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59화 (359/365)

359화. 노림수 (2)

13년, 페리막스.

만든 구름의 비.

케린의 손에 들린 외날 검에서 푸른 빛이 반짝인다.

직후 하늘에서 안개비가 살포되듯 쏟아져 일대의 모든 것들을 축축하게 적셨다.

동년에 기록된 다른 위력적인 인챈트와는 달리,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인챈트는 이렇듯 위력과는 거리가 먼 것에 속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케린의 인챈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위력이 서서히 드러나는 쪽에 가깝다.

페리막스.

과거 거대한 공장 단지에서 쏟아졌던 그 비는 공장으로부터 배출된 검은 숨으로부터 만들어진 것.

좁쌀만 한 빗물 안에 몇 가지의 이물이 담겨있는지조차 측정하기 힘들 정도로, 당시엔 ‘죽음의 비’라는 이명으로 악명을 떨쳤었던 재해.

그것이 바로 케린 맥힐, 그녀가 가진 재해의 진가다.

그녀에 의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마자, 그녀 바로 뒤를 따르던 정예병들은 자연스럽게 안장에 채워져 있던 철제 우산을 뽑아 펼쳤다.

옆에 바짝 붙어 있던 종자의 우산 아래서 침착한 표정으로 일대를 살피던 케린은 곧장 왼편,

이투 군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퇴각하라!”

직전의 모습과는 달리 쩌렁쩌렁한 케린의 목소리에 이투 군은 마치 홀린 듯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그들은 이투의 한쪽 팔이 나뒹구는 걸 목격했다.

그들이 믿고 따르는, 그 믿음에 걸맞은 용맹함을 떨쳤던 이투가 난데없이 나타난 기사의 일격에 죽도 못 쓰고 당해버린 걸 생생하게 목격한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이투 군은 자연스럽게 케린이 현 전장의 유일한 지휘관임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말 한마디에 이투 군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이어서 케린은 저 앞, 땅에 널브러져 있는 이투를 구원하기 위해 부장들과 함께 나아갔다.

이슬비 아래, 철제 우산을 쓴 채 달려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그 분위기부터 범상치 않은 무게감을 자랑했다.

쓰러진 이투의 근처,

투핸디드 소드를 허공에 가볍게 돌리며 주위 정황을 살피던 베커드는 저 멀리 다가오는 케린을 바라보곤.

“으음, 도망가야겠군.”

한없이 가벼운 말투로 중얼거린 뒤 유유히 말머리를 돌려 물러섰다.

* * *

“저들이 퇴각합니다.”

섬광 크녹스를 따르는 기사,

글론이 그르렁거리며 따지듯 물었지만, 그 말을 들은 크녹스는 팔을 펼쳐 그를 제지했다.

“퇴각하게 두십시오.”

“어째서입니까?”

“지금 쏟아지는 이 비, 불결한 냄새가 가득합니다.”

보석 같은 푸른 눈을 부라리며 하늘을 올려다본 크녹스는 재차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먹 쥔 손을 하늘 위로 들어 보였다.

“저들이 퇴각할 때까지 베르긴 군을 방호합니다.”

나긋나긋하고 여유로운 그의 목소리에,

그를 따르는 수천의 병사들이 맞물려 움직이는 기계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인다.

“훌륭한 기사로군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드러내 상대에게 입게 될 손해에 대해 상기시켜주다니.”

이어지는 크녹스의 품평에 글론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소립니까?”

“우린 퇴각하겠다, 이런 우릴 쫓는다면 지금 쏟아지는 이 비를 계속해서 감당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지금 가진 능력을 담보로 안전한 퇴각을 꾀하고 있는 겁니다.”

글론이 의아한 표정으로 쏟아지는 빗물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이 비가 그렇게 위험하단 말입니까?”

“글론 경, 그녀의 능력은 당신이 가진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리고 비슷한 궤에 속하는 능력은 대게 서로에게 해 끼치기 힘들지요.”

글론은 멋쩍은 표정으로 뻗었던 팔을 거두었다.

“그녀의 재해는 다른 의미로 최강입니다, 군을 죽이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 질병과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이쯤으로 그쳐서 다행입니다.”

인자한 크녹스의 말에 글론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화답했다.

“라메.”

“라아아 메에에─”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뚝 그쳤다.

이투를 구원한 케린 군은 이미 안개 속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동시에 크녹스 군은 베르긴 군을 둘러싼 채 완벽한 방호진을 구축한 상태였다.

* * *

케린은 푸른 빛을 발산하는 외날 검을 허공에 두어 차례 흔든 뒤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머리 위로 쏟아지던 이슬비가 잠근 듯 순식간에 그친다.

직후 병사들은 쓰고 있던 철제 우산을 하나둘 접기 시작했다.

개중에 몇 개는 벌써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케린은 씁쓸한 얼굴로 바로 뒤, 마차에 실려 있을 이투 쪽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결국 대공의 뜻대로…,”

미묘한 웃음을 머금은 그녀는 다시 전방을 주시한 채 말을 몰았다.

“케린 경,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이윽고 그녀의 종자가 옆에 바짝 붙어 안부를 물어왔다.

“나는 괜찮다.”

“과연,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입니다.”

“그래, 눈 시리도록 찬란하더구나.”

“어렵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베나즈와 손을 잡은 이상.”

종자의 물음에 케린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 생각하느냐?”

“아닙니까?”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쪽을 살핀 뒤 나지막이 대답했다.

“반짝임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아, 결국 시린 눈을 부여잡게 만들지.”

그녀의 말 속에 담겨있는 은밀한 가시를 느꼈을까.

종자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알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안개 밖으로 가자, 대공께서 세우신 계획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궁금하구나.”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고삐를 치대 속도를 올렸다.

* * *

테티르와 베실의 결투는…,

아직 채 봉합되지 않았다.

맞물려 뒤섞인 두 군은 처절한 싸움을 계속했다.

서로에게 치명적인, 그런 필살에 가까운 합을 주고받은 두 기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을 따르는 각 군은 결사를 다짐한 채 기꺼이 전선을 그려 그 선 위에서 죽음으로 응수했다.

급히 부관들에 의해 후방 전선으로 실려 온 베실은 그 와중에도 피 섞인 기침을 벅차게 내뱉었다.

종자와 의무병 수십이 그의 주위에 달라붙었고,

끝내 의무병 하나가 결단을 내렸다.

“폐에 바람이 들어찼습니다.”

그 말에 종자가 서둘러 반쯤 파괴된 갑옷을 거뒀고, 그에 맞춰 의무병 하나가 뾰족하고 얇은 유리관 하나를 꺼내 가슴 아래쪽을 겨누었다.

일말의 침묵.

그사이에 나뉜 의무병들끼리의 눈빛.

잠시 후, 의무병이 베실의 가슴 아래쪽에 들고 있던 유리관을 찔러 넣는다.

그러자 픽하는 소리와 함께 부풀었던 베실의 상체가 진정되듯 꺼졌다.

* * *

주르륵,

코에서 흘러내린 피를 손으로 대충 훔친 채 병사들이 간이로 마련한 자리에 앉은 테티르.

그런 그의 곁으로 종자와 병사들이 달라붙어 조심스럽게 갑옷을 하나하나 벗겼다.

아직 곳곳에 날카로운 결을 가진 성에가 껴 있다.

만지는 것만으로도 피부를 꿰고 들어올 것만 같은 그 살벌함에 병사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런 무시무시한 것을 뒤집어쓰고도,

아직 뜨거운 숨을 내쉬며 멀쩡히 눈 뜨고 있는 테티르의 심정이 어떨지 감히 예상조차 되지 못했으니까.

“전황은 어떻지.”

그의 물음에 격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은 가르웨가 즉답했다.

“대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쯧, 완전 제대로 걸렸군.”

테티르는 붉은 침을 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충 갑옷의 정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한다, 내가 직접 저들을 뚫어 활로를 열겠다.”

담담하게 어마어마한 말을 내뱉는 테티르를 가르웨는 얼른 뜯어말렸다.

“경,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물론 가르웨의 그 말을 들을 테티르가 아니었다.

“베실 라모…, 제법이야. 아주 강한 자였다.”

핏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웃음꽃을 핀 테티르는 그 와중에도 냉철한 본능을 드러냈다.

“그러나 놈은 다시 일어서지 못할 거다, 적어도 이 전투에선!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다시 버젓이 개선한다면 저들의 기세는 완전히 꺾이게 될 테지.”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내가? 아니면 우리 군이?”

테티르의 물음에 가르웨는 대답 대신 마른 침을 삼켜야 했다.

“내게 다시 갑옷을 입혀라, 바로 출발한다.”

그의 말에 시중을 들던 종자와 병사들은 당황한 얼굴로 가르웨의 눈치를 살폈다.

끝내 가르웨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그러자 종자와 병사들은 막 피를 닦은 갑옷을 다시 테티르에게 입혔다.

그렇게 무장을 끝마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온 테티르는 말 위에 번쩍 올라탔다.

“일 점으로 돌파해 활로를 연다!”

직후 떨어진 벼락같은 그의 말에 주위 기류가 들끓기 시작했다.

이내 테티르를 위시한 기마대가 후방을 뚫기 위한 창이 될 준비를 마쳤다.

그 와중에도 전방에선 베실 군과 치열한 교착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가르웨! 전방 아군을 아울러 내 뒤를 따르라! 내 길을 완벽히 열어 줄 테니 그저 앞만 보고 달려라!”

“그리하겠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가르웨는 즉시 말을 타고 전방으로 달려갔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테티르는 메이스를 앞으로 겨눈 채 피에 젖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가자, 그저 꿰뚫는다!”

지극히 단순하고 명백하다.

그의 말을 끝으로 기마대는 쐐기 형태의 진형으로 치달아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테티르는 돌파해야 할 후방 너머.

펼쳐져 있던 안개가 점점 거둬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움직인 것인가…, 엠프리오…!”

이를 가득 문 채 으르렁거린 테티르는 그러나 더욱 고삐를 치대 후방, 베나즈령으로 향하는 길을 열기 위해 맹렬히 나아갔다.

쏘아지듯 나아간 테티르 군의 창.

그것이 곧 베실의 후방 군을 말 그대로 관통한다.

쾅 ─ !

으적 ─ !

묵직하기 짝이 없는 돌진에 후방 적의 전열은 마치 종이가 찢어지듯 균열을 내며 무참히 무너졌다.

이제 곧,

테티르와 그를 따르는 기마대가 저 마지막 후 열만 열어젖힌다면 그대로 베나즈령에 까지 닿는 길이 완성된다.

“따르라!”

테티르는 다시 한번 우렁찬 외침으로 뒤따르는 기마대의 피를 끓였다.

그렇게 끝끝내.

마지막 적들의 진영을 무너트린 테티르는,

그 앞에 펼쳐진 광경 앞에 급히 고삐를 당겨 멈춰야 했다.

* * *

엠프리오 다르가.

그녀는 막 자신의 앞에 멈춘 테티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뒤로 펼쳐진,

막 거둬진 안개로부터 그 모습을 드러낸 수천에 달하는 본 군.

그 위압감은 테티르를 따르던 기마병들의 뜨거웠던 피를 순식간에 식게 했다.

“테티르 경.”

엠프리오는 테티르에게 가슴에 손을 얹어 기사의 예를 보였다.

이에 테티르는 불편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낸 채 짧게 답했다.

“엠프리오.”

“여전하시군요,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대단하십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엠프리오는 지체 않고 활짝 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테티르 경, 불편한 얽힘의 시작점이 되어 우리를 베나즈에 닿게 해주십시오!”

이윽고 엠프리오 뒤편에 도열한 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너진 둑 너머로 쏟아지는 물처럼.

그러나 그 앞에 바위처럼 우직하게 마주 서 있던 테티르는 망설임 없이 메이스를 위로 번쩍 치켜든 채.

“가자…!”

그저 고삐를 당겨 앞으로 나아갔다.

그를 따르는 기마대 역시 한 치 망설임 없이 따랐다.

테티르 군의 창은,

그 끝의 예기만큼은 아직.

피를 부를 만큼 날카롭다!

그렇게 양측이 맞물리려 하고 있을 때.

제 삼의 장소에서.

────── !

묵직한 피리 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울려 퍼졌다.

이윽고 왼편,

평야로부터 듬성듬성 모습을 드러낸 깃발.

그리고 그 아래 수백에 달하는 기마대.

“에커즈 ─── !”

선두,

아리나의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마대가 쏟아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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