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52화 (352/365)

352화. 안개 속에서 (6)

병사들의 침묵으로 만들어진 고요함.

주위에 짙게 깔린 안개 너머, 있을지도 모를 적들을 경계하는 그들의 눈빛엔 호승심과 두려움이 공존해 있다.

파이크와 스쿠툼으로 무장한 전열,

아밍 소드와 버클러로 무장한 2열.

워 해머와 엑스로 무장한 3열.

안개가 핀 전장의 특성상 난전이 벌어질 것이기에 궁병은 없다.

그들은 그렇게 약속이라도 한 듯 기침 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진형을 유지했다.

모두가 베르융의 거듭된 훈련에 단련된, 베나즈의 깃발이 지금까지 치러왔던 전투 전부를 겪은 전사들이다.

해서 이 안개 속에서 곧 벌어질 난전에도 물러서지 않을, 그렇게 마음을 먹은 그들이었지만.

결국엔 그들 역시 사람이었기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들은 사람이면서 전사들이었기에.

다그닥 ─

전열을 가로지르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마자 두 눈을 번뜩인다.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는 말 위 잿빛 갑주로 무장한 기사.

그가 양손으로 들어도 버거워 보이는 중검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린 채 병사들의 시선을 한점으로 끌어모았다.

베르긴 오르테.

그는 안면 가리개를 내린 투구 속에서 재빨리 병사들의 눈빛을 훑었다.

알고 있다.

병사들은 베르긴인 자신이 아닌 오르테라는 이름을 믿는다는 것을.

대뜸 베르융이 물러나고 그 아들이 리케니엔의 중앙군을 흡수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해서 베르긴은 이 자리, 이 상황에서 증명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증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선,

까짓거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이용할 것이리라.

“백부장 릴겐! 좌측 선두에 서서 대열을 고정하고 백부장 샌슨은 우측을 맡아라.”

베르긴은 낮고 패기 넘치는 목소리로 자기보다 나이 많은 백부장 둘에게 명령했다.

“적들은 안개를 핀 목적에 걸맞게 난전으로 승부를 걸어올 것이다, 우린 그 속에서 한 점에 무게를 실어 돌파, 구축한 진형으로 찍어 누른다.”

그는 건틀릿을 낀 손바닥을 병사들에게 보인 뒤 곧이어 그 손에 깍지를 끼어 움켜쥐었다.

적들은 난전을 유도하기 위해 넓고 불규칙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활짝 핀 손으로 손쉽게 비유한 것이었고,

그것을 깍지로 움켜잡는 것으로 병사들에게 할 일을 각인시킨 것이다.

과연 오르테라는 이름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는지,

직전까지 약간의 의심이 깃들어 있었던 병사들의 시선에선 점점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기사의 힘을 경계하되 신봉하지 마라! 전쟁의 승패는 결국 그대들 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틈새를 놓치지 않고,

베르긴은 그들 이글거리는 눈빛에 양식이 되어줄 마른 장작 같은 말을 쏟아냈다.

“이 전투에서 그대들이 내릴 결정은 무엇인가!”

고삐를 잡고 전열 좌우를 반복해 돌아다니면서,

중검을 붕붕 휘두르며 분위기를 한껏 고취 시킨다.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이빨 빠진 젊은이 하나가 들고 있던 파이크를 치켜세우며 외친다.

“승리를!”

그럼 베르긴은 기다렸다는 듯 젊은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더욱 거센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인가!”

그럼 한 청년의 것이었던 외침은 금세 번져 수십,

“승리를!”

“무엇인가!”

수백.

“승리를!”

수천.

승리를 ──── !

승리를 ───── !

병사들이 그렇게 말했다.

승리를 결정했노라고.

그 열렬함에 베르긴은 치켜들었던 중검을 내린 채 벌겋게 달아오른 병사들을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나도 그 결정에 따르겠다, 그대들을 따르겠다.”

전과는 달리 한없이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병사들은 그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아니 놓칠 수 없었다.

자신들의 결정에 저 기사가 따르길 결심했다.

기사의 결심에 따르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결심에 따르는 기사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은,

아 ───── !

두려움의 말미까지 전소시킬 화염으로 번졌다.

그렇게 이들의 터질듯한 함성에 주위 안개마저 떨리길 한참,

저 보이지 않는 너머로부터.

부우우 ─── !

묵직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병사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기를 고쳐잡고, 내세우며 턱이 갈라지도록 이를 씹었다.

한참 이어진 뿔피리 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엔 진형 바로 왼편에서 뿔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부우우 ─── !

정면 너머의 적만을 상정했던 병사들은 바로 왼편에서 들려오는 뿔피리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뿔피리 소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엔,

부우우 ─── !

우측.

부우우 ─── !

후방.

사방에서 뿔피리 소리가 기만적 화음을 쌓으며 퍼진다.

베르긴은 서둘러 그 화음을 깨트리기 위해 노력했다.

“현혹되지 마라! 직전에 펼쳐지는 상황에만 집중해!”

바로 전에 했던 베르긴의 열정적인 연설 덕분이었을까.

이미 병사들 대다수는 차분함을 되찾은 채였다.

이어 베르긴은 즉시 벨트에 묶어 놓은 낡은 자루를 움켜쥐었다.

그것은 아버지 베르융이 맥레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본인에게 건네준, 한때 최강이라 불렸던 남자의 인챈트.

14년, 모리비타 벤투스.

세상을 질주한 바람.

인챈트를 한 자루의 검으로서 벼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인챈트가 깃든 물건을 완성하기 위해선 세 종족의 손을 무조건 거쳐 가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베르긴은 아직 그 강대한 바람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부족한 상태.

하지만 그토록 기사를 바라마지않던 베르긴이었다.

그런 자신감을 품고 있던 사내답게 자루에서 어렵지 않게 한 줄기 바람결을 뽑아낸 그는 그것을 풀어헤쳐 사방에 흘려보냈다.

14년, 모리비타 벤투스는 재림형 인챈트.

사용자의 몸에 재해가 깃드는 재림형 인챈트의 특성상.

재해는 곧 사용자의 또 다른 감각 기관으로서 작동할 수 있다.

지금 베르긴이 풀어헤친 바람이 그렇다.

이 지독한 안개는 부는 바람에도 그 모양이 어그러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나아간 바람이 쓰다듬은 것이 무엇인지 베르긴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해서.

베르긴은 두 눈을 감은 채 떠나간 바람결이 전해주는 감각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까슬한 잔디,

차갑고 완만한 기류.

그리고 그 자연적인 것들의 쓸어내림 직후 느껴지는,

뾰족하고, 단단하고, 비릿한.

적들의 윤곽.

“우측 후방이다!”

번쩍 눈을 뜬 베르긴이 벼락같은 목소리와 함께 치켜세운 중검으로 우측과 후방을 아우르며 휘둘렀다.

동시에 그 순간 우측과 후방에서 연달아 터져 나오는 벼락 다발 같은 함성.

아 ───── !

“진형을 재구축하라!”

베르긴은 도열한 병사들을 가로지르며 적들이 오는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 베르긴의 뒤로 1열에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줄지어 따랐고 자연스럽게 2열과 3열의 병사들은 좌우로 갈라져 길을 터주었다.

삽시간에 적 진행 방향에 맞추어 재구축된 진형.

그 선봉에 선 베르긴이 고삐를 잡아당겨 말머리를 들어 올린다.

“더 굳건하게! 단단히!”

이제 병사들의 눈에도 보인다.

융성한 안개 너머로부터 속속 튀어나오는 적들의 모습이.

도리깨와 검, 망치와 도끼로 중무장한 그들의 실체가.

그렇게 부유물을 잔뜩 싣고 떠내려가는 산사태처럼 쏟아진 적 병력이 베르긴의 1선과 맞부딪혔다.

으드득, 으적!

내세운 강철끼리의 부딪침은 예상과 달리 부러지고 짓이겨지는 원초적인 소리를 내뿜었다.

그 강철을 입고 휘두르는 자들이 부러지고 짓이겨지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1선.

그러나 그 사이에서 말을 몰며 적들을 말 그대로 휘둘러 쳐 갈아버리는 자가 있다.

기사 베르긴.

그의 중검이 직각의 궤적을 그리며 적들을 문자 그대로 절삭 해버린다.

무덤덤하게 펼쳐지는 괴력의 증명.

직각으로 깎여나간 적들의 파편이 베르긴의 그려진 궤적 위로 둥둥 떠다닌다.

그러나 막힘 없이 이어질 줄만 알았던 직각의 궤적은,

어느 한 점을 만나.

쾅 ─── !

깔끔하게 가로막혔다.

그러나 맞부딪힌 둘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그 충격음만으로 주위에 있던 병사들 귓구멍이 터져나갔다.

두 존재가 타고 있던 말 역시 괴력에 앞다리가 꺾여 쓰러져버렸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 위에서 떨어진 두 기사가 비로소 서로를 확인한다.

“크, 손목에 피 대신 전류가 흐르는 것 같군.”

베르긴의 검격을 막은 기사가 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베르긴이 이미 일전에 한 번 들어본 목소리였다.

“과연…, 기대하던 대로다!”

남들보다 훨씬 작은 키.

그러나 남들보다 두 배는 다부진 신체.

성벽의 한 부분인 것처럼 느껴지는 강철 갑옷을 입은 난쟁이 기사.

“이투 가르크.”

이투 가르크가 그레이트 헬름을 갸우뚱 기울이며 들고 있던 메이스로 베르긴을 가리켰다.

“베르긴 오르테…!”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어떤 말로도 둘 사이에서 뭔가를 증명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마주한 두 기사가 하나를 증명하기 위해선,

반복되는 부딪힘만이 있을 뿐이리라.

이윽고 두 기사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어 무기를 맞대었다.

쾅 ───── !

포성에 가까운 굉음, 허옇게 질린 채 둥글게 퍼져나간 충격파.

두 괴력의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 * *

엠프리오의 네 기둥,

이란 벨카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표정으로 쓰고 있던 안경을 연신 고쳐 썼다.

방금 막 자신에게 들어온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공의 안개 속에서 적들이 실종되었다?”

그의 날 선 물음에 보고를 올리던 병사는 하얗게 질린 채 떨어야만 했다.

그만큼 이란이 뿜어내는 기운은 범인들의 숨통마저 조일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 안개 속에서 오리무중이어야 하는 건 바로 우리 쪽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의 역설이 벌어졌단 말인가?”

재차 이어진 이란의 물음에 병사는 대답조차 하기 힘들었는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의 침묵이 이어진 끝에,

“재밌군.”

이란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동시에 하얗게 질려 있던 병사 역시,

“허억… 허억…!”

목을 어루만지며 막혀있던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대공의 판 위에서 용케 우리와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다니, 보고 싶어졌다. 이를 주도한 기사의 얼굴을…!”

이란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금 안개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져버렸다.

그 뒤로.

* * *

27년, 프리스모스

흘러버린 고산의 고인 바람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고압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

그 기류의 중심점에 있는 것은,

흑색 갑주로 무장한 기사 가버트 로셀란.

그가 들고 있던 창대를 고쳐 잡은 채 눈앞에서 사라진 적들을 기만하듯 말했다.

“우리도 이동한다.”

대놓고 말해도 듣지 못할 것이다.

대놓고 발을 구르며 이동해도 그 또한 듣지 못할 것이다.

이미 고산으로부터 흘러버린 바람이 이 일대에 고압을 명해놨으니.

적들이 안개 속에 모습을 감췄다면,

그 안개 속 적들에게서 우리 역시 감추면 그만이다.

기만에는 기만으로.

그렇게 가버트는 병사들을 이끌고 사라진 적들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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