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곰 사냥
“경, 엠프리오는 어떤 기사였습니까?”
발리르의 3기사, 가르웨가 물었다.
그러자 그와 나란히 말을 탄 채 안개 낀 풍경을 주시하고 있던 테티르는 두 눈을 감았다.
과거를 뒤적이길 한참,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테티르는 다시 눈꺼풀 속에 숨겨져 있던 부리부리함을 내놓았다.
“훌륭한 기사였다. 난전의 귀재이자 인챈트의 달인이었지.”
테티르의 후한 평가에 가르웨는 긴장한 모습으로 마른 입술을 적셔야 했다.
“그녀가 가진 재해는 그 자체가 위력과는 거리가 먼 것이네, 흔히 알고 있는 0이라는 숫자에 가까운 인챈트들 말이야.”
가르웨는 주위에 깔린 안개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티르의 말대로 엠프리오의 인챈트는, 그로 발현된 재해의 위력은 다른 인챈트보다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재해 자체의 위력이 너무나 강해서 대부분이 적은 숫자에 속해있는 지진.
종류가 너무나 다양해 고루 분포되어있는 만큼 위력의 고점과 저점의 차이 역시 큰 풍랑.
지진과 결은 같지만, 위력의 정점까지 도달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한 화산과 화쇄류.
뭐라 특정 지을 수 없으나 그렇기에 특별한 각종 희귀 재해까지.
이 모든 것들은 사용자의 역량과 재치가 더해져 위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엠프리오의 인챈트는 다르다.
안개 그 자체만으론 물리력이 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엠프리오는 자체만으론 발휘할 위력이랄 게 없는 저 인챈트를 가지고 칠기사에 올랐다는 말이고.
그 말인즉.
안개 속에서 본인의 존재 자체가 위력으로서 증명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테티르의 말은 가르웨의 생각을 확신시켰다.
“안개라는 무대 위, 그녀가 가진 야전 지휘야말로 엠프리오란 이름을 가진 재해의 실체라 할 수 있다네.”
“그 정도로 대단하단 말입니까?”
“칠기사의 마지막 자리를 꿰찬 데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야, 하지만 가르웨.”
테티르는 가르웨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 강인하고 각진 턱이 순간 부드럽게 느껴질 정도로.
“절대라는 건 없네.”
그의 자신감 넘치는 말을 들은 가르웨는 한결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 지금은 기량이 떨어져 베나즈령 전체를 아우를 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머지 스텔라스들의 위치까지는 나부낄 수 있다네.”
가르웨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에도 스텔라스들의 위치를 모두 품을 정도라면 적어도 베나즈령의 절반이란 소리다.
그 절반을 아우르며 불 수 있는 것이 바로,
테티르라는 바람이고.
그러니까.
“아직 제 눈에 경은 한없이 거대해 보이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가르웨는 뒤늦게 존경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테티르는 너털웃음을 뱉으며 시원스레 대답한다.
“그냥 바람이 아니지, 자네라는 벼락을 품었는데.”
그렇게 잠깐 둘 사이의 기류에 약간의 웃음기가 가미되었지만, 이내 테티르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그 기류도 휘발하듯 사라져버렸다.
“내 펼친 바람결이 알려줄 걸세, 스텔라스 가운데 누군가 전투를 시작했음을. 우린 그 시점에 곧바로 안개 밖을 향해 출발해…,”
“외곽 어딘가에 있을 적들의 진영을 후벼 파야겠지요.”
“맞네, 안개 밖이라면 새들을 동원한 정찰이 통할 테니 그들 야영지의 위치 또한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거야.”
테티르의 그 말에 가르웨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뒤에 도열한 기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덤덤한 표정으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래 안장엔 작은 새장이 하나씩 매달린 채였다.
테티르 군 자체는 리케니엔 중앙군을 흡수한 베르긴보다 그 수가 적었지만,
이들은 굽이진 성 갈로샤를 점령하며 압축된 실전 경험을 축적한 베테랑 중의 베타랑이었다.
테티르라는 강렬한 바람에 묵묵히 올라타 나부끼길 선택한,
전사인 것이다.
이윽고 테티르의 한쪽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가 펼친 바람결 가운데 일부가 헝클어진 탓이었다.
그것이 어느 한 감각이 되어 테티르의 관자놀이 부분을 쿡쿡 찌른 것이었다.
그의 표정을 살피던 가르웨는 조용히 주먹 쥔 손을 올렸다.
그럼 뒤에 도열한 병사들은 고삐를 고쳐 잡고 상체를 살짝 숙인 채 언제든지 달릴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부릅뜬 눈으로 정면을 응시한 테티르가 전군에게 명했다.
“지금이다.”
* * *
엠프리오의 네 기둥 중 하나.
기사 베실 라모.
그는 지금 전역이 안개로 뒤덮여 있는 베나즈령 바깥에서 대기하는 중이다.
병사들은 금방이라도 임전할 기세로 무장하고 있었고,
그들 선두에 선 베실 역시 안장에 채워진 워 해머의 긴 자루를 언제든 뽑아 들 요량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전에 엠프리오가 설계한 계획대로.
곧 있으면 저 너머 경계선을 이루며 깔린 안개 속에서 베나즈 군이 나타날 것이다.
엠프리오가 이번 전쟁의 기반에 깔아 둔 것은 바로,
역발상.
안개 속 유리한 지점에서만 싸울 거란 적군의 생각과 그러한 생각을 뒤집어 오히려 안개 밖으로 뛰쳐나가 야영지를 찌를 것이란 통찰까지.
그 모두를 기만하고 부정할 역발상이다.
안개라는 변수를 적들은 분명 뒤집을 것이나,
안개라는 변수가 주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전군이 한 몸처럼 움직일 순 없다.
거기에 더해 안개에 배치된 군과의 충돌로 그 불확실성이 증폭된다면,
안개 밖으로 나가기 위해 움직이는 군은 조각난 덩어리에 불과할 거다.
바로 그 조각난 덩어리 부분을 철저하게 요격한다면,
이 전쟁은 엠프리오가 도달하려는 종착지인 승리에 마땅히 도달하게 될 것이다.
보호제를 덧씌운 회중시계를 바라보던 베실은 슬슬 초조해졌는지 안장에 채워진 워 해머를 뽑아 들었다.
망치 머리 부분에 난쟁이 특유의 단순한 문양이 각인된 그것은 자루까지 강철로 이뤄져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베실은 그것을 작은 아밍 소드마냥 아주 가볍게 다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보인다.
안개 너머로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새떼들이.
각종 울음소리를 내며 안개 너머서부터 나타난 새떼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미 그 새들은 베실을 비롯해 대기하고 있는 그의 병사들까지 모두 목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전투 준비!”
베실은 곧장 워 해머를 높이 치켜세워 병사들의 집중을 한 점으로 모았다.
직후 묵직한 대형방패로 무장한 중보병,
그 뒤에 전문적으로 기마대를 저지할 파이크 병들로 오목한 모양의 전열을 꾸린 뒤 바로 그 뒤에서 베실은 전열을 뚫고 올 적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이 모든 것이 안개로부터 새떼가 나타난 지 3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만큼 과정에서 있었던 제식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간결했다는 뜻이다.
이는 베실이 이끄는 군의 숙련도가 그만큼 출중하단 반증이다.
이윽고,
한바탕 새떼가 하늘을 훑고 지나가기 무섭게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두 ────── !
무지막지한 기세로 발굽 소리를 내가며,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시위를 떠난 살처럼 나타난 그들 선봉에 우뚝 선 깃발 문양은…,
월계관을 쥔 손.
엠프리오가 예상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저 깃발을 보자마자 베실은 전열 깃발을 향해 성대로 빚은 벼락을 내뿜었다.
“절대라는 건 없다, 우린 여기서 막는다!”
등장 자체만으로도 아군의 사기를 좀먹는, 테티르는 그런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이 두려움에 젖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다.
덕분에 전열 병사들은 더욱 촘촘히 간격을 좁혔고, 이제 방패로 만든 벽은 하나의 작은 성벽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제,
두두 ───── !
멀찍이 떨어져 보였던 테티르 군이 벌써 코앞까지 당도해 왔다.
그는,
그리고 그를 따르는 병사들은 속도를 늦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마주하기 버거울 정도의 바람이 정면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그 바람과 함께 들려오는 것은…,
“내 이름은 ───── !”
현재진행형임을 알리는,
“테티르 론바즈으으 ──── !”
건재한 전사의 외침.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전열과 함께 전열에 치달은 테티르 군.
동시에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우득!
카각!
묵직하고 둔탁한 충격음.
그리고 그 끝에,
파아악 ─── !
전열 중심이 말 그대로 폭발물에 의해 비산한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런…!”
그 모습을 후열에서 지켜보고 있던 베실은 어금니를 곱씹어야만 했다.
직후 무너진 전열로부터 위풍당당하게 쏟아져 나온 테티르가 직전의 충돌이 무색한 전속 전력의 속도로 후열을 향해 치달았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언제 어디서든 최고 속력의 돌격을 감행할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기사의 위용이란 게 바로 이것인가?
베실은 워 해머를 다시금 고쳐 잡고 고삐를 잡았다.
전투는 결국 상대의 진형을 꿰뚫는 것으로 승패가 좌우된다.
그 전에 어떻게든 저지해 저들을 품 안에 머금은 채로 싸움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
그럼 곧,
안개 속에서 아군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엠프리오 다르가.
그녀가 말이다.
베실과 그를 따르는 병사들은 저 거대한 곰을 잡기 위한,
덫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뿐…!
“가자!”
베실이 마주 오는 테티르를 향해 매섭게 나아갔다.
그러나 전속으로 달려오는 상대와 부딪친다면,
그것도 테티르와 부딪친다면 그대로 박살이 나버릴 거다.
베실은 직전까지도 본인 뒤에 갖춰진 진형을 눈에 담았다.
이 뒤로 전개된 진열은 총 네 개.
저 진열이 모두 뚫리면 테티르는 곧장 중간 지점에서 보급을 책임지는 야영지를 초토화할 것이다.
이미 새들을 통해 근처 모든 지리를 파악했을 테니 시간 문제조차 되지 않을 테지.
하지만 역시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확실히 무리다.
베실은 냉철한 표정으로 테티르를 향해 마주 달리던 말머리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중기병들 역시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우회해서 최대한의 속도를 확보한 뒤 테티르의 옆이나 후방을 친다.
그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후열 두 개쯤은 내줘야겠지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랴!”
고삐를 치대며 말을 보챈다.
베실과 그를 따르는 중기병들은 그렇게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 충분한 속도에 올라탈 수 있었다.
천천히,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테티르 쪽으로 선회한 베실은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해야 했다.
벌써 세 진열이 박살 나버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진열을 통해 감쇄되어야 할 속력이 계속 전속으로 유지됐으니 저렇게 터무니없는 공격력을 자랑하는 건 당연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지.
저 속도로 치달은,
테티르라는 바람을 기꺼이 감당하기로 한 저 병사들 하나하나가 위의 당연함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일 거다.
베실은 테티르를 향해 경의를 표하면서도 표독함을 머금은 얼굴로 기어이 그의 후미를 붙잡았다.
그리고 잡은 워 해머를 허공에 크게 휘두르며,
11년, 이자스
[추위로 봄을 찔러 죽인 진범, 겨울.]
후미의 속도를 죽일 한기를 전방에 살포했다.
허연 성에로 이뤄진 폭풍은 그렇게 앞에 있는 테티르 군의 후미에 엄습했고,
급격한 한기에 기동을 상실한 말들이 하나둘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마저도 말의 악바리 같은 투지로 계속해서 달려가던 기병도 결국 베실와 그 군에 따라잡혀 무참히 스러져 내렸다.
이대로만 가면,
최후미의 진열이 뚫리기 전에 잡을 수 있다!
베실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리고 그렇게 앞에 있는 기병의 머리통을 박살내며 앞으로 나아가던 베실의 앞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펼쳐져 있다.
테티르다.
그가 전군을 거꾸로 돌린 채 역돌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이런 씨…!”
베실은 입을 쩍 벌린 채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향해,
한껏 상기한 표정의 테티르가 메이스를 곧추세우며 명한다.
“짓이겨라.”
[22년, 훌리가트]
열 개의 산을 정형한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