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오만
엠프리오의 네 기둥 중 하나.
이란 벨카는 머릿속에서 마주친 두 갈래 길 앞에 멈춰 서있다.
“상호 간 연락이 되지 않는 경우는 빈번했음.”
똑바로 쓴 안경을 구태여 다시 고쳐 쓴 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입력된 걸 출력하는 기계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하지만 연락이 일방적으로 두절 된 경우는 거의 없음.”
제법 결론에 가까운 것을 도출해냈지만 끝내 닿지 못했는지 턱을 괸 채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여왔던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의도적으로 내 연락을 무시했을 가능성이 큼.”
그의 이런 특이한 말투는 혼잣말, 또는 계산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나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굉장히 독특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그를 따르는 병사들에겐 어떤 신뢰의 상징과도 같아서.
고민하는 이란을 누구도 비웃거나 업신여기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의 계산을 통한 계획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처럼 전장의 한복판에서 투구를 벗고 다니는 기행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벌이고 다녔다.
그만큼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과 그에 따른 자신감이 충만하다는 뜻이기도 하거니와,
자기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적들을 제대로 지켜보겠다는 과시이기도 했다.
“공로에 눈이 먼 자들의 지긋지긋한 소통 부재일 확률, 십 중 십.”
잠시 후 재차 안경을 고쳐 쓴 그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공 엠프리오의 네 기둥은 그 기반부터가 누가 더 높은 공적을 가지고 있느냐였다.
따라서 네 기둥은 엄밀히 말해 지금껏 세웠던 공의 크기에 따라 조직 내 암묵적인 서열이 존재한다는 소리이고,
이는 곧 조직 내부에 언제나 치열한 경쟁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란은 일찍이 그 문제에 대해 다각적으로 고찰해왔었다.
때문에 엠프리오가 네 기둥이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원료로 쓰고 있는 것이 긴장이란 것도,
그것으로 인해 네 기사가 자신이 아닌 눈앞에 놓인 경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진작에 통찰해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것을 문제 삼지 않는 이유는,
네 기둥은 결국 철저한 능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란이 네 자리 가운데 한자리를 꿰차고 있는 건 그만큼 그의 능력이 보증된 것이라는 증거였고,
그 증거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그에게 있어 가장 확실한 증표요 명찰이자 훈장이었다.
전장에서 투구를 쓰고 다니지 않는 것 이상의 과시.
이란에게 네 기둥이란 조직의 소속은 그 자체로 만족을 주었기에 그는 조직 내 강요된 경쟁에 순응했고 빠르게 적응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텔라스 내 주의해야 할 적은 에커즈 기사단과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 둘 뿐.”
장고를 거듭한 끝에.
“테티르는 네 기둥 중 최고의 실력자인 베실과 초기 개전을 벌일 것임, 뒷 봉합은 엠프리오 대공이 할 것이나 결국 베실은 이번 전투에서도 최고 공적자가 될 것임.”
안경 속 날카로운 눈매를 드러내며 한참 혼잣말을 늘어놓는다.
“이투과 케린은 스텔라스 내 약점이라 평가되는 베르긴을 통해 가성비 좋은 공적을 노리고 있음, 이 부분으로 볼 때 베르긴 군 쪽에 별도의 보험이 있을 가능성 다분.”
연락의 부재에 대한 당위성을 쫓던 그는 이제 그 앞에 놓인 결론을 마주했다.
“날 엿 먹이려 작정했다고 볼 수밖에 없음.”
불안한 모양새로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던 그는,
“스텔라스에 또 누가 있었지, 그래. 가버트 로셀란. 그 역시 스텔라스의 약점 중 하나로 평가되는 기사.”
살며시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하나를 나눠 먹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런데.”
이란은 고개를 들어 뿌연 안개 너머를 바라보았다.
“가버트 군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이란은 적극적인 정찰과 신호 줄 설치를 위해 서른이 넘는 정찰대를 파견했다.
* * *
엠프리오의 기사들은 안개 속에서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특수 제작된 신호 줄을 사용한다.
최소 2인 1조로 구성된 정찰병은 이 신호 줄의 중계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며,
신호 줄을 통해 타 군의 연락을 받는 즉시 본대에 알리는 보고체계를 가진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위 가정들이 전부 들어맞는다면 이에 따른 문제와 의문이 몇 있다.
첫째, 우리가 처리한 선발 정찰병의 부재를 적 본대는 왜 의심하지 않는가?
둘째, 네 기둥에 소속된 기사들은 정말 안개 속에서 펼치는 전투가 주특기인가?
셋째, 엠프리오 다르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선 첫째와 관련한 문제는 간단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처리한 적 정찰병의 수는 대략 다섯.
그러고도 꽤나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적 본대에서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파생된 두 번째 의문.
왜?
저들이 진정 안개 속에서 펼치는 전투가 주특기라면 따로 떨어져 신호 줄의 중계를 맡는 정찰병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게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런데 왜 정찰병들의 부재에도 저들은 저리도 무던하단 말인가?
안개 속에서 벌이는 난전을 주특기로 삼는 부대의 움직임으론 볼 수 없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말이지.
결정적으로,
이 지독한 안개에 있을지도 모를 상성에 대한 경계가 거의 없다.
기압과 관련된 인챈트는 안개에 있어 최악의 상성을 자랑한다.
개전 초기부터 내가 적 본대를 찾아 지금까지 뒤쫓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위 상성 문제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안개는 기본적으로 바탕에 저압이 깔려 있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안개가 뒤덮인 베나즈령 전체가 저압으로 변해 있다는 소리다.
이러한 저압이 바탕이 된 환경에서,
내가 휘두르는 고압은 더욱 위력적으로 변한다.
고압으로부터 쟁취한 초인적인 감각부터, 고압을 통해 일대에 펼치는 침묵까지 전부다!
그 덕에 초기부터 내 감각으로 적 본대 하나를 감지할 수 있었고, 그를 끝까지 놓치지 않고 추적할 수 있었다.
이렇듯 기압은 고점과 저점의 차이가 클수록 그 효과 역시 극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기압류 인챈트에 대한 의심이 한 가닥이라도 있었다면 그에 따른 조치를 해야 할 텐데도 저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때,
저들은 나에 대한 상정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반대로 말하면 적 본대를 이끄는 기사의 인챈트가 내 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것이겠지.
가능성은 후자 쪽이 높다.
그렇다면 적 본대의 무던한 움직임은 반대로 날 꾀기 위한 함정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
선택지는 두 개다.
안개 속에서 말 그대로 오리무중인 엠프리오가 가세할 전장이 어디인지 지금부터 탐색해 지원할 것인가.
아니면 기만일지도 모르는 저 앞의 적 본대를 작심하고 상대할 것인가.
아군인 에커즈 기사단,
그리고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은 그 엠프리오보다 더 종잡을 수가 없기에 그들의 등장에 대한 가능성을 믿고 움직이는 것은 도박이다.
하여 지금 시점이야말로 선택을 내려야 할 때.
생각이 이 지점에 머물 때쯤.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들긴다.
이에 고개를 돌려보면 내 뒤를 바짝 따르던 기수가 익숙한 손동작으로 수화를 시작했다.
‘가버트 경, 적 본대에서 다수의 정찰병이 움직이는 것을 포착했습니다.’
이건 또 뭐지?
기수의 수화에 서둘러 같은 수화로 답했다.
‘우리 쪽을 상정한 움직임인가?’
‘그렇게 보이진 않습니다, 아무래도 주위에 흘러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긁어모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만약 전자라면?
나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없어서, 그에 따른 상정조차 하지 않았더라면?
근데…,
이렇게나 방심한 채 무방비한 모습으로 전투를 시작했을 리가 없잖아?
아니,
절대란 건 없다.
이 아이베리아에선 더더욱.
만약 방심한 것이라면, 그것이 맞다면.
응당 그에 따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 * *
“역시나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부관의 말을 들은 이란은 더욱 벌레 씹은 표정을 지은 채 안경을 고쳐 썼다.
“완전히 날 고립시켜버렸군, 내 능력이 그렇게나 두려웠던 건가? 이투, 케린!”
번지르르한 이마에 굵직한 핏대 하나를 세운 이란은 그렇게 말머리를 돌린 채 병사들에게 고했다.
“들어라! 우리 군의 우수성을 시기한 저들이 작정하고 따돌리길 감행하였다! 그러나 상관없다. 우리는 해왔던 대로 증명하면 될 뿐이니까! 나 이란 벨카가 너희들을 ─── !”
쩌렁쩌렁,
병사들에게 소리치던 이란의 목소리가 어느 시점부터 들리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이곳에 있는 모두의 귀가 먹먹해져 그 어떤 것도 고막을 두들기지 못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 이질적인 감각에 이란은 눈썹을 치켜세운 채 다시금 입을 뻐끔 열어보지만,
“─── !”
끓는 목청과는 달리 입 밖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타나지 않는다.
잠시 후,
순수한 당혹감을 드러낸 이란이 허겁지겁 옆에 있던 기수를 불렀다.
“─── !”
물론 들릴 리가 없다.
바로 옆의 기수는 아예 이란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다.
이란은 기수가 들고 있는 자신의 투구를 가로채기 위해 서둘러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렇게 이란의 움직임을 뒤늦게 눈치챈 기수가 당황한 표정으로 투구를 건네주려 했지만,
그것에 채 손이 닿기 직전.
그들 바로 옆으로 시커먼 기병대가 쏜살처럼 나타났다.
그 기병대의 선두에 있던 기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에 든 창을 내질러,
유일하게 투구를 쓰고 있지 않은 이란의 목을 정확히 꿰었다.
직후 안개 속으로 사라진 기병대.
동시에 먹먹해졌던 병사들의 귀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런 그들의 회복된 청각에 제일 먼저 포착된 것은.
“푸…훅…!”
진득한 피를 토해내는 이란의 기침 소리.
그는 그렇게 푹 꺼진 상체를 이기지 못하고 안장 위에서 추락했다.
한바탕 엄습한 침묵이 가셨는데도,
쓰러진 이란을 앞둔 병사들은 직전의 침묵 안에 가둬진 것처럼 누구도 소리 내지 않았다.
애초에 실시간으로 벌어진 이 충격에,
누가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이란 벨카, 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