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곰 사냥 (3)
아직 덜 여문 겨울의 한복판.
높은 산등성이에나 얹어질 법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지금도 교차하고 있는 두 명의 기사.
테티르 론바즈,
그리고 베실 라모였다.
두 기사, 두 재해의 맞물림으로 탄생한 눈보라는 난전 양상을 띠고 있는 전장 일대를 뒤덮었고.
그렇게 통상적이었던 모습의 전장은 이제 특수전이라 칭해도 될 정도의 환경으로 접어들었다.
이미 동상이 걸려 죽은 자들,
입 주위에 맺힌 고드름을 털어내며 임전을 거듭하는 자들.
무뎌진 신체를 애써 무시한 채 느릿하지만 확실한 공격을 감행하는 자들.
말 그대로 차갑게 펼쳐진 지옥 속에서 그들은 묵묵히 앞에 보이는 적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이러한 처절한 장면들을 놓쳤을 리 없던 테티르와 베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초조함을 입에 머금은 채.
“음…!”
“읏!”
그러나 끝내 덤덤히 서로 맞부딪혔다.
일대에 펼쳐진,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폭력적인 바람.
기류에 성에가 끼어 허옇게 질린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한기.
이미 버무려진 그 둘을 더욱 뒤섞는 맞부딪힘이었다.
이어 맞물린 둘의 무기가 서로 떨어지면,
휘이익 ───── !
듣는 것만으로 베인 느낌이 들 정도로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뒤따랐다.
그리고 그 소리를 반주 삼아,
둘은 다시 무기를 휘둘렀다.
쿵 ───── !
눈보라가 무색하게 치열한 불똥이 찬연하게 피었다가 빠르게 져 버린다.
“베실, 그 이름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군…!”
“내 생에, 아니 앞으로 꿀 모든 악몽보다 칠기사의 실감이 가장 끔찍할 것 같소만…!”
테티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베실, 저 기사는 강자다.
이 아이베리아에 강자가 수두룩하다지만, 그는 그 가운데서도 손꼽을 만큼의 강자라 해도 손색이 없다.
과거 전설을 써 내려갔던 자신이 무색해 보일 정도니까!
하지만 그건 반대로,
테티르에게 또 다른 호승심을 느끼게 했다.
현재는 과거에겐 녹과 같다.
그 현재가 짙어질수록 과거는 더욱 덧없이 녹슬어갈 뿐이다.
그러나 과거가 현재에 대항해 부딪친다면, 그러길 작심한다면.
끝내 현재와 부딪힌 과거는 뒤집어쓰고 있던 녹을 벗게 된다.
그리고 그걸 두 발 걷는 자들은 미래라 부른다.
테티르,
그는 이미 칠기사라는 녹을 벗고 베나즈라는 미래를 꿈꾸길 결심했다.
그러니 지금 앞에 놓인 현재는 테티르라는 남자에게 있어,
오히려 달가운 것이리라!
“으으음 ── !”
테티르는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그런 깊은 뜨거움을 담은 기합과 함께 짙은 입김을 뿜어냈다.
그러자 주위에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일시에 정지된다.
그의 작심이 주위 기류를 죽인 것이다.
이거 심상치 않다.
큰 것이 온다.
그것을 직감한 베실은 어금니를 씹은 채 워 해머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진눈깨비가 되어버린 일대 한기의 결정들이 자석처럼 망치 머리 부분에 들러붙기 시작한다.
이 한 번으로.
이 한 합으로.
아마도 승패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누구보다 마주 서 있는 두 기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이제 가진 재해의 기억을 해석해,
본인의 신체를 통해 나타내었다.
[훌리가트, 정형을 위한 쐐기]
한 점으로 나타난 강대한 바람이 테티르의 등 뒤에서 쐐기처럼 불어온다.
그것은 그대로 테티르의 전신을 밀어붙였고, 그 부담을 버틴 신체는 터무니없는 속도로 전방을 향해 쏘아졌다.
[이자스, 봄 융단에 내려앉은 늦겨울]
이에 맞서 주위 모든 한기를 끌어당긴 베실이 워 해머를 바닥에 있는 힘껏 내리쳤다.
팍 ──── !
눈이 시릴 정도의 섬광과 함께,
베실이 휘두른 망치로부터 원형으로 폭발하듯 터져 나온 빙하.
그리고 그 빙하를 말 그대로 쐐기처럼 분쇄하며 치달는,
테티르.
쩌적 ───── !
바람의 극점 그 자체가 되어버린 테티르가 폭발하듯 튀어나온 전방의 빙하를 가로질러.
끝내.
베실을 스쳤다.
휘이 ─
좀 전의 눈보라가 무색할 정도로 공허한 바람 소리가 흘렀다.
강한 눈보라 속에서 난전을 이어가던 군사들도 하나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침묵했다.
두 기사는 우뚝 서 있다.
그리고 그 둘 사이 바닥엔 붉은 실 같은 것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허…흑…!”
이내 하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베실, 그가 갑옷째 뜯겨나간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주저앉은 것이다.
사실 지켜보던 군사들은 의아했다.
폭격에 가까웠던 저 공격을 맞고도 멀쩡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베실은 테티르의 공격에 직격당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테티르의 방향이 살짝 틀어진 바람에 가까스로 공격을 스쳐 보냈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실은 난쟁이제 갑옷 절반의 손실과 함께 한쪽 갈빗대 전체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허…헉….”
간신히 숨을 몰아쉬던 베실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쉬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아…!”
서 있다.
우뚝 서 있다.
저 남자는, 과거 칠기사였던 저 남자는 우뚝 서 있다!
테티르는 조용히 몸을 돌려 베실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테티르의 정면을 바라본 베실의 얼굴은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
바람 그 자체가 되어 베실의 빙하를 그대로 갈라버린 테티르의 신체는 날카로운 빙하에 갈려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할퀴어지고 찢어진 듯 거적때기가 되어버린 갑옷 사이사이 드러난 피부에선 지금도 울컥거리며 핏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빙하를 가로지르면서 그가 상정했던 궤도가 어긋났음을,
저 처참한 모습으로서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베실은 그런 것 때문에 경악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티르가 우뚝 서 있는 것에 경악한 것이다.
피투성이가 된 저 남자는 쓰러지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베실을 내려다보고 있다!
결국에 베실은 까무러치듯 고개를 푹 숙였다.
“허…!”
짧은 한숨을 내뱉은 그는 이어 속 시원한 고백을 읊었다.
“완벽한 패배군.”
테티르는 조용히 메이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군사들은, 테티르를 따르던 그들은 약간의 침묵이 지난 직후.
누가 정해준 것처럼 일거에 펄쩍 뛰며.
아아아 ───── !
세상이 떠나가라 환호했다.
안개 밖에서,
테티르 대 베실 1차전.
테티르 군 승리.
* * *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지금이 그렇다.
나는 마치 하릴없는 사람처럼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다.
둘러앉은 자들과 무의미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간간이 외부에서 급히 들어온 소식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을 목격하는 것 외에.
지금 내가 하는 것은 마땅히 없다.
“공, 듣고 계십니까.”
기지어의 물음에 나는 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듣고 있습니다.”
“안개 때문에 각 군의 모든 연락망이 마비되어 보고되는 정보들의 최신화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기지어,
아주 쉬운 해결책이 하나 있습니다.
태풍의 눈을 이용하면 됩니다.
입만 벌리면 나올 말이었다.
혀끝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그 말은 이내 마른침과 함께 목 뒤로 넘어갔다.
비상 회의가 소집되기 한참 전.
베르융이 나와 독대하길 요청했다.
그렇게 접견실로 찾아온 그는,
* * *
“공, 현시점부터 꼭 상기하셔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쉬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겠지만…, 공께서는 이제 공식적으로 베나즈령 공동의 모순이십니다.”
“모순…? 그게 무슨 말인지…?”
내 물음에 베르융은 조용히 근처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께서는 명실상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지만 동시에 베나즈령 공동이 지켜야 할 목표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까지 암묵적인 규칙이었지만 스텔라스가 창설된 지금, 이 규칙은 이제 공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달라지는 게 있는 겁니까?”
“많이 달라지지요, 아니 아예 달라집니다.”
베르융은 고개를 든 채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각자의 자리에 충실한 자들은 이제 그들 입장에서 공동의 목표인 공을 진지하게 평가할 겁니다. 그건 재물을 세는 가치 단위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정치의 기반이 되어줄 피력이 될 수도 있지요.”
“아직 모두 이해하기엔 어렵군요.”
“이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이해로 또 다른 자들을 설득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확실한 건 그것이 곧 공에 대한 지지와 기반으로 다듬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까?”
베르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하면…,”
베르융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내, 그리고 아량이 필요할 겁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 시점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스텔라스는 이제 공식적으로 공을 위해 싸우는 기구이자 대변인입니다. 공의 싸움은 앞으로 이 스텔라스만이 할 수 있다는 소립니다.”
돌려 말하려는 것이 보인다.
“베르융, 본론을 말씀해주십시오.”
“엄밀히 말해 공의 싸움이 아니란 겁니다.”
답답함이 느껴졌다.
베르융이 해주는 이 이야기를 완벽하게 이해될 때가 언젠간 올 테지만, 그때 가서야 비로소 무언갈 놓쳤음을 깨달을 것 같아서.
그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에 고개를 가로저어야만 했다.
아직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베르융은 내게 말했다.
좀전의 사무적인 말투와는 다른, 온유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 아들 베르긴이 곧 전투에 나섭니다. 공을 위해 나선 그 녀석은 죽음을 불사한 채 싸울 테지요. 그의 그 각오를 보증해주십시오. 녀석의 아버지로서 부탁드립니다.”
“인내와 아량…, 말입니까.”
“그것을 통한 공의 안전으로서.”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어느 여름날이 마음속에 들어온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끝내 기사 베르융이 아닌 한 아버지에 불과한 그의 부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보고 드립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불쑥 찾아온 정찰병의 목소리에 퍼뜩 깨어나야만 했다.
“베르긴 경이 불상의 엠프리오군과 격돌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의 보고에 내 바로 옆에 있던 바돈이 급히 되물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자리에 있던 베르융은 그 어떤 내색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도착한 또 다른 정찰병이 보고를 올린다.
“특정되지 않았던 엠프리오 군 일부의 동향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들은 베르긴 경이 주둔하고 있는 쪽으로 이동 중이었습니다!”
안개 탓에 상호 연락은 왕복이 아닌 편도에 머무른다.
이 사실을 듣고도 달려가 전해줄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한창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11인회의 수장 깁슨이 입을 열었다.
“에커즈 기사단과 크녹스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에게 어떤 연락조차 보내지 않은 채 말입니다.”
그의 말에 두 손을 모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기지어는 펼쳐진 지도,
안개 밖 영역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드러난 곳부터 철저히 집중합시다. 바깥에서 벌어진 테티르 군의 승패가 이번 전투 결과의 핵심이 될 테니까요.”
* * *
짙은 안개.
그 안에서 희미한 호롱불 같은 것이 휘청거리며 반짝인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성스러운 문양의 갑주로 무장한 군사들.
그 앞 선두엔 백마를 탄 채 위풍당당한 기세를 뽐내는 기사가 있다.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
크녹스.
그가 본인 재해로 만든 작은 후광을 머리에 인 채 부리부리한 눈알을 굴려 어느 한쪽을 주시했다.
그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베커드가 물었다.
“경, 결정하신 겁니까.”
그럼 크녹스는 특유의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답한다.
“저곳으로 가야 합니다, 저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이에 베커드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기도문을 읊었다.
“라메.”
“라아 메에에 ──”
그것을 끝으로,
크녹스 군은 정확히 베르긴 군이 주둔하고 있는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