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51화 (351/365)

351화. 안개 속에서 (5)

베나즈의 다섯 기사, 스텔라스.

창설 및 임명과 동시에 그들은 자연히 기존 바탕이 되었던 세력들을 흡수해 다섯 덩어리로 나누어졌다.

그 덩어리의 크기 차이는 분명히 있었으나 적어도 각각이 가진 위상의 차이는 미미했다.

베르긴은 베르융이 체계적으로 키워낸 정규군을 그대로 흡수했고,

가버트는 엘르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켄타나 전군을 움직이는 선봉 기사가 되었다.

테티르는 11인회의 적극적인 투자로 군사의 양과 질 모두를 챙겨 친 베나즈 세력인 세 기사 가운데 가장 거대한 덩치를 자랑했다.

나머지 외부 세력인 두 기사,

아리나와 크녹스는 본디 거느리고 있는 세가 거대했기에 스텔라스에 임명된 후에도 어떤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스텔라스가 기사왕의 칠기사를 표방했기에,

이들은 각각 만들어진 세력의 중심이 되기 무섭게 거점을 잡고 자치권을 행사했으며.

스텔라스의 임명식이 끝난 지 사흘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엔 이미 그들 모두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 다섯 기사는 지금 이들의 원탁인 고성 레자스에 집결한 상태다.

이들이 끌고 온 병사들은 공통적으로 베나즈의 깃발을 달고 있었지만,

그 바로 아래 깃발은 각각 다른 것들이었다.

베르긴의 깃발 문양은 부리가 강조된 맹금의 옆모습.

가버트의 깃발 문양은 교차한 세 자루의 창.

테티르의 깃발 문양은 월계관을 쥔 손.

아리나의 깃발 문양은 폼멜 부분이 꽃인 글라디우스.

크녹스의 깃발 문양은 기도를 드리는 손.

이렇듯 다섯 깃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고성 레자스의 성관 안쪽에 차려진 원탁엔 집결한 다섯 기사가 둘러앉아 있었다.

아직 서로 미묘한 긴장감조차 생성되지 않은 이른 시점인 덕분에,

이들은 눈앞에 놓인 상황에만 집중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크녹스.

“베나즈령 전체에 안개가 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테티르가 즉답했다.

“이미 들었듯, 엠프리오 다르가. 그녀가 베나즈에 선전포고를 했소.”

이어서 가버트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군은 이미 켄타나 전방에 배치되어있는 상태입니다, 리케니엔의 우측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지요.”

가버트의 그 말에 베르긴이 덧붙여왔다.

“그렇담 저는 이 회담이 끝나는 즉시 리케니엔의 좌측을 막기 위해 군을 움직이겠습니다.”

이런 베르긴의 모습을 살피던 테티르는 그 틈새에 사족을 찔러 넣었다.

“베르긴, 그 짧은 사이에 완전히 기사가 다 되었구나!”

갑작스러운 테티르의 다정함에,

베르긴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둘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를,

크녹스는 변태 같은 미소로 바라보며 만족감을 은근히 드러냈다.

아리나는 그런 크녹스를 흘겨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마치 별종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으로.

물론 아리나의 흘김을 놓칠 크녹스가 아니다.

그는 갑자기 인형처럼 고개를 꺾어 자신을 흘겨보고 있던 아니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는지 그 아리나가 놀라 상체가 들썩일 정도였다.

“좋지 않습니까? 마치 우리 모두 한 가족 같잖아요?”

테티르의 사족에 자신의 사족을 덧붙이니 원탁 위엔 더욱 묘한 기류가 흘렀다.

아리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 크녹스의 부리부리한 시선이 거둬질 것 같았으니까.

아리나의 이러한 의중을 알아차렸는지 크녹스는 얼른 시선을 거둬 원탁 위로 옮긴 뒤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 역시 휘하 기사들을 동원해 전선을 길게 구축시켜놓겠습니다. 구축한 전선 내 이상이 생기면 곧바로 연락하도록 하죠.”

크녹스의 말에 테티르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떻게 연락을 한단 말이오?”

“저를 따르는 기사와 병사들이라면 능히 가능할 겁니다.”

“베나즈령 전역에 깔린 안개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시오? 이번 전투는 믿음보단 확신이 우선이오.”

날 선 테티르의 반응에 크녹스는 유순한 태도를 보이며 수긍했다.

테티르는 크녹스가 좀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길 바랐는지, 그 예상과 달리 숙이고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곤 짧게 입맛을 다셨다.

이어 아리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칠기사의 일원이셨던 테티르 경의 의견을 우선으로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엠프리오 다르가 역시 과거 칠기사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직전까지 예민하게 굴었던 테티르 역시 차분함을 되찾았는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네 기사를 차례로 훑어보며 설명을 이었다.

“엠프리오는 난전의 귀재요, 안개 속에서 전투한다는 건 오히려 그녀가 바라는 바지.”

가버트가 묻는다.

“그럼…?”

“안개 밖으로 나가야 하오. 베나즈령 밖에서 선제타격을 해야 한다 이 말이요.”

크녹스가 부리부리한 눈빛을 보내며 이어 묻는다.

“그녀가 베나즈령 바깥에 안개를 깔면?”

그러자 테티르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두 눈을 통찰로 번뜩이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소.”

확언과 동시에 원탁 위에 두 팔을 올려놓은 테티르는 네 기사의 이목을 대번에 빨아들였다.

“엠프리오가 베나즈령에 안개를 핀 것은 어떤 확실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오.”

베르긴이 마른 침을 삼키며 묻는다.

“0이로군요.”

이에 테티르가 손가락으로 베르긴을 짚으며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이 전투는 엠프리오 입장에서 절대로 공평할 수가 없소, 왜냐하면 우리 측에 상정을 아득히 초월하는 비대칭 전력이 있기 때문이지.”

크녹스가 활짝 만개한 미소로 중얼거린다.

“디안 공!”

“그렇기에 엠프리오는 베나즈령에 펼친 안개를 절대로 거두지 않을 거요, 0을 소모 시킬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에.”

아리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안개가 깔린 베나즈령에서 난전을 유도한다, 그 과정에서 베나즈 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면 필시 그 안개로 인한 불리함을 해소하기 위해 0이 나타날 것이다.”

“정확하오. 0은 절대라는 게 없는 이 세상에서 한순간만큼 절대를 제시하는 모순적인 힘이지. 그 말은 바꿔 말하면 지속할 수 있는 절대는 아니란 거요.”

테티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본격적인 연설을 시작했다.

“과거 기사왕이 전투를 어떻게 치렀는지, 여기 가운데 몇몇은 문건으로나마 접해 봤을 것이오.”

이어 그가 원탁 위에 손을 짚으며 근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칠기사는 태풍의 전조였소, 한없이 몰아치고 쏟아지며 그렇게 태풍의 눈을 천천히 적진으로 이동시켰지. 그게 바로 칠기사의 역할이었소.”

가버트가 순수한 경탄을 내밀었다.

“그야말로 진정 살아있는 재해 그 자체였군요.”

“그렇지, 그렇게 적진에 태풍의 눈이 도달한 순간. 그 한순간의 절대적 힘으로 인해 확고한 승패의 결과가 도출됐소. 엠프리오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영역 안에 태풍의 눈을 들이길 꺼릴 것이오.”

테티르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직전에 보였던 비장한 표정과는 달리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문제는…, 어쨌든 주도권은 엠프리오에게 넘어간 상태란 거요. 지금 우리가 회담하는 이 순간에도 그녀는 안개 속에서 이동 중일지도 모르니까.”

크녹스가 말했다.

“공격 주도권을 엠프리오 쪽이 쥔 이상 수비군은 필수란 소리인데…,”

이어 아리나가 냉정한 표정으로 모두의 의견을 묻듯 말한다.

“수비군은 확정적인 소모를 감행해야만 한다, 그 말이로군요.”

그 말에 순간 침묵이 찾아왔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리에서 대뜸 일어난 베르긴이 그 침묵을 와장창 깨트렸기 때문이다.

“테티르 경께서 말했듯 이 순간에도 그들은 안개 속을 가로지르며 우리가 모르는 위치에 군을 배치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의 시간 낭비는 사치라 이 말입니다.”

그 베르긴에 동조한 가버트가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리 말씀드렸듯, 리케니엔의 우측은 제가 막습니다.”

베르긴 역시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돌아가는 대로 좌측 전선을 구축할 테니 셋은 안개 밖을 찌를 창을 갈고닦아야 할 겁니다.”

기사란 무엇인가,

전투에 있어 가장 확실한 움직임을 보여줘야 할 말이다.

그 과정에서 명예를 말하는 단호함은 필수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보았을 때 저 둘은,

두 젊은 피는.

진정한 기사라 할 수 있겠다.

테티르는 원탁을 빠져나가는 저 두 기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은연중에 11인회를 비롯해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를 바탕으로 계산하고 경쟁하고 있었으니까.

한 깃발 아래 모였다고 한들,

스텔라스는 엄밀히 말하면 다섯 개의 파벌로 구성되어 있다.

테티르는 그 파벌이라는 것에 정신을 매몰시키고 있었던 거다.

마찬가지로 외부 세력이면서 그렇기에 한걸음 물러선 채 지켜보고 있던 아리나와 크녹스 역시 윈탁을 빠져나간 두 기사의 뒷모습에 뭔가를 느꼈는지,

“중앙 전선에 살을 붙여야겠군요.”

크녹스가 먼저 능청스러운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병을 위시한 별동대를 꾸려놓겠습니다.”

뒤이어 아리나 역시 원탁 위에 올려놓았던 투구를 옆구리에 낀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둘의 기상에 테티르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에게,

크녹스와 아리나가 예를 갖추며 말한다.

“안개 밖으로 뛰쳐나가 찌르십시오, 베나즈의 창이여.”

“안개 속의 그들이 놀라 물러설 수 있도록.”

이제 테티르는 과거 느꼈던 그 영광의 기억만을 떠올렸다.

그렇기에 벅차오르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그가 둘을 향해 확언했다.

“찔러 관통할 것이오, 내 이름을 걸고.”

* * *

44년, 피아벨룸스.

기상이 직조한 세상의 베일.

엠프리오의 인챈트는 단순 재해의 위력으로 따지면 그리 강한 축에 끼지 못한다.

그렇기에 인챈트의 발휘로 인한 반동 역시 다른 위력형 인챈트에 비해 적은 편이다.

따라서 엠프리오가 가진 인챈트는 어떤 전투에서 승패를 가로지를만한 위압을 펼치진 못했다.

하지만,

엠프리오는 그 인챈트로 말미암아 전장의 판, 그 자체를 만들어낸다.

완벽한 재해의 이해, 비 위력형의 반동이 적은 장악형 인챈트.

그 둘이 엠프리오라는 걸출한 재능을 가진 기사와 맞물려 엄청난 성능의 반등을 이뤄낸 것이다.

그렇기에 엠프리오,

그녀가 만든 이기적인 판 위에서 상대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곤 무색뿐 이리라.

적 군세의 버릇, 진형, 반복 그 형형색색의 색깔이 아닌.

종잡을 수 없는 무색을.

무색, 엠프리오.

그녀가 지금 안개 속에 있다.

그 아래 네 기둥인 기사들과 함께.

“판 위에 올라서라, 말들이여. 내 착수에 따라 움직여 적들을 치고 무너트려라.”

그녀가 손꼽히는 명품이자 자신의 애검인 흑색 커틀러스 ‘바르자넨’을 치켜세웠다.

“그러면 닿게 될 것이다, 상대측 왕에게.”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개 속에서 3천에 달하는 병력이 다섯 갈래로 쪼개진다.

이들이 나아갈 향방은 오롯이 당사자인 본인들만이 알고 있다.

그러니,

모른 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베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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