가.”
안에서 바돈이 고개를 내밀며 나타났다.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안에서 얘기하지.”
이윽고 바돈에 의해 활짝 열린 문,
그 문 너머로 빠르게 발을 들이민 나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이에게 예를 갖췄다.
“공.”
“조이, 앉으세요.”
디안 공, 잠깐 못 본 사이에 그 매력이 더 농염해지셨군.
그의 왼편 빈자리에 앉은 나는 자연히 오른편에 앉아 있던 베르융과 마주쳤다.
“베르융.”
“조이.”
짤막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우리는 뒤이어 문을 닫고 돌아온 바돈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그렇게 바돈까지 자리에 앉자 디안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이른 아침, 베르긴 경으로부터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베나즈령에 한 무리의 기마대가 침범했으며, 그 목적이 선전포고에 있다고 말입니다.”
뒤이어 베르융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내게 말했다.
“지독한 안개 덕에 놈들이 우리의 시야를 완벽히 기만한 거지, 그 말인즉슨 이 안개의 근원은 그들에게 있다 이 말이야.”
이게 뭔지 너도 알지 않느냐 하는,
그런 뉘앙스로 말을 하는 베르융에게 나는 조용히 긍정의 끄덕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디안 역시 미리 베르융에게 간략히 들었는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서 나는 목을 옥죄고 있던 타이를 느슨하게 한 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엠프리오, 그녀로군요.”
그제야 디안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베르긴 경과 접촉한 기사가 본인을 엠프리오의 기사라 칭했다더군요.”
이어 그가 눈을 번뜩이며 내게 질문을 이었다.
“이 안개가 엠프리오, 그녀의 인챈트입니까?”
이에 나는 경직된 표정으로 즉답했다.
“예, 맞습니다.”
바로 저 안개로 인해 그녀가 무색이란 이명을 얻었었지.
그녀는 칠기사의 마지막 일원으로 당시 기록 상엔 그리 많은 것들이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 적은 내용 가운데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건.
인챈트를 위시한 야전에 굉장한 실력을 자랑한다는 것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자 그사이를 베르융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이번에 디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스텔라스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이 선전포고에 다섯 기사 모두가 참전할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그의 말끝을 이어 붙였다.
“말 그대로 전면으로 꽝 부딪히는 겁니다, 스텔라스의 총 역량이 어디까지인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그러자 디안이 나를 보며 또 묻는다.
“그리고 그 역량이 엠프리오라는 이름을 넘어설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번 전투를 통해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을 끝으로 다시 한 번 긴 침묵이 흘렀다.
그 뒤 디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베르융 경, 재상을 만나 이번 전투와 관련한 비용 문제를 논의하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시종장은 다른 깃발의 귀족들과 지주들을 규합시킬 수 있도록 내실을 더 단단히 결속시켜야 할 겁니다. 다만 그 의중은 단호해야만 합니다.”
“명 받잡겠습니다.”
뒤이어 디안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조이 경은 이 자리가 끝나고 남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 * *
베르융과 바돈이 떠나고,
이 자리엔 이제 나와 조이 둘 뿐이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조이의 눈빛과 마주한 뒤,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레버드.”
그러자 조이의 눈이 조금 커진다.
“잘란.”
이어지는 내 말에 그의 입은 벌어졌으며.
“엠프리오, 가헨.”
끝내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프리메.”
내 말이 끝나자 조이가 조심스레 묻는다.
“그 이름들은…,”
그래서 나는 되묻는다.
“조이, 이들을 알고 있습니까.”
그럼 조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끝내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 그가 질문했다.
“그들 모두는 각각이 연결점이라곤 없는 자들입니다만, 어찌 한 묶음으로 열거하십니까?”
과연, 맥레인은 그 일을 조이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로구나.
나는,
과거를 간직한 별빛을 통해 보았던, 다섯 이름에 의해 벌어진 처절한 현장의 생생한 목격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베나즈를 부러트렸던 자들의 이름들입니다.”
조이는 허탈한 표정을 짓더니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 이름 가운데 하나가 지금 내 앞에 거론되었지요.”
조이는 내 눈을 쉽사리 마주치지 못했다.
그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알려줘야 할 대상에게 오히려 전달받았음을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조이는 작게 입을 열었다.
“엠프리오 다르가…,”
이에 나는 조용히 창가로 다가가 안개가 짙게 깔린 바깥 풍경을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짙은 안개와 함께 나타난 이름 덕에,
오히려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아주 명확해졌다.
“조이.”
“말씀하십시오.”
“모두 죽일 겁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오명은 피로 씻는다.
너희 다섯의 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