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58화 (358/365)

358화. 노림수

“베르긴 경, 더 무리하시다간…!”

인챈트에 무지한 백부장이라도 알 수 있다.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앞에 있는 기사는 분명 한계에 치달은 상태였다는 것을.

직전에 있었던 무지막지한 결투, 그 후유증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기사는 다시 품 안에 있던 자루를 쥐려 하고 있었다.

견갑이 다 찌그러지고, 투구 한쪽이 움푹 들어가 있었으며 갑옷의 균열 곳곳에는 지금도 핏물이 흐르는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남은 한 손엔 장정 둘이 달라붙어도 휘두르기 힘든 중검이 들려 있었다.

기사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누구보다 명확히 증명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주위 병사들은 경외와 걱정, 두려움으로 지켜보고 있다.

백부장의 만류에도 기사 베르긴은 자루를 쥔 채 거센 바람을 자신의 몸에 밀어 넣었다.

이윽고 그의 주변에 감각이 담긴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이내 사방으로 흩어진다.

“쿠훅…!”

얼마 안 가 베르긴은 피 끓는 기침을 내뱉었다.

그러자 투구 밑으로 걸쭉한 핏줄기 하나가 길게 늘어진다.

이에 종자가 헐레벌떡 다가와 기꺼이 보관해왔던 마른 천을 꺼내 베르긴의 투구 주위를 닦았다.

“도와주십시오.”

이어지는 종자의 다급한 요청에 직전까지 베르긴을 말렸던 백부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투구가 휘어져 안면 가리개가 열리지 않습니다, 이건 난쟁이들의 땜질이 아닌 이상 힘으로 열 순 없어 보입니다.”

종자의 말에 백부장은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 거요…?!”

“피 따위에 투구 속이 엉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경께서 숨쉬기가 힘들 테니까요.”

종자는 피에 젖어 묵직해진 천을 백부장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백부장은 또 자신의 부장에게 그것을 건넸다.

마지막으로 천을 받아든 병사는 그 무게에 짓눌린 듯 겸허한 표정을 지었다.

“투구 반대쪽, 안면 가리개 이음매에 이 천을 집어넣으십시오.”

종자의 다음 지시에 백부장은 묵묵히 베르긴 옆에 다가와 시키는 것을 그대로 해냈다.

“마른 천이 더 필요합니다, 없습니까?!”

다시 이어진 종자의 외침.

그러자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너 나 할 거 없이 나서서 품 안에 고이 보관하고 있던 천들을 꺼내 들었다.

연인의 염원이 담긴 자수가 박힌,

부모의 걱정과 냄새가 가득한,

자식의 응원, 바람이 섞인 값비싼.

그런 다양한 종류의 천들이 베르긴의 갑옷 주위에 덕지덕지 덧붙여져 간다.

그 와중에도 감각을 담은 거센 바람으로 주위 일대를 탐색하는 데에 열을 올렸던 베르긴은,

그제야 꽉 막힌 투구로부터 숨통이 틔었는지 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부상병들을 후방으로, 나머지는 재정비를 조속히 마치고 다시 전열을 유지토록.”

그의 말에 병사들은 말없이 들고 있던 방패와 무기들을 부딪쳐 호응했다.

온몸에 배겼던 피와 땀이 모두 닦인 베르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치 손으로 주물럭거려 탄생한, 기사의 화신과도 같은 모습으로 병사들 사이를 가로지른 그는.

“이번엔 두 개 분대가 한 점이 되어 우리에게 오고 있다.”

담담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지옥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직전까지 느꼈던 경의 때문일까.

병사들은 왜인지 누구 하나 동요하지 않았다.

감은 붕대를 더 단단히 조일 뿐.

그들 사이를 끝까지 가로질러 선두로 나선 베르긴은 중검을 바닥에 꽂은 채 뒤돌아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달라진 것은 없다.”

태연하고, 당당한 그의 말에 병사들은 말없이 다시 한번 자신의 무기와 방패를 부딪쳐 소리낸다.

“우린 그저 싸울 뿐이기 때문이다.”

척 ─ !

치열하게 도열한 병사들이 발을 굴러 제식을 부린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전열 양옆의 부장들이 목청껏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방패 쥐어!”

“3기수는 나를 따라라!”

“전투가 시작되면 중심 열에 힘을 싣는다!”

다시 예열되어 간다.

점점 뜨거워 진다.

우린 곧 싸운다.

그 진실 앞에 병사는 열렬히 산화할 준비를 마쳤다.

* * *

“완전 초주검이 되었군…,”

“닥쳐…!”

엠프리오의 네 기둥, 케린 맥힐의 말에 이투가 대뜸 신경질을 부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투의 상태는 케린의 말 대로 초주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과연 오르테라 이 말인가? 그 이투를 이렇게까지 구겨놓다니.”

날 선 이투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케린은 순수한 감탄을 연이어 터트렸다.

둔기 따위에 두들겨진 듯,

전신을 덮은 갑주 절반 이상이 일그러져 있을뿐더러 한쪽 견갑은 아예 다 날아가고 안감인 사슬 갑옷까지 찢어져 있다.

난쟁이제 갑옷이 아니었다면 이투의 한쪽 팔은 어깨째 날아가 버렸을 거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광물을 통짜로 써서 만든 거나 다름없는 난쟁이제 갑옷을 저 지경까지 만들었다는 거다.

“이번에 완전히 박살 내 버린다.”

이투는 이를 갈며 부상입은 어깨 위로 철판을 덧대었다.

케린은 그런 이투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투, 이란의 연락을 받은 적 있어?”

직후 그녀는 지금까지 내심 걸려왔던 부분을 꺼내어 물었지만,

“그 안경잽이 새끼! 또 뒤에서 뭔갈 꾸미고 있겠지.”

이투는 피 섞인 침을 뱉으며 가볍게 씹어 넘겼다.

“그 새끼 가슴팍엔 심장이 아니라 반쯤 맛 간 계산기가 들어 있을걸? 두근두근이 아니라 타닥타닥하는 소리를 내는.”

일전에 있었던 숫자 놀음으로 자신을 깎아내렸던, 그 부분 때문일까.

이투는 이란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내뿜었다.

“하지만 이투, 이란은 언제나 전체의 승리를 꾀했어.”

“그 과정에서 몇몇을 누르고 말이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대공께서 설계한 작전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어.”

“케린, 당장의 전투에나 집중해라!”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이투는 말을 몰고 먼저 가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불안함을 곱씹던 케린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 보았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안개뿐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안개 밖 베실과 어딘가에 있을 엠프리오.

그리고 오리무중인 이란을 향해 있었다.

* * *

합세한 이투 군과 케린 군은 금세 베르긴 군이 위치한 곳까지 다다랐다.

안개가 자욱이 깔려 있었음에도 그 소리만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깝게 말이다.

저 멀리서 격한 전사들의 발 구름과 함성이 들려오자 이를 듣고 잔뜩 흥분한 이투가 고삐를 틀어 전열 좌우를 훑기 시작했다.

“오늘은 우리가 절대다! 저들이 극복하지 못할 절대!”

그의 말에 정확히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격한 호응을 보냈지만, 반대로 케린이 이끄는 병사들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엄연히 서로 분리된 군이었으니까.

네 기둥 역시 엠프리오가 과거에 몸담고 있었던 칠기사라는 조직의 답습이었던 거다.

이투는 자신의 이 외침에 호응하지 않는 케린 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린 군은 동요하긴커녕 그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물론 과격한 성격의 난쟁이인 이투는 이것을 그냥 지나가지 못했다.

“군이면 군답게 기사를 존중해라 이 새끼들아!”

그러자 케린 군의 부관이 작정하고 따져 물었다.

“우린 케린 경을 따르지 당신을 따르지 않소.”

이에 옆에 있던 이투 군이 격하게 반발한다.

“뭐 이 새끼야?!”

“이투 경을 모욕한 거냐!”

순식간에 험악해진 상황, 이 가운데 긍정적인 사실 하나를 꼽자면 저 안개 너머 베르긴 군이 듣기엔 이 싸우는 소리가 함성으로 들렸을 거란 것뿐이리라.

이내 잠자코 있던 케린이 말을 몰아 전방에 나섰다.

“건물이란 하나의 완성된 건축물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탱하는 기둥 하나가 없다면, 그건 결코 건물이라 불리지 못하겠지.”

이투와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진행된 연설에,

그녀를 따르는 군은 같은 차분한 모습으로 경청했다.

“엠프리오 대공이 완성하려는 건물엔 필시 우리라는 기둥이 필요하다. 우리가 세우는 것이다.”

말을 마친 케린이 조용히 동쪽 땅에서 건너온 특이한 외날 검을 뽑아 전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케린 군이 기다렸다는 듯,

또 이투군에게 보란 듯이.

아 아 ──── !

벼락같은 함성을 쏟아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게 보기에 일군이나 들여다보면 선으로 갈라져 있는 두 개 군은 두 기사의 지휘 아래 전방을 향해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온다!”

베르긴의 말에 병사들이 몸의 중심을 앞쪽 방패에 쏟는다.

방패 사이사이엔 파이크가 우뚝 솟은 채 적을 기다렸다.

곧이어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안개 너머, 몰려오는 적들의 묵직한 무게감을.

그 무수한 발소리를.

진동을.

그러나 그 소리에 채 현혹되기도 전에, 방패 벽 바로 뒤에 서 있던 베르긴이 재차 소리쳐 모두를 일깨웠다.

“버텨라! 후 열의 전사들이 너희들의 버팀을 보상할 것이다!”

기사의 외침에 우직하게 뿌리내린 나무처럼, 병사들은 내세운 방패와 파이크 뒤에서 그 발을 땅에 묻을 기세로 힘을 준다.

그렇게,

두두두 ──── !

직전까지 다가온 진동과 함께,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아 ──── !

적들.

전보다 훨씬 많은 수의, 그리고 그 수에서 오는 자신감을 증명하듯 거나한 함성과 함께.

삐이익 ──── !

그리고 귀를 긁는 피리 소리와 함께.

으적!

들이닥친 검은 파도.

동시에 급격히 출렁이기 시작한 방패 벽.

곳곳에서 병사들의 깊은 신음이 새어 나오고, 끝내 버티지 못하고 신체 일부가 부러져 나뒹구는 이들이 속출한다.

결국,

유독 움푹 들어간 방패 벽 일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베르긴 군의 전열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일부의 균열로 시작해 무너져내리는 댐처럼, 이내 방패 벽은 걷잡을 수 없이 연쇄적으로 무너져리기 시작했고.

끝내 이투와 케린의 연합군이 베르긴 군의 후방을 빠르게 휩쓸었다.

채 후송되지 못한 부상병들까지 발 벗고 나서서 대항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베르긴을 중심으로 뭉친 병사들이 매섭게 항전을 거듭하며 작게나마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묵직한 항전을 지켜보던 이투가 기다렸다는 듯 그곳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베르긴! 맺지 못한 결투를 지금 끝내자!”

그런데 그 말이 터져 나오기 무섭게,

갑자기 주위가 고요해진다.

어떤 환경으로 인해 벌어진 고요가 아니다.

갑자기 나타난 이변을,

다수가 목격하며 내비친 침묵으로서 만들어진 고요였다.

빛.

그래,

그건 빛이었다.

안개를 뚫고 나타난,

등대와도 같은 빛.

둥 ─── !

둥 ─── !

빛의 등장 이후로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

그리고 끝내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보기만 해도 눈 시린 윤택한 군단.

그 전방에,

신실한 광신도가 있다.

“라아아 메에에 ─”

마침 그 광신도는,

펼쳐질 적들의 묵시록에 대한 기도를 끝낸 참이었다.

남은 것은,

“유린하십시오.”

단호하면서도 미끌미끌한 그의 지시뿐.

* * *

“음!”

나타난 빛의 군단으로부터 가장 먼저 단신으로 뛰쳐나간 것은 크녹스의 부관 베커드였다.

눈 밑의 얼굴이 드러나는, 개방형 투구를 쓰고 있던 그는 입꼬리를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꿈틀거리며 앞에 있는 적들을 향해 투핸디드 소드를 휘둘렀다.

휘리릭 ── !

휘둘려진 검은 묵직한 바람 소리를 내뿜으며 그 검이 그리는 궤적 선상의 적들을 문자 그대로 날려버렸다.

마치 대인 병기로 공성추를 휘두른 것처럼!

형용할 수 없는 압도적 무력에 이투와 케린의 연합군 한 열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박살 나버리자,

이투는 그를 저지하기 위해 얼른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그렇게 곧바로 대치하게 된 두 기사,

그러나 베커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으흠?”

유쾌하게 입꼬리를 놀리며 이투의 부상당하지 않은 어깨 쪽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

곧이어 이투가 베커드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를 향해 맞돌격을 한 베커드는 어렵지 않게 이투의 멀쩡한 어깨를 통째로 베어 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베었다기보다 짓이겨 찢어버린 것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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